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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요 8: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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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죄를 지고 오시는 어린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우리가 기도하고 이분의 말씀을 듣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데 우리가 한번쯤 물어봐야 될 것 아닙니까? 당신 누구십니까? 자주 만나는 사람도 신분에 의심이 가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오늘 예수께서 수난을 받으시러 이 세상에 오셔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신 중에 유대사람이 예수를 보고 묻습니다.

기적도 행하시고 좋은 말씀도 전해주시고 하늘의 권능으로 하늘나라 복음도 선포하셨는데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선포 하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요한복음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릴 때에야 비로소 내가 곧 나라는 것과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한다. 예수님에게 당신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나는 나다. 이 말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이 원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다. 이렇게 말하신 분이 오늘 저를 보내시고 그분이 나한테 부탁한 말을 제가 전하고 그분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해서 승천할 때까지 나와 함께하시고 나는 그분의 명령에만 따라서 말을 전할뿐입니다. 말을 반복하면 나보고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나다’ 하신 분한테 물어보십시오. 예수님은 직답을 피하시구 하나님한테 답을 미루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실 때 모세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홍해를 건너는 일까지 다 마치고 십계명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했고 가나안까지는 못 들어갔지만 자기 후예인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 입성까지 시킨 출애굽사건의 주인공이 모세입니다. 이쯤 되면 모세는 위대한 선지자 하나님의 사자인 것이 분명한데 모세한테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출애굽을 시키고 홍해도 건너라 하는데 하나님이 기적은 보여주셨는데 저는 당신 얼굴도 본적이 없고 당신의 말씀만 들었고 당신의 이름도 모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당신 누구십니까? 이렇게 질문하기 미안해서, 내가 백성들보고 당신은 누구라고 전할까요? 이렇게 질문을 모세가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서 이렇게 전해라. 내가 누구냐 하면 ‘나는 나다’ 이 말만 전해라. 무슨 말입니까? 나는 나다. 모세가 질문을 던졌을 당시에 이집트의 사회나 종교계, 사상계, 신앙계 다 합쳐서 이집트에는 신들의 수가 참 많았습니다. 신마다 다 이름이 있었습니다. 태양 신, 달 신, 무슨 신 해가지고 신의 이름이 참 많았습니다.

