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앙생활은 내려놓는 훈련이다 (눅 19:1-10)

  • 잡초 잡초
  • 234
  • 0

첨부 1


신앙생활은 내려놓는 훈련이다.
누가복음 19:1-10

저는 오늘 여기에 우리의 지친 영혼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손길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또 삶의 길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진리와 생명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억눌림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심령에 주의 성령이 임하시면 삶의 존재와 목적이 달라진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질그릇이지만 된장을 담으면 된장 그릇이 되고,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됩니다.  우리는 진리의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수동적으로 남에 의하여 지배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나의 반응은 나에 의해서 나옵니다.  삶이란 행복도 불행도 결국 자기 반응이 만들어 가는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마다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주여!  어떤 일을 당하든지 은혜의 반응이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의 반응만 나오게 하옵소서."

모름지기 사람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하는 것이지 결코 둘러싼 여건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적인 사람이 가지는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습관은 그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주도적인 삶의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본질적이고 주도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은 기분이나 분위기에 따라 행동합니다.  조건이나 주변 여건에 따라 행동합니다.  감정이나 충동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대단히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원칙을 붙들고 주도적인 무리에 들었을 때와 감정에 붙잡혀 충동적이 되었을 때의 지난날의 결과에 대해서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과 성령의 감화 감동에 따라 행동합니다.  물론 주도적인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외부로부터 자극이나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믿음의 반응'일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도 여러분의 동의 없이 여러분의 마음에 고통을 가할 수 있을까?  일어난 사건 자체보다 훨씬 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사건에 우리의 마음의 평화를 잃고 허용했고 방치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선택한 결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어떠한 것도, 그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상처를 주지는 못합니다.  당신의 동의 없이는 그 누구도 고통을 줄 수 없습니다.  고통스러운 삶은 내가 선택한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주는 행동이 아닙니다.  또 우리 자신이 하는 실수도 아닙니다.  그 실수에 대해 우리가 하는 대응입니다.

독사에 물린 사람이 약이 올라 뱀을 잡으려고 쫓아가면 뱀을 잡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결국 몸 전체에 독이 퍼져 자신도 죽고 맙니다.  먼저 내가 살기 위해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주도적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가 넉넉히 이기리라.

유대 회당에 설교를 참으로 잘하는 랍비가 있었습니다.  랍비의 설교를 듣고 어린 신자가 말했습니다.  "랍비님의 설교는 우리만 듣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책으로 출판해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랍비가 대답하기를 "책은 내가 죽은 다음에나 내야지요."  그때 어린 신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랍비님,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좋은 책 한 권을 쓰는 것은 대학 하나를 세운 것만큼 영향력이 있다고 합니다.  요즘 2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이용구 선교사님의 쓴 '내려놓음'이라는 책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 책을 소개하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석학입니다.  이런 그가 세상이 부르는 많은 자리를 내려놓고 몽골에 선교사로 갑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유학생활과 몽골 선교사역을 통해 자신이 배운 내려놓는 삶, 그리고 하나님이 내려놓은 자신을 어떻게 채워 가셨는지를 생생하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은 삶이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움켜쥐고 더 많이 쌓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지요.  어느 날 하나님이 내게 오셔서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내려놓는 것은 곧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내려놓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남의 이야기 일 때, 그리고 이론적으로 토의를 할 때는 내려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사건이 되어야 할 때 내려놓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압니다.  내려놓으면 그것이 진짜 내 것이 된다는 사실을.  내려놓을 때 더 큰 것으로 하나님이 되돌려 주신다는 것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을.

여기서 신앙의 위인과 범인이 갈라집니다.  여기서 이용규 선교사는 "제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합니다.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해 갑니다.  인생의 중심자리를 버리고 가장 변두리로 나아갑니다.

"당신은 무엇을 내려놓았습니까?" 라고 묻는 독자들에게 저자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첫째, 내려놓음이란 자신이 쓸 수 있는 그 힘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가지면,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면 힘이 생깁니다.  그 힘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위해 쓰는 것이 내려놓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그것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지식과 경험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 않으면 고집쟁이가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지식, 새로운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셋째,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오며 내 주변에 쌓인 인간관계를, 즉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산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해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로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오는 행복과 평안과 쉼을 알아 가는 것이 내려놓는 삶입니다.

