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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과 패망 (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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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패망(시 1:1-6절), 257장,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시편의 말씀은 인간으로서 진정 가기를 원하는 복 된 길을 묻고 있는 사람에게 그 길로 안내하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이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면 많은 시행착오를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바른 길로 찾아 나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시하는 방향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어리석게 보이기도 하며, 많은 사람들이 멸망으로 걸어가는 넓은 길이 아니라 구원을 얻고, 후회가 없는 영생을 향한 좁은 길이기에 찾는 이가 적습니다.

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제시하는 지혜의 샘의 근원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길을 따르게 되면 그 결과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결과를 얻게 되고, 그렇지 않고 세속적인 길을 따르게 되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결과를 얻게 됩니다.

본문에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의인의 행복과 악인의 패망을 대조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복 받을 일을 해야 복을 받습니다. 본문은 의인의 행복과 악인의 패망에 대하여 증거 합니다. 지혜롭고, 행복한 길을 선택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1. '복'이라는 말의 어원을 생각해 봅시다.

본문 1절 시작의 "복 있는 사람"의 '복'이란 히브리어 원어는 '이슈레'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번영과 행복'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만든 바벨탑과 같은 번영이나 행복은 영원하고 참된 복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보존적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바벨탑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하도록 변함이 없으며, '수 천대에 이르러 은혜를 받게 되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영복'입니다.

지상에서 나타나는 가시적인 '복'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말하는 '복', '마카리우스'의 개념은 영적인 의미로 승화되었습니다.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칭의(justify)', '구원', '기쁨', '평안', '열심' 등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은 말을 낳고 말은 행동을, 행동은 습관을, 습관은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형통하는 생각은 좋은 말을 낳고, 좋은 말은 바른 행동을, 바른 행동은 건강한 습관을, 그리고 건강한 습관은 성공적인 인생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복된 삶을 살기 원한다면 무엇이든 어떻게 습관을 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습관이란 처음에는 약해서 거미줄처럼 끊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몸에 배면 밧줄처럼 될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인생이 결국 그 사람의 앞날의 결과를 만들게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형통하는 사람의 모습을 소개합니다(3절). 형통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형통케 되는 습관이 있습니다. 형통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3가지 공통적인 습관이 있습니다.

① 자기를 반성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나 자신의 영적 주소를 알고, 말씀을 통해 자신을 살펴 때마다 날마다 순간마다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 개혁하고 주님을 목표로 삼아 성숙에 이르는 사람입니다. 어떠한 고난이나 어려운 문제가 닥치더라도 성공하는 사람들은 원망이나 시비하지 않고 자신에게서 먼저 문제를 발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십자가를 통해 회복하기에 형통하게 됩니다.

② 말씀을 통해 점검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바른 상황 판단을 위해서는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지식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식이 아는 것, 곧 정보라면 지혜는 지식을 상황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참된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잠1:7,9:10).

③ 헌신의 습관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비전과 목표를 위해 헌신하는 자기 자신을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 맡은 직업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특별히 주신 은혜인 줄 믿고 거기에 모든 정열과 사랑을 쏟는 것입니다.

「하프 타임」이라는 책의 저자 '밥 버포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삶이 잠깐 타고 마는 촛불이 아니다. 삶은 지금 내가 들고 있는 활활 타는 횃불과 같다. 나는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기 전까지 가능한 밝게 활활 타오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습관을 동시에 가능케 하는 좋은 습관이 있습니다. 바로 본문에 기록된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태도>입니다(시 1:2).

묵상은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나아가 말씀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개인적이고 은밀한 사랑의 순간을 즐기는 것입니다. 묵상하면 자기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또한 말씀에 비추어서 상황을 분석하고 바르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얻어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나의 인생을 헌신하는데 불사르겠습니다,'라는 결단과 함께 온전히 충성해야 하도록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행복의 조건은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있습니다. 내가 행복해 지면 다 행복해 질 것이요, 내가 불행해 지면 모든 것이 다 불행해 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여건에 있어도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에 대해 두 가지 개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하나는 복된 여건을 말하는 복이 있고, 그 하나는 복된 사람이 되는 복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봄이면 봄이 좋아 행복하고 여름이면 여름이 좋아 행복합니다. 가을도 겨울도 늘 행복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봄이면 나른해서 싫고, 여름은 더워서 싫고, 가을이면 쓸쓸해서 싫고, 겨울이면 추워서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는 늘 행복한 사람이요, 후자는 늘 불행한 사람이니 전자는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이나, 후자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총각 때는 결혼하였으면 하드니 결혼한 다음에는 '총각 때가 좋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불행한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행복의 여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한 사람은 여건에 상관이 없이 늘 행복한 것입니다.