이름이 없는 신은 일단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일단 이름이 부여되면 그 이름에 대한 설명이 있고 이름 값 만큼이나 기적을 행해야 됐고 그래서 어떤 신이 제일 좋으냐? 기적을 많이 행하는 신이 믿을 만한 신이었습니다. 모세가 보기에 하나님은 이집트에 있던 모든 신들보다 훨씬 위대하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수많은 백성을 홍해를 건너서 광야까지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다시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는 편하게 하나님 믿고 예수 믿습니다. 성경 말씀도 있지요 과거 역사도 있지요 모든 기록도 있지요 모세 당시는 기록도 없지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사건은 벌어졌는데 도대체 그분을 뭐라고 기록 할 수도 없고 설명 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마 모세 심정은 답답했을 겁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이 누구시라고 제가 백성들한테 말할까요? 하나님의 대답은 똑같습니다. 나는 나다. 이 말의 뜻은 모든 신들의 이름이 있지만 그 이름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사람들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건물을 세우면 이름을 붙입니다. 사람마다 이름이 있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이름은 우리 인간들이 편리하다고 생각을 했든 존경하기 때문이든 우리가 붙이는 이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은 우리가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모든 신들은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신들에 관한 개념이나 신들의 이야기, 신들이 갖고 있는 사상의 폭과 깊이와 넓이 모든 게 사실은 다 우리 인간이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사고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오늘 여호와 하나님은 나는 나다. 나를 인간의 언어로 규정하지 마라. 인간의 필요에 따라서 창조하기도하고 부수기도 하고 그런 신을 만들지 말라. 그래서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는 나다. 나는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나는 나다. 신은 신이다. 규정하지 말라. 믿기만 해라. 나하고 인간 사이는 엄청난 간격이 있다. 나를 규정하지 마라. 아마 모세가 이 답변을 듣고 굉장히 당황했을 겁니다. 그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나는 나라는 말이. 그러면 당신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냥 개명 천지에  당신은 갑자기 우뢰를 내려서 기적이나 행하고 날보고 기적을 전하는 사신이나 되라는 말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중요한 선언을 하나 하십니다. 나는 나이므로 규정하지 말라. 그 말은 인간이 인간이면 됐지 왜 자꾸 신의 이름을 그대들의 필요에 따라서 규정하느냐. 진실로 그대들은 인간이기를 원한다. 나는 신으로 남기를 원한다. 그 대신에 신과 인간과 신과 세계의 관련을 내가 선포하마. 이름은 얘기하지 않은 채 백성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그대들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그대들의 첫 조상이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의 조상. 그 다음에 조상 이름이 이삭입니다. 마지막 조상 이름이 야곱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 셋을 대면 이스라엘의 백성 이스라엘의 사고방식, 이스라엘의 이념, 이스라엘의 모든 체제를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세 조상의 이름 속에 응축하여 표현을 합니다. 가서 이렇게 말해라. 나는 나다. 단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일러라.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쳐 주어라.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선포하여라. 하나님은 규정 할 수 없지만 인간이 맘대로 조정 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그대들이 만든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알려주어라. 이름을 묻지 말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뭔가 하고 깨닫게 하여라. 이것이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 들으면서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구약성경에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신격화된 조상들의 하나님이신 분의 이름을 차마 부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호와 하나님 이렇게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보기엔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느냐. 나는 나다. 한 말이 여호수와. 여호와 나는 나다. 이 뜻입니다. 여호와라는 말이 아무 뜻이 없는 게 아니고 나는 나다. 그 뜻입니다. 이름을 부를 수가 없어서 히브리말로 그냥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다 이끄시고 섭리를 만드시는 주인이라는 뜻으로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이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주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 주님이라는 말이 아도나이 그렇습니다. 주님이란 말은 아도나이고 우리 조상들의 하늘이십니다. 이게 신약시대에 오면 아도나이 라는 주님이란 말을 뭐로 번역할까 하다가 희랍 말 중에 아도나이와 똑같은 말 중에 절대자이신 주님 우리 조상의 신이신 주님이 말을 키리어스란 말로 번역을 했습니다. 희랍 말에 키리어스란 말이 주님 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키리에엘송 하고 자꾸 노래를 하는데요. 키리에라는 말은 주님이시여 하는 호격입니다. 키리어스란 말로 번역이 됐는데.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름을 물었지만 이름을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실존과 역사적 개입과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믿고 의지하고 우리는 그분을 그냥 주님 그러십시오.

우리 주가 되신 분. 그래서 우리가 지금 주님 하는 말과 하나님이라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럴 때는 우리의 주님. 이렇게 여러분 고백하시면 됩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조상이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아니 저 자신의 하나님 우리 가정의 하나님. 우리 모두의 하나님. 우리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부르시기 바랍니다. 이 주님이 오늘 우리한테 오셔서 하나님 복음을 전했더니 유대사람이 또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모세 때 한 얘기 못 들었느냐? 나는 나다. 그러나 그대들의 역사와 세상과 삶과 함께 한 그분이 나를 보내서 오늘 왔노라.