넷째는, 나 자신을 하나님이 쓰시도록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지 못하도록 빗금쳐 놓은 영역이 있습니까?  이것만은 움켜쥐고 싶은 그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 집에 황금 벽돌을 주시고 싶어하는데 당신은 정작 흔해빠진 시멘트 벽돌을 붙들고 있습니까?  그것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내려놓음이란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을 채우는 것입니다.  내가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신비를 배워 가는 것이 내려놓는 삶입니다.

남태평양의 섬들에서는 이런 재미있는 방법으로 원숭이를 잡는다고 합니다.  나무에 줄로 묶어 놓은 여러 개의 야자열매에 작은 구멍을 내고 땅콩을 잔뜩 넣어 두고 멀리 숨어서 잠시 기다리면 원숭이들이 땅콩 냄새를 맡고 하나 둘 몰려옵니다.  주위를 살피다가 야자열매 구멍에 손을 쑥 집어넣고는 땅콩을 한 줌 콱 쥡니다.

그때 사람이 줄을 들고 나타나서는 원숭이를 잡는 것인데, 원숭이들은 꽥꽥 소리를 지르고 펄쩍 펄쩍 뛰기만 할 뿐 도망을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야자열매에서 손이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땅콩을 놓아 버리면 손을 뺄 수 있는데, 땅콩을 내려놓아야 자기가 산다는 것을 이 원숭이들은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려놓음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원숭이들은 한 줌의 땅콩과 그들의 자유와 생명을 맞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들려주신 '감추인 보화' 비유에 보면 그 보화를 얻기 위해 재산을 다 팔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내려놓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내려놓음을 잘해서 인생을 바꾼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얻을 만큼 얻고, 가질 만큼 가졌던 이 사람.  중년의 한 시점에서 자신이 쫓아 왔던 것들, 오랜 세월 쌓아왔던 것들을 예수 앞에 다 내려놓음으로 마음에는 참 자유를 얻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삭개오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을 움켜쥐기 위해서 달려왔던 사람이었습니다.  보다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달려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양심도 버리고, 인격도 버리고 달려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하나님의 낙원이란 뜻을 지닌 여리고는 당시 상당히 큰 도시였습니다.  땅은 비옥하여 농사는 잘 되었고, 종려나무숲이 울창하고 당시 향유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교통의 요충지로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고 경제적 부를 누리고 있던 도시가 여리고였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단락에서는 예수님께서 여리고 입구에서 한 소경을 고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여리고 도시를 다 지날 때까지는 아무런 일이 없었습니다.  이제 막 여리고를 빠져나가려는 시점에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주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과 함께 여리고를 빠져나가려던 그 순간에 돌연 삭개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본문 2절에 보면, 그저 단순히 "삭개오라는 자가 있는데" 라고 기록하지 않고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삭개오라는 이름 속에는 어떤 의미가 있음을 본문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결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 속에는 이 땅에서 순결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 주기를 바라는 부모의 커다란 기대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것이 본문의 암시입니다

