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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풍성하신 하나님 (빌 4: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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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성구에 별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지수표’입니다. 성경에는 ‘풍성하다’는 이 용어가 아주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58번 사용하고 있는 말이고, 빌립보서 안에서는 은혜가 풍성하다는 이 표현이 무려 40번이나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풍성이라는 말이 이 두 구절 안에 세 번이나 나옵니다. 이렇게 풍성이라는 말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 용어입니다. 이 용어가 가지는 뜻부터 우리가 규명을 해보아야 합니다.

  풍성함의 의미

  풍성하다는 말은 물질만 풍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이 풍성하다는 말을 사용할 때마다 너희들은 물질이 여유가 있다, 나도 물질이 여유가 있다 그런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내가 풍족하다는 것은 상당히 영적인 이야기입니다. 또 바울이 교회를 향하여 너희들은 풍족한지라고 말을 할 때 너희들의 물질이 풍족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적인 면에서 복합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풍성하다는 말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자신이 풍성하다는 것을 매우 강조합니다. 나는 풍성한 하나님이다, 충만한 하나님이다, 나는 만물 위에 충만하다 이렇게 하나님 자신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엘로힘이라는 말인데 성경시작부터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시는데 그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모든 것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쓰여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10절에 “나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요 약한 자 같으나 강한 자요 없는 자 같으나 있는 자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니라”고 했는데 이 바울의 고백을 한마디로 묶으면 나는 ‘풍족한 자’ ‘풍성한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당하게 나는 풍족한 자라, 나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풍성하다는 말이 너무 심오하고 또 하나님이 애용하는 말씀이고 사도 바울이 애용한 말씀이기 때문에 이 뜻을 파악하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측면, 영적인 측면의 의미가 다 담겨있는 것인데 이런 짤막한 이야기를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추운 겨울날 털복숭이 강아지가 털이 별로 없는 빼빼 마른 강아지를 만났습니다. 그 강아지를 보고 “야, 난 털이 많아서 참 따뜻한데 너는 정말 안됐다.” 이렇게 위로 겸 빈정대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빼빼 마른 강아지 하는 말이 “모르는 소리 하지마. 나는 뒤집어 입어서 그래.” 그렇게 응석을 했답니다. 당당하게 쏘아붙였습니다. 이 당당함, 여유로움이 풍성하다는 말속에 다 포함된 것입니다.

  풍성하다는 말은 우리가 당당하고 여유있다는 말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대로 당당하다는 의미가 이 풍족하다는 말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좋은 말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풍성한 삶을 사는 자입니다. 이 은총이 이 말씀을 함께 나누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 바랍니다.

  풍족한 사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1장 5절에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보고 너희들은 모든 일에 풍족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모든 일에 풍족한 교회였습니다. 우선 은사가 풍족한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혜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그 풍성한 은혜를 유지하고 누리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풍성한 이 은혜를 관리하는데 실수하거나 잘못된 점들을 많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모든 일에 풍족하다, 즉 은사에 풍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은사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기본무장입니다. 성도들은 다 은사가 있습니다. 은사대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은사가 없다’라는 말은 성립이 안 되는 말입니다. 다 은사가 있는 것입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밤무대 가수생활 하시는 분들은 하루 밤만 아니고 매일 매일 그렇게 밤을 새우면서 노래를 불러도 괜찮답니다. 이것은 은사입니다. 아무나 못합니다. 어떤 기능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하는가 싶지만 은사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시장에 장사하시는 분들도 어떻게 저렇게 장사하시나 싶지만 은사입니다.

  풍성한 은사

  여러분들이 저를 보고 “목사님, 설교한다고 수고하지요?”라고 말씀하곤 합니다. 제가 설교 많이 하는 편이죠? 주일이 얼마나 빨리 다가오는 모릅니다. 주일저녁 되면 ‘아, 이제 다 마쳤구나’ 싶은데 월요일 되면 또 다음 주일 설교제목을 잡아야 됩니다. 목회는 7분 설교입니다. 생일감사예배, 입주감사예배, 주례사, 장례식 설교 전부 7분 단위의 안팎입니다. 7분 동안에 청중들에게 무언가 한마디 들려줘야 되고 감동을 줘야 되는 7분 설교에 승부를 걸어야 됩니다. 목회자는 30분짜리 설교보다 7분 설교를 잘할 줄 알아야 됩니다. 또 외부에서도 가끔씩 설교요청이 들어옵니다. 그 외부설교도 굉장히 중요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제가 설교청빙을 받아보지만 그쪽 교회에서는 설교자를 선정할 때 상당히 생각하고 기도하고 선정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설교자를 교섭합니다. 부흥회 강사교섭은 하나님의 인도가 있습니다. 다른데 가서 설교해보면 우리 교회에서 하는 것보다 다르게 해야 됩니다. 표현도, 주제도 다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할 말을 주십니다. 이 많은 설교분량을 제가 은사니까 감당하지 은사 없으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합니다. 또 새벽에도 20분 설교를 해야 됩니다. 새벽기도 설교 5분만 하면 되는데 저는 굳이 20분을 해야 됩니다. 20분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 오신 분들은 무언가 듣고자 왔는데 20분 설교라는 그게 그냥 안나옵니다. 책 읽고 메모하고 신문보고 방송보고 메모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 하면 여러분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내겐 은사입니다. 힘들지가 않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설교하라 해도 아마 되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그건 내 은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되게 하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저가 안 가진 은사를 다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에서 기도 제일 많이 하는 교인은 담임목사다’ 그런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담임목사가 여러분이 추종을 못하는 은혜는 설교적 은사 즉 가르치는 은사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들 가운데서 금메달이 나와야 됩니다. 전도하는 것은 교인들 가운데서 금메달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철야기도 제일 많이 하는 분은 담임목사다’ 그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얼마나 희망이 없는 교회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만의 은사가 있고 그것을 살리고 그 방면에서 그 은사대로 발전하고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사대로 살아야