오늘 저희는 수난주일 중간에 서있습니다. 누가 수난을 받았냐하면 우리가 끌어내서 우리와 같이 수난 받기를 원하는 그분이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해도 관여 할 수 없는 그분. 나는 나라고 자기 존재를 과시하신 그분이 오늘 직접 아들을 통해서 수난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원해서 하나님이 수난을 받으신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해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나는 나다. 너희는 너희고 나는 나다. 하나님이 주체적으로 결정해서 십자가를 지시기로 했으니 그대들의 죄 때문에 대신 지시기로 했으니 이 수난은 저의 수난이 아니라 십자가의 수난은 하나님 자신의 수난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나는 상관이 없다면 그분은 나에게 주님이 아닙니다. 그냥 여호와라고 부르시던지 하나님이라고 부르시던지 신이라고 부르시던지 객관화해서 마음대로 부르십시오. 오늘부터 수난절에 동참하는 우리 심정 속에 당신이 제 인생의 목표요 당신이 제 인생의 처음이요 제 인생의 완전한 완성입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살겠습니다. 결단하면 그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외 기도는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십시오. 그냥 그대라고 하십시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오늘 예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우시지요. 환란을 맛보시지요.

하나님이 우리 대신 당한 환란 속에 동참하면 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를 주십니다. 인내를 하나님과 함께 이겨내면 우리는 단련이 됩니다. 왜 그렇게 주시냐하면 그 분은 희망이라 이른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저희에게 환란도 인내력도 단련된 인격도 주십니다. 수난의 목적은 고난이 아닙니다. 수난은 부활의 열매를 잉태하기 위한 삶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우리에게 떠맡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감당하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뭐해야 됩니까? 제가 책을 읽다가 고백록 같은 이야기 하나 전해드립니다. 소경이 돼서 고생하는 어린 소녀가 있었는데 누구도 눈먼 것 때문에 옆에 있어주지 못합니다. 자기 옆에 항상 있어주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이 여자가 사람들 앞에 고백을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저한테 눈을 주신다고 하면 눈뜨자마자 나와 항상 함께 있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겠습니다. 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세상이 좋아가지고 각막 기증을 받아서 눈을 뜨고 결혼할 남성을 봤습니다. 남성이 하는 얘기입니다. 네 약속대로 나와 함께 있어 주겠냐? 여성이 눈떠서 봤더니 자기와 항상 함께 있던 남자 친구가 역시 소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맘이 바뀌어서 결혼을 못해주겠다 그랬더니 소경된 남자가 울며 떠납니다. 내가 눈멀 때 그대를 돌봐 주었듯이 눈뜬 그대가 내 눈을 좀 돌봐 줄 수 있습니까? 하고 눈물 흘리며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우화 같기도 하고 있을 수 있는 얘기 같습니다.

우리가 눈멀 때 눈뜬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게 아니라 눈먼 우리를 눈먼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래야 동료가 되니까요. 그래서 우리 눈을 뜨게 했더니 우리가 눈을 본래 떴으나 우리 때문에 눈멀고 같이 동행해 준 하나님을 보고 당신은 싫다. 그런 배신의 역사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롯 유다 역사는 이런 역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눈이 먼 게 아니라 눈먼 우리와 동행하기 위해서 스스로 눈도 멀고 죄가 없으시지만 죄 된 우리와 동행하기 위해서 스스로 죄를 뒤집어쓰시고 우리가 아플 때는 함께 아프시고 항상 동행하시는 하나님인데 우리가 먼저 낫고 보니 우리와 동행하는 하나님이 싫었습니다. 그런 역사 많이 있지 않습니까? 아주 작은 일상생활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맛있게 음식 드시지요. 음식점에 갔는데 음식이 맛없다고 불평할 때가 저도 있습니다. 불평하십니까? 그럴 때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입에 풀칠할 것도 없어서 매일 같이 굶어 죽는 사람이 이 땅에 수십억 인구가 됩니다. 맘대로 불평해보시지요. 아내와 남편이 사시면서 불평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부부싸움도 많이 하시지요.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배필이 없어서 누구라도 좋으니 배필 달라고 밤새도록 기도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지요. 살기 지쳐서 자살도 합니다만 이렇게 살아도 힘들고 저렇게 살아도 힘들고 살기가 너무 지치다고 불평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너무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를 기르시면서 혹시 분노하십니까?

