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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돔과 의인 열 사람 (창 18: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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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서울 시내를 운전하면서 지나갈 때 꼭 심각하게 바라보면서 지나가는 곳이 두 곳 있습니다. 하나는 가끔 심방을 가다가 강변로를 타고 들어가면 시원하게 잘 만들어진 성수대교를 만나게 됩니다. 지금은 잘 복구되었지만 불과 13여 년 전에 그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32명이나 되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습니다. 다리가 무너지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 다리는 무너졌고 출근하던 많은 직장인과 학생들이 죽지 않았습니까? 또 지나가면서 유심히 보는 고속터미널에서 교대 쪽으로 가는 길 왼쪽에 삼풍백화점 자리가 있습니다. 누가 백화점이 무너질 줄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루 저녁에 백화점이 무너져서 시장 보러 왔던 500여명이 넘는 많은 시민이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쳤습니다. 그 현장은 바로 지옥이었습니다. 우리들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하여 무너진 백화점에서 가까스로 구출되는 몇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팔레스타인 성지에도 바로 이런 곳이 한 군데 있습니다. 그 곳은 요단 강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곳에 있는 커다란 호수입니다. 이 호수는 바로 오늘 본문이 증거하는 엄청난 재앙이 있었던 현장입니다. 누가 하늘이 무너질 줄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하늘이 무너진 것 이상이었습니다. 폭탄의 '폭'자도 모르던 그 옛날에 하늘에서 엄청난 양의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유황과 불이 쏟아져서 바로 이 곳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렸습니다. 이 때 생긴 폭발로 땅이 꺼지면서 거기에 조금씩 물이 고여 커다란 호수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 호수는 지구에서 가장 수면이 낮은 곳입니다. 그리고 물이 흘러 들어가기만 하지 흘러나오지 않는 곳입니다. 물이 모두 증발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곳은 염도가 너무나 높아서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라고 불려지는 사해바다입니다. 이 사해바다가 바로 소돔 성이 있던 곳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이 곳의 멸망을 상세하게 기록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성경의 증언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피해액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왜 이런 엄청난 재앙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소돔성은 인류 역사 상 있었던 하나님의 심판 중 몇째 안에 들어가는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창19:24-2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그곳에 역청층(層)이 있었는데 지진이 나면서 지층이 뒤엉키고 불이 붙고 그랬을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소돔성의 상황을 보시고 행하신 분명한 심판이었습니다.

당시 소돔 고모라의 죄악이 얼마나 심했는지 우리는 성경을 통해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창13:13절에 "소돔 사람은 악하여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말씀하고 또 19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집에서 대접을 받았던 천사들이 이제 소돔에 들어가 롯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롯의 집에 낯선 남자들(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남)이 온 것을 눈치 챈 동네 사람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대거 몰려옵니다. 그리고는 그 남자들을 상관하겠다고(=성적 관계를 맺겠다고) 야단들입니다. 동성애를 말합니다. 여기서 소도미(동성애), 소도마이트(동성애자)라는 단어까지 나왔습니다. 제가 말씀을 미리 다 못 드립니다. 집에 가셔서 영어사전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Sodomite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Sodomite-소돔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설명이 붙습니다. 남색, homo sex, 비정상적인 더러운 행위, 동물만도 못한 그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도성이 바로 소돔 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최근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성 매매를 통해 얻는 수입이 우리나라 농사짓는 사람들이 1년 동안 땀 흘려 번 돈, 그리고 생명을 걸고 고깃배를 타고 나가서 고기 잡아 번 돈을 합한 돈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성 매매를 통해 올리는 전체 수입이 24조원인데, 이것은 현대에서 1년 내내 자동차를 만들어 국내 국외로 판매한 액수보다 많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런 나라가 소망이 있겠습니까? 윤락 행위에 종사하는 여성만도 3만 명으로 이것은 2, 30대 여성 100명 중 4명에 해당하는 꼴입니다. 그리고 20-60대에 해당하는 남자들 가운데에서 10명 중 2명이 평균 한 달에 4-5번 돈을 주고 성을 사서 자기 욕구를 채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부가 발표하는 숫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민 단체가 주장하는 바로는 이것이 실제 수치보다도 훨씬 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뭐 심각하잖습니까?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함께 하는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소돔 땅의 멸망소식을 듣던 아브라함이 어떤 자세를 취합니까? 22절 말씀에 보면은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여기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다" 는 말은 그 가는 길을 막고 애원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 그것이 죄의 댓가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들을 구하려는 아브라함은 천사들의 가는 길목을 막고 그의 표현대로 '감히' 하나님께 생명을 걸고 용서의 길을 구합니다. "하나님, 의인과 악인을 함께 심판하시는 것은 공의로운 하나님답지 않습니다. 만일 그 성에 50명의 의인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의인 50명만 있으면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힘을 얻은 아브라함이 계속 붙들고 하나님 앞에 요청했습니다. 45명, 40명, 30명, 20명, 그리고는 10명까지 내려갔습니다.