  ‘고린도 교회가 모든 일에 풍족하다’는 말은 모든 방면에, 온 교인들이 다 은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골프장을 운영하는 사장님도 은사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방송국 기자하고 아나운서하고 연예인이 되는 것은 다 은사입니다. 그 자리를 다 지켜야 됩니다. ‘이 자리는 교인이 있어야 될 자리가 아니다, 주일도 못 지키고 안되겠다’가 아닙니다. 주일 못 지켜도 그 자리에 교인이 있어야지 불신자가 있으면 안됩니다. 사장 자리는 교인이 지켜야지 불신자가 지키면 안됩니다. 이 은사가 우리를 당당하게 합니다. 그리고 여유있게 하고 풍족하게 합니다. 우리가 왜 풍족함을 상실하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활용하지 않기 때문에 풍성하지 않은 것입니다.

  본문 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설명을 두 가지로 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가 아니고 ‘채워주시고 싶어하신다’는 의미로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고 싶어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외면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족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것을 채워주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두번째는 모든 필요를 다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필요와 욕심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심을 채워주는 게 아니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약속입니다.

  여러분, 못나서 억울하고 슬플 때 있습니까? 못나서 부르는데도 없고 못나서 갈 때도 없습니까? 그럴 때 그것을 은혜받는 기회로 삼으면 됩니다. 못나서 억울해지거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소연 하십시오. 그러면 기도 안 하고는 못사는 잘난군이 됩니다. 못해서 억울합니까? 춤도 못추고 노래도 못하고 재주도 없어서 억울합니까? 부족해서 억울합니까? 여러분, 못나서, 못해서, 부족해서, 돈이 없어서, 못 배워서… 이것 때문에 궁핍해지고 가난해지고 망가지고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 모든 가운데서도 풍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 보이시는 하나님입니다. 안 보이기 때문에 상상 속에서 그릴 수 있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안 보이는 하나님 때문에 믿음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하나님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보면 됩니다. 풍성하다는 이 의미가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풍성한 어머니

  아마 역사상 가장 훌륭한 어머니를 든다면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라고 많은 분들은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분은 열 아홉 남매를 다 하나님 앞에 훌륭한 자녀로 키웠는데 이 어머니의 아이를 키우는 비법이 소개되었습니다. 이것을 우회적으로 우리가 삼을 수 있습니다.

  첫번째, 수산나의 비법은 1살 때에 잘못하는 것은 매를 들어 고친다, 즉 유아 때 잘못하는 것부터 매를 가지고 고쳐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애를 매를 드는데 아무리 매를 들어도 안 고쳐진답니다. 철들어 버리면 매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무서워하지 않을 때 매를 들면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울면서 떼쓰는 것은 절대로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말을 배울 때는 주기도문을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말을 할 줄 알고 들을 줄 알 그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주기도문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네번째, 형들은 동생을 위해서 성경을 하루 한 장씩 읽어주는 일에 책임제로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 아홉 명이 커 가는 과정을 보면 먼저 난 아이는 유모 반, 교사 반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글을 아는 형은 글을 알아듣는 동생에게 매일 성경을 한 장씩 읽어주게 하는 것입니다.