일이 생기면 기회가 주어졌다고 좋아하고, 일이 없으면 사색을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합니다. 병들면 조용히 인생을 뒤 돌아 볼 기회를 얻고 겸손하여 기도하게 되였으니 좋아하고, 시업에 실패를 하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어서 좋아 합니다. 역경이 생기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인 줄 알고 감사하여 좋아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면 상황은 변하지 않아도 내 가슴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묵상은 우리를 형통케 하는 최상의 습관입니다. 날마다 묵상을 통해 형통의 복을 누리는 복된 인생, 복된 가정되기를 소원합니다.

2. '복 있는 사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새해가 되여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고 듣는 덕담은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참 좋은 축복의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새해에만 할 것이 아니라 일 년 내내 하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축복하는 그 행복이라는 것이 과연 이 세상에 있는 것일까요? 그 행복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가야 찾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행복은 얼마만한 무게를 가지고 있으며 크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리고 행복한 상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은 어디서 그런 행복을 찾았는지? 행복은 얼마나 사람이 오래 동안 소유할 수 있는 것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니 행복에 대해 이런 질문을 하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 1∼3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여기서는 의인의 길과 의인의 복됨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소극적인 면으로 복 있는 자의 삶이란? '불의한 자들의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불의한 삶의 방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고안해 낸 성공 방법, 행복의 길을 따르지 않으며, 그러한 바탕 위에서 살아가는 생활 방식을 부러워하거나 모방하지 않고, 그들과 삶의 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전체를 나타내는 단어가 "좇다, 서다, 앉다."와 같은 동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의 사고의 출발점이 '하나님이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그들의 길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중요한 경고는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길은 그 길이 아무리 명예롭고 재물이 많이 따른다 해도 헛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그러한 생이 바람에 나는 겨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겨는 알곡이 아니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것의 움직임은 수평적입니다. 그러한 삶은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이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삶의 성취가 수반되지 않는 허무한 삶을 의미합니다.??복 있는 사람의 삶은

① 악인의 꾀를 좇지 않아야 합니다(1).

본문 1절 전반 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라고 한??'악인'이라는 히브리어 '라솨'라는 단어는 '유죄한 자,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뜻합니다(自然人). 여기서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입증된 자를 뜻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 대신에 자신의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꾀'(에차=의도, 도모)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꾀를 가지고 사는 사람을 좇아 가지고는 진정한 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좇지 않는다."는 말은 '따라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을 따라 다니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의 꾀를 좇지 말아야 합니다.

② 죄인의 길에 서지 않아야 합니다.

1절 중반 절에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의 "죄인"의 단어 히브리어 '하타임'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빗나간 자',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게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갑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게 하는 자와의 사귐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죄 짓는 사람들 사이에 서성거리거나 머뭇거리거나 머무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어디에 자리를 잡는가? 어떤 사람과 동행하여 살고 있는가?' 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자리에 서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인은 현행범을 말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케 하는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되었음을 교훈삼아야 합니다.

③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절 후반절의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의 "오만한 자"의 히브리어 '레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롱하고, 멸시하는 자를 말합니다. 오만한 사람이란 죄를 짓고도 회개를 하지 아니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주 경직된 죄인, 혹은 완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은 이 교만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수군대고 있는 자리에 쓸데없이 끼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 사이에 멍청이 앉아 있다가 비슷한 사람 되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못된 사람들 사이에 끼어 그들의 다툼에 공정한 판결을 해 줘야 하겠다.'라는 일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오만하여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 하나님 앞에서 교만의 죄를 저지르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죄는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위에서 '좇다.', '서다.', '앉다.'라는 말들은 죄의 점진적인 과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지 않습니다. 그들의 수군수군하는 소리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를 즐거워합니다.

④??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본문 1절에서 소극적인 면에서의 의인의 특성을 묘사했다면, 2절에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함으로 적극적인 면에서의 의인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복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 즐거운 마음으로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무엇을 즐거워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즐거워하느냐가 운명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진실로진실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 설교 듣는 것, 예배드리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가장 귀한 복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시편 전체에 흐르고 있는)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하게 됩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향해 자라듯이 늘 하나님을 향해서 삽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등지는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즐거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설이나 추석에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기가 찰 노릇입니다. 모처럼 만난 식구들끼리 앉아 술 먹고 담배 피우고 그리고 화투를 합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은 성도들이 예배드리고 찬양할 때는 그러지 않는데 '놀 때가 되면 엉망이 되고 눈이 뻘개져서 화투를 치며 싸우니까 목사님 자신이 화투를 배워 그들 속에 끼어 놀면서 바로 잡아 주었다.'는 사례가 있습니다.