적어도 그 성에 의인 10명 정도는 있을 것 같았습니다. 롯과 그 아내, 딸과 애인 한두 명,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 이렇게 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5명 정도까지 낮춰서 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따져 보니까 롯 한명 뿐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딸도, 부인도 다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 10사람이 있으면 소돔, 고모라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신 이면에는 또 한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거룩한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돔, 고모라 성 망하지 않도록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하나님의 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의롭게 살려고 하는 거룩한 백성 10명만 있다면 소돔 성이 안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 10명의 영향으로 그 성은 깨끗해질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확신을 갖고 계셨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소수를 통해서 기적을 일으키시길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소돔 성에서 의인 10명을 찾았으나 없었습니다.

오늘 이 사회에서 하나님이 찾는 의인 10사람이 누구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교회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성령을 모신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빛을 비추고, 썩어 가는 이 세상에 소금이 뿌려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한 교회를 통해서 세상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음란하고 더러운 세상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새로운 세계가 되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의인 10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 10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거룩한 10명을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소돔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까? 기왕에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관영하여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의인을 찾고 계십니다. 단10명, 의인 10명만 있었더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로 인하여 이 성은 사하심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인이 없어서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레미야 5장1절에는 한 사람을 찾는 하나님의 구인 광고가 나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 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성을 사하리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은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학식이 높고 덕망이 있고 부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의 처지와 신분이 어떠하든지 그가 무엇을 주장하고 설교하든지 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가 정직하게 살고 진리대로 사는 사람인가가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두 사람이 있을법한데 예례미야는 그 한 사람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큰 십자로 거리에 나가서 찾아보아도 없었습니다. 지금 예례미아는 시간에 쫓기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이 한사람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예루살렘 도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경제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A Study of History]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관계다. 새로운 도전을 받을 때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서 성패가 좌우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란 '창조적 소수'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정치인 몇 사람 잘못 만나면, 그릇된 정치인 몇몇 때문에 온 민족이 고생하고 온 민족에 망조가 듭니다. 정치인 몇 사람, 참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죄악의 도성인 소돔엔 누가 머물고 있었습니까? 롯과 그의 가족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 7절을 보면, 롯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 소돔, 고모라 성의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롯은 많이 고통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그와 같은 나쁜 문화에 자신을 내어놓지 않고 지켰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롯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한편 너무나 소극적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자기 구원만 아는 사람이요, 자기 경건만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런 태도로 인해 소돔 성에서 수십 년을 살았지만 자기와 같이 의로운 사람 둘도 못 만들었던 것입니다.

보세요. 자기 집에 손님이 온 것을 안 동네 사람들이 손님을 내 달라고 아우성 치니까 롯이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19:8절에 보면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 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말라". 손님을 위하는 것은 좋지만 자기 딸들을 부도덕의 현장에 내놓을 수 있었던 사람 롯은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나 혼자 구원받으면 되고, 나 혼자 기도 많이 하면 되고, 나 혼자 제자훈련 받고, 나 혼자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면 되는 식으로 산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백만 명, 수천만 명이 있어도 오늘날 이 사회를 치유하고 구원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지진이 나고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이 솟구치고 땅을 치고 회개하는 그런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습니까? 찬양을 얼마나 아십니까? 여러분이 찬양할 때 귀신이 떠나가고 사람의 묶인 영이 자유 하는 감동이 있습니까? 노래방에서는 노래하는 사람의 흥분만큼도 여러분의 찬양에 감동이 없습니다. 키엘케콜이 말하기를 "이 시대는 종교가 부족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이 부족해서 망할 것이다. 하나님을 적당히 믿는 사람들, 깊은 묵상이 없는 사람들, 말씀에 깨어지고 녹아지지 않는 사람들, 기도에 감동이 없는 사람들의 가식적인 믿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로부터 돌아서게 할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교회에 대한 굉장히 보링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회자에 대해 장로에 대해 뭐하는 것인지 물어보면 목사님은 설교하는 사람, 심방하는 사람 끝입니다. 장로는 기도하는 사람, 당회하는 사람 그것이 교회 리더쉽에 대한 사람들에 기대치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렇게 지루한 곳입니까? 누가 교회를 그렇게 지루하게 만들었습니까? 이 장막터를 넓히라!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의 사람으로서 더 크고 더 놀라운 사역의 틀을 넓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미니멈 크리스챤이 있고 맥심멈 크리스챤이 있습니다. 미니멈 크리스챤은 누구냐 말 그대로 미니멈만 하는거예요. 교회에 주일날 출석하고 술 담배 안하고 십일조까지 해서 자신이 은혜 받습니다. 내가 십일조를 하다니! 스스로 대단한 크리스챤이라고 그 정도하면 한국에서 정말 탱큐할 크리스챤입니까? 미니멈크리스챤입니다. 정말 유치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맥심멈크리스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용하신 엄청난 꿈을 이루어야 합니다. 