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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거기 너 있었는가? (마 27:2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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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도 중요하다

8살 난 어린이를 유괴 살해한 파렴치범을 보며 지금 온 국민이 분노에 떨고 있습니다. 유괴살인 자체도 용서 받을 수 없는 큰 죄지만 아이를 유괴하자마자 산 채로 물에 던져 죽게 하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목소리를 이용해 마치 아이가 살아있는 듯 부모를 계속 협박한 것을 보면 정말 인면수심, 사람의 탈을 쓴 짐승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이 유괴범이 한 살 난 아이까지 가진 가장이며 돈도 잘 벌면서 유흥비로 탕진한 돈을 갚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모두는 도대체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영화제작소라는 단체에서 이런 설문조사를 했답니다. “관객이 선정한 영화사상 최고의 악당은 누구인가?“ 영화에서 악당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B급 영화는 주인공만 잘 생기고 멋지게 활약하면 되지만 완성도 높은 A급 영화를 만들려면 조연배우뿐 아니라 악역을 맡은 사람까지 연기가 빛나야 합니다. 악역이 정말 '저런 나쁜 놈' 소리 나올 정도로 연기를 해야 영화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영화사상 가장 끔찍한 악역으로 인기 아닌 인기를 누린 악당은 누구일까 조사한 것인데 그 결과 쟁쟁한 악역들을 다 물리치고 영화 <양들의 침묵>에 나온 한니발 렉터 박사가 1등의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안소니 홉킨스라는 배우의 악역 연기가 정말 빛났지요. 2위는 영화 <사이코>의 노먼 베이츠, 3위는 영화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악역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혹시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성경에서 최고의 악역은 누구인가?“ 묻는다면 1, 2, 3등은 누가 할 것 같습니까? 저는 1등은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 2등은 히브리인들을 핍박한 애굽의 바로 임금, 3등은 여성 중에는 유일하게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이 차지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순위에 절대 빠질 수 없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도신경이 고백되기 시작한 후 지금까지 1500년 이상 세계 수십억의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이 구절을 외웁니다. 그러니 빌라도가 지옥에 가면 만날 1순위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어디 빌라도뿐이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에 보면 참 여러 사람이 십자가 처형을 주도하거나 돕고 있습니다. 이들은 결코 용서 받지 못할 죄인들이요 기독교 사상 최고의 악역을 감당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준 빌라도 총독과,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병들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고 십자가 주변에 서서 주님을 조롱한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사주하고 사실상 이 일을 주도한 안나스와 가야바를 비롯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입니다. 또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사형을 적극 지원한 헤롯 임금도 빠질 수 없습니다. 여기에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형에 개입한 것은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악역을 담당하게 된 바라바(예수님 대신 풀려난 죄인이지요)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도 있습니다.

설교 첫머리에 악역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악역이 나쁜 역할 제대로 못 해주면 영화도 제대로 완성되지 못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여러 명의 악역을 쓰고 계십니다. 물론 가룟 유다가 악역 중에 주연 역할을 맡았습니다. 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도 조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 세 주에 걸쳐 가룟 유다와 제자들을 제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둘러싼 악역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빌라도, 로마 군병, 유대인,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 헤롯, 바라바, 두 강도들입니다. 사순절 기간인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특별히 이 악역들의 모습을 살펴보려는 하는데 왜 하필 십자가 주변의 악역들이냐? 좋은 사람들도 많은데... 여러분, 이 악역들이 결코 잘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사람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정말 나쁜 인간들'이구나 하고 분노하며 치를 떨라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회개에 대한 시리즈를 계속 설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 선 주역들을 살펴보면서 남 이야기로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죄인 아닌가? 나는 오늘 또 다시 예수님을 못 박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바로 그 십자가 현장에 서서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소리치며 조롱한 죄인 아닌가?“를 돌아보려는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

오늘은 십자가 주변의 악역 중 두 사람만 다루지요. 제일 먼저 살펴볼 악역이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때론 빌라도가 참 억울하겠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십니다. 아니, 아마 제일 억울해 할 사람은 빌라도 자신일 것입니다. 아마 빌라도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준다면 이런 항변을 할 지 모릅니다. “아니, 한 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보라는 말이야. 당신이 그 때 유대 총독이었다면 어떻게 했겠냐고? 물론 예수님이 죄 없는 것은 다 아는 일이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상황인데 어떻게 바라바 대신 예수를 풀어줄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얼마든지 이렇게 억울하다고 말 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빌라도의 이런 항변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는 줄 알면서도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 준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념과 확신을 대중의 요구와 위협 앞에서 얼마든지 꺾을 수 있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손해 볼 것 같으면 언제든지 악이나 죄와도 타협할 사람입니다. 본문 19절에 빌라도의 아내가 자기 꿈에 대해 전하면서 죄 없는 예수님을 그냥 두라고 하는데 이것은 분명 빌라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경고하셨음에도 그는 악과 타협하고 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합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빌라도는 본디 로마의 상류계급출신이 아니라 중류계급 출신 군인인데 부인 잘 만나서(빌라도의 부인은 로마 티베리우스 황제의 세 번째 아내인 클라우디아의 사생아인 '클라우디아 프로큘라'라고 합니다) 귀족이 되고 유대의 총독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극적인 신분상승을 이룬 입지전적 인물이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일수록 성공과 이익에 민감한 법입니다. 늘 성공과 출세를 따라 살았겠지요.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손해 볼 짓을 하지 않았겠지요. 늘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익숙했겠지요. 아마 이런 습성 때문에 오늘도 군중들을 만족시키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도 이 빌라도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가 무슨 똑똑한 사람인 양 생각합니다. 유연성 있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치켜세웁니다. 괜한 고집 부리다가 손해 보지 말고 세상의 흐름을 잘 따라가고 사람들의 요구에 적당하게 자신을 변신시키면서 살라고 말합니다.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들려준 하여가(何如歌)에서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라고 말했듯이 그렇게 얽혀서 한 번 잘 살아보자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안 된다고 경고하셔도 무시하고 그 길로 갑니다. 오직 자기 성공과 이익을 위해 눈치를 보며 시류를 따르다가 그만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 우리가 이 빌라도나 빌라도 같은 현실주의자, 타협주의자들을 보고 손가락질 할 자격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혹시 신앙적인 신념보다 현실의 이익을 더 중요시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손해 안 보려면 얼마든지 불의한 현실과 타협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적인 세계보다 육적인 이익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내 모습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빌라도 비난할 자격 없습니다. 나도 만수산 드렁칡처럼 세상과 벗 삼아 이리저리 얽혀 살면서 어떻게 빌라도를 비판합니까? 나도 대중의 비난과 따돌림이 무섭고, 그들의 요구가 부담스럽고, 그래서 손해 볼까 무서워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간다면 빌라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막 15:15에서는 분명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빌라도의 죄는 무리에게,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아닌, 주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하나님을 희생시킨다면, 또한 나 자신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주님을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는다면 빌라도와 똑같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적어도 정몽주처럼 오늘 선죽교에서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몸이 죽어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고 신앙의 단심가(丹心歌)를 부를 줄 알아야 빌라도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