가문이 원래 부자였는데 그가 세리장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면 아마 "부자요 세리장"이라고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그가 처음부터 부자가 아니라 부자가 되기 위해서 세리장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무제도는 오늘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먼저 로마 정부로부터 할당되는 일정한 금액이 있습니다.  그 다음 얼마를 걷느냐 하는 것은 세무 징수원의 자유입니다.  할당된 금액을 로마 정부에 상납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이 백안시했던 부류가 창기와 세리 그리고 이방인이었습니다.  구제불능의 사람 가운데 세리가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더구나 부유한 도시 여리고 성의 세리장, 그는 민족의 반역자요 가난한 동족을 착취하는 흡혈귀로 취급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 그는 돈을 얻기 위해서라면 믿음도 인격도 팔아먹었습니다.  돈이라면 유대공동체와 나라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돈을 모아 자기 콤플렉스를 메꿔 보려했습니다.  그는 오직 돈과 명예만을 쫓아 달려온 인생이었습니다.  그것을 얻고 그것을 쌓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그렇게 돈을 모으고 명예를 얻었습니다.  돈을 얻고 세상적인 직위를 얻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움켜쥐면 행복을 움켜쥘 수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삭개오는 돈과 행복이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삭개오의 영혼의 공백, 심령의 허기, 삶의 공허, 그것은 돈으로 메꿀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인생이 아니구나.  아무리 가져도,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이 공허감.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보고자 하되"
이 말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유명인사를 보고자 하는 군중심리도 아닙니다.  헬라어 문법으로 보면 "보고자 하되"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랜 시간 꾸준히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요?  삭개오는 가난해서 예수님을 만나 부를 구해야 되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워한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 몸에 병이 있어서 예수님을 만나 병 고침을 받아야지,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그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려놓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을 포기하고 싶어 달려왔습니다.  인생의 본질을 찾고 싶어서 달려나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달려나와 보니 주님이 두 팔 벌리고 기다리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커다란 장애물에 부딪히게 됩니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그렇게도 간절히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달려왔건만 두 가지 현실적인 장애물 앞에서 도저히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첫째는 키가 작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신체적인 요인 때문에 열등감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 얼굴이 미남형인 어느 학생이 자기는 키가 작은 것이 엄청 스트레스가 된다고 했습니다.  키가 작은 것 때문에 여학생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의 키가 167㎝이었습니다.  제가 이 학생이 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학생, 나는 키가 꽉 찬 150이야.  키 작은 것이 결코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마음이지"

솔직히 이 고민이 어디 이 학생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우리들 가운데는 신체적인 비교의식 때문에 확대 해석하거나 과장해서 열등감에 빠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키가 작고'  이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키가 작고, 내 믿음의 키가 작고, 내 능력의 키가 모자라서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둘째는 사람이 많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나는 몸부림을 쳐보았으나 주위 환경이 너무 복잡해서 넘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 앞에 때로는 내 속에 있는 요인 때문에,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내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기 때문에 인생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달려나왔지만 언제나 키는 작고 사람은 많습니다.  둘 중에 하나만 제대로 되어 있었다면 예수님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믿음도 모자라고 순종도 모자라고 기도도 모자랍니다.  키가 작아서 예수를 보지 못합니다.  직장이 나를 붙듭니다.  주위 사람들이 내 앞길을 가로막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주위 환경 때문에 소중한 결단의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내려놓음의 신비를 배우기까지 넘어야 할 첫 번째 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적인 야망, 명예, 그리고 나 자신을 내려놓으면 내가 없어지는 줄 알기에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키가 작은 것입니다.  내려놓자니 주위 사람들이 내 앞을 가로 막고 나섭니다.  때로는 가족이 걸립니다.  때로는 내 주변에 형성된 사람 관계가 나를 물고 늘어집니다.  사람이 많아 예수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깨끗이 던질 수 없다면, 내 환경을 하나님의 손에 깨끗이 내려놓을 수 없다면 "내려놓음"의 신비는 결코 맛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는 어떻게 했습니까?
"포기하지 아니했다"는 것이 4절의 기록입니다.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뽕나무에 올라가는 삭개오.  지금도 여리고가 끝나는 남쪽 지점 끝에 오래된 돌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바로 이 나무가 2000년전 삭개오가 올라갔던 그 나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 뽕나무는 한국에서 누에고치를 먹이는 뽕나무가 아닙니다.  중동지방의 돌무화과나무를 말합니다.

하늘 높이 뻗어있는 나무 한 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는 큰 나무입니다.  잎이 무성하여 나뭇가지에 사람이 앉으면 잘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무는 집을 짓는 목재로도 쓰이고 애굽에서는 미라를 보관하는 나무로도 쓰이는데 이 나무로 만든 관은 3000년이 지나도 양호하다고 합니다.