  수산나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 교육방법은 상당히 지혜로운데 요한 웨슬레나 그 형제들이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역에 보면 어머니의 영향력이 많이 묻어나는 것입니다. 수산나가 아이들 앞에 가르쳐 준 것은 보이는 교육이 아니라 어떤 일에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 당당함을 심어준 것입니다. 이 수산나 가정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입니까? 그러나 이 가정은 한 시대의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정으로서 당당한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백지수표

  우리는 이 땅위에서 오늘 성경이 약속하는 이 백지수표, 하나님이 모든 쓸 것을 채우시는 이 백지수표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주셨는데 이것을 한 평생 동안 책갈피에 꽂아놓고 쓰지 않고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 백지수표는 우리가 필요한 만큼 청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19절의 말씀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봅시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4장2절에 “우리가 받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백지수표를 예비해 놓고 우리 기도를 채워주시기를 원하는데 우리가 구할 때 하나님은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7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며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구하라는 말은 정신차리고 깨어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표를 잡고 구하라는 말입니다. 근신하라는 말은 말씀 안에서 깨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는 베드로처럼 말씀 안에서 자기를 뛰어넘는 이것이 바로 근신입니다. 말씀을 붙잡지 못할 때 못 넘던 담을 말씀에 의지하여 담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렇게 목표를 가지고 말씀으로 담을 뛰어넘는 근신이 있는 간구를 할 때 어찌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필요를 외면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욕심을 채워주시지는 않지만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풍성한 삶이라는 것은 우리의 내면적인 은사요 영적인 것입니다. 이 내면적인 풍성함이 우리에게 갖추어질 때 외적인 풍성함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잣집이라고 다 가보면 훈훈합니까? 친척 중에 좀 가진 친척이 있는데 그런 친척집이라고 친척들이 자주 왕래하고 인심을 얻습니까? 가진 친척집이 더 찬바람납니다. 여유로움이 없습니다. 있다고 하는 사람 옆에 가보면 여유로움이 없습니다. 풍성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부족하다고, 못 배웠다고, 가진 게 적다고 자꾸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내면에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이 풍성함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인 부족함은 채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 삶을 우리가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정서가 풍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서가 너무 빈약합니다. 그 방면엔 아주 메말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형이 갖추어져 있으면서도 찬바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내면이 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정서적 풍성함

  펄벅 여사가 우리나라에 와서 특히 농촌으로 펄벅 여사가 많이 둘러보았습니다. 펄벅 여사가 쓴 ‘대지’가 대륙을 배경으로 한 농촌 이야기라 그런지 몰라도 이 펄벅 여사는 한국농촌을 둘러보고는 이런 이야기를 남겨두고 갔습니다. 자기가 한국에 와서 두 가지 면에 감동을 느꼈는데 하나는 시골에 감나무 끝에 감이 달려있는 것을 왜 안 따먹는지를 물어보았더니 그것은 까치밥이라며 날짐승도 먹어야 된다고 말하는 그 시골 노파의 말속에 자기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인간미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사로 듣지만 이 문학가는 까치밥으로 남겨두는 나무 끝에 있는 감, 그 인심이 너무도 풍요롭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농부가 소달구지를 끌고 가면서 자기도 짐을 지고 가는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를 생각하면 그렇게 짐을 지고 가느냐는 것입니다. 서구식으로 하면 그것도 타고 가야 되는데 농부도 짐을 지고 가는 그 모습에 한국의 훈훈한 농부의 인심을 볼 수 있었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아주 정서가 풍부한 사람입니다. 아마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글이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사로 보고 지나가는 장면을 그렇게 관찰하는 것은 아주 놀라운 관찰입니다. 이 펄벅 여사는 우리에게 많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남기고 갔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묵상해 보면 펄벅 여사가 아니라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깊이와 오묘함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혈혈단신입니다. 그는 사도로서 몇 번이나 로마 감옥에, 빌립보 감옥에 들어가서 고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그 입을 열 때마다 풍성함을 말하고 그 풍성을 사람들 앞에 나누어주고 있는가? 그 비법이 어디서 나오는가? 사도 바울은 다 버려진 자 같고 그야말로 소망이 끊어진 자 같은데 그의 내면에는 정말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과의 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연날리기를 더러 해보셨습니까? 저는 동네에서 연날리는 것은 상당히 잘했습니다. 만들기도 하고 연도 날리곤 했는데 제일 신나는 게 연줄끊기 싸움입니다. 연줄에다가 얼마나 심술을 부리느냐 하면 유리를 빻아서 그 줄에다 풀을 먹입니다. 그러면 줄이 날카롭게 되어 풀을 안 먹인 다른 줄을 몇 번 당겨버리면 다른 줄은 끊어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모두 비슷합니다. 진짜 비참한 것은 줄 끊어진 연입니다. 아무리 아름답게 만들어도 줄 끊어진 만큼 비참한 게 없습니다.

  맺는 말

  여러분, 우리 믿음은 연줄입니다. 우리가 이 땅위의 것 때문에 상심하고 고통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와 통하는 이 연줄은 튼튼하시기 바랍니다. 이 줄이 끊어지면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수많은 환란과 핍박 중에도 이 연줄이 튼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풍성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여유로움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그런 풍성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연보도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복음도 전하며 살아야 할 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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