본문 2절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 하는 삶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야 할 진정한 길을 율법에서 찾으며 살아가는 삶의 형식입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율법은 단지 십계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 오경 전체를 의미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망망대해와 같은 세상에서 바른 길을 찾아가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제시하는 길은 죽음의 길이 아닌 영생으로의 길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입니다.

말씀에서 길을 찾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그 사건을 깊이 묵상할 때 영감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오랜 기독교 전통을 갖고 있는 유럽 국가들을 여행할 때 관광 대상들이 대부분 옛 성이나, 성당, 교회입니다. 각 시대별로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지은 웅장한 성당 안에 들어가 보면 음미해 볼만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어느 성당이나 교회 안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스테인 글라스에 그려 있는 성화들입니다. 오랜 건물의 것은 먼지로 많이 더럽혀져 있기 때문에 잘 알아 볼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밖에서 햇살이 창문을 통해서 들어올 때 창문에 그려진 그림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성경을 오래된 성당의 창문으로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 정치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 가운데서 묵상해 가지 않으면 지루하고 복잡한 사건만 접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으로는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깊이 묵상해 가면서 성령의 빛이 비췰 때 그 사건을 통해 말씀해 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듣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들은 말씀에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가야 할 길의 방향을 아는 것으로 끝나면 의미 없습니다. 그리로 발걸음을 내 디뎌야 합니다. 그 길로 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을 해 가며 인생을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해 가는 데서 보여지는 길이 평탄하고 쉬운 길만은 아닙니다. 그 길은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가기가 어렵고 힘이 들고 고독이 수반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 기쁨, 성취의 자족감이 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한 길에서 형성되어 가는 삶의 모습이 본문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에는 계절에 따라 열매가 열리고, 시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의 움직임은 수직적입니다. 그러한 나무는 시냇가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메마름이 없습니다. 햇볕이 내려 쬐이고 바람이 불어도 마르거나 날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견고하고 확실한 삶인가를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마른 잎사귀는 죽음과 심판의 상징입니다. 반면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생명·희망·성취의 상징입니다.

'즐거워하여', 또는 '주야로' 라는 말은 '사랑'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으로 반응하며, 계속적으로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갖습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복(福)은 부· 건강· 성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형성되어 가는 삶과 관련됩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복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의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시하는 길을 따라 형성되어 가는 삶 그 자체를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좀 더 부언해서 말씀드리면 영생으로 지향해 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비록 거기에 고난이 따르고 고독이나 가난이 수반되어도 그러한 삶을 복된 자의 삶이라 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복된 자의 삶이 바로 그러한 생의 길을 걸어가는 자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그 길이 결코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가지 않으려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을 바르게 형성해 갈려는 사람, 생의 허무를 원치 않는 사람은 그 좁은 길을 선택해서 가야 합니다.

이런 복 있는 자의 삶의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① 2절에 열매 맺는 복을 받고,
② 3절에 약속하기를 형통의 복을 받고,
③ 5절을 통해 의인으로 여호와께 인정을 받게 됨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복 있는 자의 삶에 대하여 시편 15:1~4절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 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27:5절에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고 하였으며,

시편 31:20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 84:10절에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시편 118:15절에도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라고 하였고,

계 21:3~4절에는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의인들의 삶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항상 싱싱한 것처럼 늘 감사와 기쁨에 넘치며, 부족함 없이 산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는 내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시절을 따라 좋은 열매를 맺는 충실한 삶을 살게 되어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이 '인정'을 받게 됩니다(6).

3. 악인은 어떻게 됩니까?

본문 4∼5절에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악인의 길과 악인의 패망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 곧, 의인과 악인 두 부류가 있습니다. 이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의로움을 인정받게 되는 것은 십자가의 공로로 인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악인이 누구인가를 보여줍니다. 악인은 결국 나무로 비유하면 열매가 없는 자입니다. 그는 바람에 나는 겨처럼 알맹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악의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열매의 유무(有無)를 통해 성실함을 구별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선함이나 행함으로는 결단코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공로로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당하는 믿음으로 가능해 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악인은 시대의 조류를 좇아 삽니다. 십자가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말씀의 뿌리가 없이 인본주의 합리주의 향락주의 종교다원주의 등과 같은 시대의 조류를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하셨습니다.

①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본문 4절에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고 한 '겨'란 '악인의 사라져 버리고 말 허무성'을 뜻합니다. 악인은 삶의 기초가 의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항상 방황하고, 유리되며, 안정되지 못하고, 황폐하게 됩니다.