저도 많이 분노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임 때문에 자녀 하나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노력하는 그분들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집안에 들어가서 더럽다고 청소가 잘 안됐다고 신경질 부리시는 분계십니까? 그런 분계시면 길거리에서 집은 고사하고 집이 없어서 초막집에서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homeless 분들이 수없이 많음을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자동차를 몰고 예배도 오시고 회의도 가십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막히면 얼마나 불평이 많고 가슴이 뛰는지 불평을 많이 합니다. 제가 지금 마사이 신발을 신고 있는데요. 그럴 때 생각을 해보시지요. 차는 고사하고 수십 리, 수백 리 길을 걸어서만 가야하는 사람이 이 땅에 수십억이 됩니다. 직장 일 때문에 불편하십니까?

임금 때문에 불편하십니까? 이 땅에 실직자가, 장애 때문에 일자리를 못 얻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요. 오늘 우리한테 있는 모든 상황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파서 고생하는 수난에도 내가 동참할거고 그러나 동시에 아파서 약도 못 먹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고난에도 난 동참을 해야 되고 하나님의 고난의 동참은 좋은 대로 나쁜 대로 쉬운 대로 힘든 대로 하나님은 우주적 역사로 함께 동참을 하십니다. 우리의 질문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주지 못합니까? 하는 질문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저한테 먹을 거 하나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 그림 그리시는 분이 많이 있으실 텐데요 제가 어느 책을 읽어봤더니 그림 그리시는 분은 날씨가 좀 궂으면 그림 그리기 좋다고 합니다. 맞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밝으면 대상물들이 너무 많아서 중점적으로 들어오지 않으니 날씨가 궂으면 그림 그리고 싶은 것들만 딱 보고 군더더기가 없어서 좋다. 사진 찍으시는 분들은 날씨가 밝아야 됩니다. 어느 날이 좋은날입니까? 혹시 사진 찍으시는 분은 궂은날이 되면 그날은 안식하고 생각해보라고 그림을 그리시는 분은 맑은 날이 되거든 그림그리지 말고 안식하며 구상하며 명상하시라고. 우리에게 준 모든 아픔의 운명, 불편의 운명을 운명으로만 보지 마시고 그때는 우리가 연단하고 인내하며 새로운 희망을 창출하기 위해서 한번 마음과 뜻을 모아보는 날이다.

그렇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께서 ‘나는 나다’라는 말을 통해서 주시는 것은 이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난당할 때 성경말씀은 이렇게 써있습니다. 천군만마를 동원하여, 번개화살을 동원하여 이집트를 다 물리치고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적적인 과정을 생각하시고 모세라는 사람을 내세워서 광야에 어두운 생활도 지내게 하시고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으로 이끄셨지만 모든 고난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셨다. 하나님은 우리 못된 인간의 죄를 깔끔히 기적적으로 없앨 수 있지만 예수님을 보내셔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수난 당하시면서 용서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희망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저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하늘에서 기적같이 떨어졌으면 저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그때 그 하나님은 나는 나다 할 수는 있지만 나는 야곱의 하나님은 아니다. 저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저의 역사 속에 아름다움 속에 희망과 좌절 속에 오셔서 나와 함께 고통당하시는 하나님 저는 그 하나님이 참 좋습니다. 같이 울어주시는 하나님이 참 좋습니다. 저 불평도 함께 들어주시는 분이 참 좋습니다. 이 땅의 역사 속에 오셔서 함께 고난 받는 하나님도 참 좋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마지막에 포도밭 얘기처럼 결국에는 알알이 맺는 포도송이를 맺게 하려고 부활의 영광을 주시려고 나는 오늘 그대들의 서글픈 역사와 힘든 역사 속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 주님이 오늘 우리의 수난을 함께하시고 동시에 자기 수난에 우리의 동참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높은데 계시는 하나님 그러나 저 안에 계시는 하나님. 고마우신 하나님. 이분의 수난이 우리의 수난이 되고 우리의 수난은 이 분이 짊어지시고 그래서 하늘과 땅은 하나가 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다. 내 속에 그대들의 수난과 구원을 함께 이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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