두 번째 십자가 주변의 악역은 바로 로마 군병들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군병들도 빌라도 이상으로 억울할지 모릅니다. 군병들의 말을 한번 들어볼까요? “나는 정말 억울합니다. 저는 총독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어요?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요. 물론 예수님이 죄 없는 것 다 압니다. 하지만 위에서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제가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저야말로 정말 억울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판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이 군병들 말이 맞습니다. 빌라도 총독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예수님께 잔인하게 굴었는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누가 잔인하게 하라고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몹시 잔인하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못 박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27절부터 보십시오. 이들은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부터 희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후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손에 갈대를 들게 하고 그 앞에서 무릎 꿇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조롱합니다. 그러더니 다시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툭툭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요한복음) 모욕한 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끌고 갑니다. 또 35절에 보면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끝까지 한 줌이라도 자기들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지는 모습입니다. 어떤 영화에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도 망치로 못을 내려치는 이 군병들이 잔인하게 웃으면서 망치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런 장면이 안 나왔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을 조롱하며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 이렇게 로마 군병들은 나쁜 놈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또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 로마 군병보다 나은 사람이냐?“ 오늘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불의를 저지르지는 않습니까? 윗사람 명령이라 어쩔 수 없고, 부모님이 원하시니 어쩔 수 없고,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고, 세상 현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지는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어서 한다고요? 변명이 안 됩니다. 군병들도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면서 한편으로는 시키지도 않은 조롱을 하며 자기를 만족시키고, 어쩔 수 없이 사형시킨다면서 옷 한 벌이라도 얻으려고 제비를 뽑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실은 내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이익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 위해 얼마든지 손해도 감수하겠다고 결심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내 이익 포기하고, 꼭 하고 싶은 일이라도 주님 위해 안 하겠다고만 결심하면 가능합니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또 한 가지만 생각해 봅시다. 오늘 나는 누구의 군병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입니까? 세상 사람들입니까? 빌라도나 로마 같은 세상의 권력입니까? 아니면 마귀사탄의 군병 노릇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딤후 2:3은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게 싫으면, 예수님의 군사 되기 싫고 고난도 받기 싫다면 방법은 하나입니다. 세상의 종노릇 하던지, 세상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던지, 마귀의 군사 노릇을 하는 것뿐입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나는 누구의 군병입니까?

거기 너 있었는가?

제가 좋아하는 렘브란트(Rembrandt)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는데 그는 돈독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어서 성경에 나오는 장면을 많이 그렸고 그 중에도 십자가에 관한 작품을 참 많이 남겼습니다. 이 가운데 <십자가를 세우다>라는 그림에는 투구를 쓰고 십자가를 세우는 로마 병정들 사이에 이상하게도 베레모를 쓴 남자가 함께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를 세우고 있습니다. 참 안 어울리는 복장입니다만 이 사람은 바로 베레모를 쓴 화가, 렘브란트 자신입니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바로 그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 있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니, 그 현장에 서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신이 로마병정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화가 자신의 어떤 설명도 붙어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병정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그림을 보는데 성지순례 갔을 때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본 그림이 생각났습니다. 이즈미르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서머나입니다. 이 서머나에는 순교자인 폴리캅 감독을 기념하여 세운 폴리캅 기념교회가 있고 그 안에 각종 벽화와 장식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유난히 페레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에 제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바로 폴리캅 감독의 화형장면을 그린 그림인데 칼을 들고 폴리캅을 화형 시키는 무리들 뒤에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서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손이 밧줄로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그림을 그린 페레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순간 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페레 역시 순교자 폴리캅을 생각하며 내가 그 화형 장소에 서 있었다고 자기 그림을 통해 고백한 것입니다. 아니, 페레는 한 술 더 떠서 아예 내가 그 순교자 폴리캅과 함께 화형 당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렘브란트는 자신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으로 묘사하고, 페레는 자신을 순교자와 함께 화형 당하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십자가의 현장에 내 자신도 서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군중들 중에 나도 들어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조롱하던 사람이 바로 나며,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병정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설교 후 부를 찬송 136장 가사처럼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하고 물을 때 “네, 제가 거기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병정으로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저도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하고 인정할 때 진정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고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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