교회는 얼마나 크고 다양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선배들을 보십시오. 나라를 잃고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이 날마다 술을 마시면서 가슴속에 울분을 달래고 있던 시절, 기독교가 금주 운동을 벌이면서 이 사회에 깃발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통해서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조상들은 첩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서 과감하게 개혁을 외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첩 제도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절제 운동을 통해 우리가 검소하고 살고 이웃에게 사랑의 봉사를 하면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들이 드러났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아브라함은 마땅히 멸망을 받아야하지만, 그 죄악의 도성을 끌어안고 중보 기도하는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기도의 태도'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7절에서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티끌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말하나이다" 이 역설적인 한 문장 속에 기도의 태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먼저는 티끌같은 나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먼지 같은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질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자만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없이도 의미 있는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의 입술이 막혀지고 마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교만한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하나님 없이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망해 가는 지름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이 고백 없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7절 후반 절에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감히'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나는 연약하기 때문에 강하신 분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티끌처럼 무력한 존재이기 때문에 강철같은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 기도의 자리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은 바로 회개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몸에 쓸데없는 배설물은 과감하게 잘 버리는 신장기관이 있습니다. 이 신장이 잘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 몸은 고장납니다. 신장이 갈등하는 거 보셨습니까? 이걸 버려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나님은 신장이 갈등하게 만들어 놓지 않았어요. 매일매일 과감하게 버려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깨끗하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조직들이 신장이 고장나 있으면 버릴 걸 버리지 못하면. 회개가 무엇입니까? 내가 버려야 할 배설물 같은 나쁜 죄와 습관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입니다. 자존심 확 버리고 그걸 버리는 거예요. 아무리 내가 잘했던 것이라 해도 과거에 잘했던 것이라 해도 아무리 나의 명예와 고집이 달린 것이라 해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해요. 여기 22-33절까지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기 위해 무려 아브라함이 6번이나 하나님과 담판을 벌리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가 숫자를 낮출 때마다 얼마나 부끄러웠을 것입니까? 그러나 그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위하여 부끄러움과 수치를 무릅쓰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무감각의 질병입니다. 죄로 인해 쓰러지고 넘어지는 세상을 보고 있으면서도 안타까와 함이 없습니다. 무너져 가는 이 현실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영적인 감각이 없습니다. 영적인 위기의식이 없습니다. 사단의 불화살에 맞아 신음하는 내 이웃들을 보면서도 아파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이 무거워 쓰러져 허우적거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영적인 감각이 없는 것, 영적인 무감각의 질병, 이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질병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 강남에 있는 '안마 시술소'와 소위 '테마방'이라고 불리는 퇴폐업소 3곳을 적발하여 조사를 벌렸는데 참 충격적이지 아니 할 수가 없었습니다. 2년 여 동안 이곳에 출입한자가 자그마치 20여 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특히 이들은 전직 국회의원을 비롯해 교수, 법조인, 의사, 언론인, 변호사, 공무원, 군인등 성직자를 빼고는 모든 직업이 다 포함되어있다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이 유흥업소에 다 쓴 돈도 400억 원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왠만한 중소기업의 영업실적에 맞먹는 엄청난 액수가 성매매 값으로 쓰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소돔에 의인 10사람이 없어 멸망당한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제는 우리가 기도할 때가 아닙니까? 이제 고난 주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우리 주변에 이 주님을 알아야 할, 십자가 보혈의 권세와 이 구원의 놀라운 능력을 알아야할 이웃들을 위하여 엎드리어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만 있다면, 여러분의 무릎을 통해 하나님이 새로운 부흥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주님이 걸어가신 길 가운데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십자가보다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그 사건도 커다란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고통 직전에 더 긴장하게 됩니다. 그분은 아십니다. 날이 밝으면 그분이 지셔야 하는 십자가의 고통의 깊이를, 그 처절함을 아십니다. 그 모든 것을 바라보시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리어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던 이 주님의 모습을 성경에서 보십니까? 그분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물론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할만하시어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만약 주님이 이 고난의 잔을 거절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은 당신의 희생이 없는 그리고 이 십자가를 외면할 때 여전히 저주 아래 매여있는 수많은 불쌍한 영혼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26:39) 우리는 바로 그 주님의 기도 때문에 우리가 살았습니다. 그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의 놀라운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기도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세상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가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주여, 이 땅에 부흥을 주옵소서. 우리교회를 통해서 이 부흥의 불꽃을 일으키시든지, 개인을 통해서 일으키시던지, 한국 교회를 이용해서 일으키시던지 이 땅에 부흥을 주옵소서. 부흥을 주셔서 이 땅을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우리가 기도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소돔, 고모라와 같은 도성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의인 열 사람으로 부르셔서 이 성을 구원하고 치유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머리 숙인 주의 귀한 아들 딸들을 높이 들어 세우셔서 이 땅에 새로운 부흥이 오는 일에 주역이 될 수 있도록 주께서 사용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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