②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5절 전반 절에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라고 선언하는데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배가 정박할 수 있을 땐 섬이다. 그러나 배가 섬에 부딪쳐 깨지는 순간 그것은 암초가 되는 것이다.” 혹시 당신은 암초가 아닙니까? 누군가 찾아왔다가 부딪쳐서 깨지는 암초 말입니다. 누구라도 어머니 품처럼 기대어 편안히 쉴 수 있는 항구처럼 살아가십시오. 또 인생에서 지치고 힘들고 외롭고 고통이 찾아올 때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예수님 잃어버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아니 사실은 잃어버린 줄도 모를 때가 더욱 많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실패한 인생을 위해 영원한 항구가 되어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견디지 못한다.'라는 뜻은 '서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심판을 받는 것은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의 몫이다. 악인은 공의 앞에 서지 못하고,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가는 길에는 선이 이루어질 뿐입니다. 롬 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③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5절 후반 절에는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는 하나님 앞에 서거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지 못하게 됩니다.

④ 결국 악인은 망합니다.

6절 후반 절에 "인의 길은 망하리로다."고 선언하고 있는데 "망한다."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의 패망과 내세의 멸망을 함께 두고 하는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으나 영원한 하늘의 기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꼭 지옥에 갈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앞을 막고 묻기를 '너 지옥 가기를 원하느냐? 천국 가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답니다.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 듣고 너무 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자기보고 '천국과 지옥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천국을 선택하면 될 것인데 묘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베드로 사도에게 말하기를 '자비를 베푸실 바에는 좀 더 베풀어주어서 천국과 지옥을 다 한 번씩 구경 좀 하게 해주시면 다 구경하고 선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허락했습니다.

그리하여 천국에 갔더니 천사들이 찬송을 부르고 성도들이 흰옷을 입고 찬송을 부르는데 한참 앉아있었더니 따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 보았더니 '거기에는 카지노도 있고 술집도 있고 아가씨도 많고 '쿵~짝! 쿵~짝! 노래를 부르는데 재미가 있고 참으로 그게 좋게 생각이 되어서 천국보다 여기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베드로에게 가서 '저는 아무래도 지옥체질인 것 같으니 지옥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답니다.

베드로가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지옥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옥에 막상 가서 보니까 아까 본 곳이 아니었습니다. '깊은 굴속 뜨거운 곳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조금 전에 내가 왔던 곳과는 천지차이인데 어찌된 것입니까?'하고 물었더니 천사가 설명하기를 '그때에는 관광비자로 왔지만 이번에는 영주권으로 왔기 때문에 다르다.'고 했답니다.

중국에 재미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라가 좀 잘못될 때 <허유>라는 재상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세상을 귀찮게 여겨 다 접고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왕이 허유를 좋게 여겨 사람을 보내어 다시 돌아와서 벼슬을 하라고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소리를 들어서 귀가 더러워졌다고 냇가에 가서 세수는 안하고 귀만 여러 번 씻었습니다.' 아는 친구가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왜 자꾸 귀를 씻느냐?'고 물었습니다. <허유>는 '듣지 말아야할 말을 들어서 귀를 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왔던 사람이 소에게 물을 안 먹이고 소를 끌고 그냥 갑니다. 그래서 '왜 그냥 가느냐?'고 물었더니 '그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가 없어서 그냥 간다.'고 했답니다. 참으로 멋진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이미 복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복 없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고 천국에 간다고 해도 그곳이 천국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복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악인에게 둘러 싸여 있어도, 죄인 가운데 있어도, 오만자의 멸시를 당해도 복 있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천국은 그리스도인의 최후의 상급이요, 지옥은 악인의 최후의 형벌이다."라고 김경선씨는 말했습니다.

노래가사대로 천국은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체질이 되어야 천국에 갑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부르기가 싫고 듣기도 싫으면 천국 가서 지루해서 앉아있기가 어렵습니다.

술집이 좋고 아가씨들이 부르는 세상 노래만 즐겁다면 천국에 갔다 놔도 재미가 전연 없을 것입니다. 천국분위기에 익숙해야 천국에 가서 즐겁고 행복하고 잘 적응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생활이 천국생활의 예표이고 예배분위기가 천국분위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빠지지 아니하고 많이많이 참석하고 찬송을 부를 때 기쁨으로 목청껏 부르고 설교시간에 속으로 '아멘' 입으로 시인하여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단 마음으로 듣고 또 들어야합니다.

베다니에 살았던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다른 것 다 제쳐놓고 예수님의 말씀 듣는 것 만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공부하는 것이 즐겁고 하나님의 말씀 묵상하는 것이 즐겁고 찬송 부르는 것이 즐겁고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고 예배드리는 것이 즐겁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너무 너무 즐겁고 하나님의 말씀 준행하는 것이 즐거워서 감사 감격하는 것이 바로 천국 체질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요점은 오직 두 갈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사는 동안에도 믿음에 굳게 서서 의인의 반열 가운데서 살아야 할 것이며, 장차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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