이 커다란 나무 위로 키가 작고, 잘 먹어서 얼굴에는 기름이 끼고, 운동량은 모자라서 배가 나온 키가 작은 삭개오.  이 마을에 한 유명 인사가 버둥대며 기어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일은 자기 체면을 내려놓아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 명성, 이것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창피나 부끄러움을 내려놓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의 비난의 손가락질을 괘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만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수고와 댓가도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지만 진정한 열정과 신앙생활의 감동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뽕나무 위에 올라가는 삭개오의 열정과 적극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못하는 더 큰 이유는 자기 내려놓음의 훈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앙생활의 진정한 감동과 감격은 자기 내려놓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삭개오, 이런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이 만나 주십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래서 내려놓음의 신앙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신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얻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라면 내려놓음은 신앙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삭개오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삭개오가 어떻게 했습니까?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보십시오.  처음에 삭개오가 소망했던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돌무화과나무 잎사귀 사이로라도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이 한 가지 소망을 품고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예수께서 점점 자신에게로 가까이 오고 계십니다.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문득 나무 아래 이르신 예수님께서 위를 쳐다보십니다.  그분의 눈빛 하나에 삭개오는 온 몸이 고압선에 감전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이 음성에 얼마나 놀랐을까요?  예수님께서 내 이름을 아신다.  예수님이 나를 아신다.  예수님이 나를 부르신다.  저 분은 내 고독을 알고 계신다.  나의 외로움을 알고 계신다.  나의 갈등과 문제를 알고 계신다.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후회하고 있는 내 중심을 보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내가 새롭게 살고자하는 내 열망과 기대와 꿈을 알고 계신다.

그뿐이 아닙니다.  내 마을 사람들, 내 고장 사람들은 나를 멸시하고 조롱했는데 예수님은 나를 알아주신다.  내 동족, 유대인 모두 나를 벌레처럼 대했는데 예수님은 직접 내 집에 오신단다.

삭개오는 금방이라도 나무에서 떨어질 것처럼 급히 내려옵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절정을 향해 나아갈 때 사탄은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할 때 사탄은 끊임없이 나를 물고 늘어집니다.  오늘도 사탄의 병정노릇하는 어리석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사탄에 붙들린 하수인들이 나의 가는 길을 가로막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수군거림으로 들려옵니다.  본문 7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보십시오.  삭개오는 주님과 함께 자기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수군거리며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별의별 소리가 다 들려옵니다.  자신을 욕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비난하는 소리까지 쏟아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잃은 영혼을 찾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난도 감수하셨습니다.  틀림없이 두 사람은 길을 가며 아름다운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집으로 가는 도중에 삭개오를 향한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용기와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선포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전해졌을 것입니다.  여기서 삭개오 인생에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 움켜쥐는 인생에서 내려놓는 인생으로 바뀌어 집니다.  내려놓음!  그것은 내 힘과 내 신앙과 내 결단으로 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힘을 주셔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문제를 내려놓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내 인생의 야망을 내려놓는 것도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야 가능합니다.  내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일은 물론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야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얻은 그 큰 기쁨이 없이는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너무 귀해서 감격하며 울어본 사람이 아니면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나눈 그 능력의 대화는 이런 결과를 낳습니다.  본문 8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자기 집에 온 일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으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 앞에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성경에 수많은 위인들이 있었지만 이런 일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 길을 발견하고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았으면 이런 결단을 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 만난 감격이 얼마나 컸으면 이런 내려놓음이 가능했을까요?  삭개오, 그는 예수님을 모신 감격 때문에 재산의 전부를 포기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삭개오를 향해 우리 주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저주와 증오와 멸시의 대상에서 사랑과 존경의 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유대공동체를 해치며 살아온 그가 공동체의 중심 자리로 성큼 들어섰습니다.  착취의 손이 봉사와 섬김의 손으로 바뀌었습니다.  마냥 외롭기만 하던 그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동족,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내려놓음의 복입니다.

내려놓으면 이미 하나님이 해결하셨을 텐데.  진작 내려놓는 훈련을 했더라면 자유하는 신앙의 신비를 배웠을 텐데.  하나님 앞에 나를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계획하신 그 놀라운 땅으로 갈 수 있었을 텐데.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가 감격과 감동 있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진정한 자기 내려놓음의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깊이 꽈리를 틀고 있는 쓴뿌리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추구하고 있는 재물과 명예도 주님 앞에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하는 근심과 염려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가 다 내려놓으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나의 남은 인생을 다 책임져주십니다.(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