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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요 5: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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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

  이따금 기도할 때, 원인을 알 수 없는 애통함으로 기도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 24시간 연속 기도회 처음 기도하던 날도 그렇게 울었습니다. ‘나의 마음에 무슨 애통함이 있는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 때 마음에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여전히 율법적인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는 답답함이었습니다. 감격도 갈망도 변화도 없이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합니다. 보는 저도 답답하지만 본인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교인들에게 진정한 은혜의 기쁨을 경험하게 해 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교인들을 향하여 애통해 했지만 사실 제가 그러했습니다. 한동안 종교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생활이 얼마나 답답한지 압니다. 인천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저는 목사 안수받기 전날 밤 거리를 한없이 걸었습니다. “목사가 된다! 내일이면 목사가 된다!” 그것은 제게 전혀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감격스런 날이지만 저에게는 숨이 막히는 답답함이었습니다. 목사가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할 것 같았지만, 도망갈 용기가 없었습니다. 아버님이 목사님이요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데, 제가 도망가면 어디로 가며 무엇하겠습니까? 겉으로는 열심이고 성실하고 누구나 칭찬해 주는 목사였지만 삶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저도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제 안에는 영적인 공허감이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아무리 겉으로 열심히 신앙 생활해 본들 그것은 중압감이고 의무감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결코 그런 신앙 생활에 머무르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은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받는 가장 큰 복이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삶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그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오히려 큰 어려움을 당하셨습니다. 이유는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논쟁에 휘말려 들어가서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왜 안식일에 병자를 고셨느냐? 왜 짐을 들고 가라고 하였느냐?” 시비를 걸어왔을 때,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17절)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자신도 일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의 뜻을 19절-20절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보시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님께 당신이 행하시는 일을 다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든지 항상 하나님을 주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는지 보시면 그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도 그렇게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 곧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중요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유심히 살펴보다가 그 일에 참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야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실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있겠느냐?’ 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셨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영적인 큰 복입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임마누엘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하늘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지금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18-20절에서 매우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시고 그 일에 참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 하나님께서 오시는데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압니다. 성령님으로 지금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정말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여러분보다 먼저 일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믿고 조급하지 않고, 속단하지 않고, 정말 겸손한 눈으로 본다면 우리 주위에서 먼저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부산에서 목회할 때, 교회가 역 근처에 있어서 많은 행려자들이 교회에 찾아 왔습니다. 사실 교회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도 할 일도 많은데, 행려자들을 돌보는 것은 너무나 귀찮고 싫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마태복음 25장 45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제서야 하나님이 그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아침 밥을 대접하고, 옷을 모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더 많은 행려자들이 왔습니다. 아침에 200명씩 왔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깨달은 것은 그로 인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재정적으로도 크게 복을 받았습니다.

  한 번은 예수전도단이라는 선교 단체에서 찾아와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교회를 정기 집회 시설로 사용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기획위원회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습니다. 교회가 신축 건물인데 더러워질 것을 걱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신축한 예배당에 청년들이 모여들어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깨닫게 하셨습니다. 1년이 넘는 기간을 지나서야 만장일치가 되어 예배당을 내어 드렸습니다. 그 후 매주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많은 청년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회 청년부가 부흥되어 가고, 교회가 영적인 교회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주위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생각하기에 좋다고 생각하는 일을 성급하게 시작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지 하나님과 상관없는 우리 일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우리들이 어떻게 사는지 내려다 보시다가 우리가 도와달라고 하면 조금 도와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기를 원하시는 일을 계속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보게 하시고 그 일에 참여하게 하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아무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집니다. 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납니다. “거기 서 있지만 말고 뭐라도 좀 하세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덮어놓고 아무 일이나 하지 말고 거기 좀 서 있어! ”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먼저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가르쳐주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자기 중심으로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나를 이곳에 보내신 뜻이 무엇입니까?” “내게 이 직장을 주신 뜻이 무엇입니까?” “나를 왜 이 교회에 나오게 하셨습니까?” 전부 “나” “나” “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바른 질문을 해야 바른 답이 옵니다.
바른 질문은 어떤 전제없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그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동참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군목 시절, 제일 힘든 것이 인격 지도 시간이었습니다. 예배 설교와는 달리 종교와 상관없이 강제로 모아놓은 병사들에게 한 시간 무엇인가 그들에게 유익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군종병들에게 물었더니 야한 농담이나 해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어지간해서는 도무지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인격 지도가 저를 힘들게 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사회라면 저들이 다 어디 갈 것인가? 군대니까, 목사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도했습니다. “저는 농담도 못합니다. 웃기는 재주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강의를 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진지하게 삶에서부터 복음으로 말씀을 준비하여 전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조는 사람,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훈련은 나중에 제게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정리해서 성도가 아닌 일반인에게 말하는 훈련이 되었던 것입니다. 제대하면서 가장 아쉬운 것이 불신자를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김태한목사님, 중국을 방문하여 조선족 교인들 수련회를 하면서 마지막 순서로 성찬 예식을 하려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참석자 중에 약 절반 가량이 세례를 안 받은 것입니다. 모두 성만찬에 참가했으면 좋겠지만, 전도사님이 "목사님, 세례를 안 받은 사람은 성찬에 참여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였답니다. 그의 믿음에 상처를 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몇몇 조선족 사람들이 전도사에게 묻는 말이 들렸습니다. "저는 세례를 안 받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응, 성찬을 받지 말고 따로 한쪽에 서 있어라." 마음이 너무 아프더랍니다. 목사가 없으니까 이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기회가 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는데 ‘먼저 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면 되지 않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구나! 하고 "누구든지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앞에 나와서 자기 믿음을 간증하십시오." 했더니 모두 나와서 자기 믿음을 사람들 앞에서 간증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참석자 모두가 성찬을 받았답니다. 여기 저기서 훌쩍 훌쩍 울더랍니다. 성찬식 후 "미처 준비가 안되었는데, 미국에 가서 세례 증서를 보내겠습니다." 그랬더니 전도사님이 정색을 하면서 "목사님, 우리는 세례 증서 없어야 합니다. 큰 일 납니다. 그저 김태한목사님이 내게 세례를 줬다고 마음에 세례 증서를 간직하겠습니다." 하더랍니다. 정말 마음이 찡하였답니다.

하나님을 삶으로 경험하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분주히 일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비스듬히 누워서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밤에는 불 기둥,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야로 앞장서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훈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의 일들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가를 알고 싶어하고, 묻고 바라보기만 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보다 먼저 일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반드시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습니까? 그러면 먼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아 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가 하고 살펴 본 다음, 그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생생히 경험하게 됩니다. 

  인도의 캘커타시를 방문한 사람들이면 꼭 찾아가 보고 싶은 곳이 마더 테레사 수녀가 세운ꡒ죽어가는 사람들의 집ꡓ(Home for Dying)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인도에 처음으로 왔을 때 테레사는 이곳에서 무엇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까 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충분한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와줄 사람도 별로 없으며, 특별하게 내세울 재능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가진 것은 오직 인도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은 간절한 열망 뿐이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 시내를 걷는 중에 길가에서 아무도 돌보아 주는 이 없이 홀로 죽어가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돌보아 주지 않는 그 사람을 보면서 테레사 수녀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그가 어떻게 살았든지 적어도 죽어가는 순간만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테레사 수녀는 즉시 하나님이 하시기를 원하는 그 일에 참여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그리고는 폐허가 된 사원을 청소하여 길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옮겨 놓았습니다. 죽어가는 순간만이라도 청결한 분위기 속에서 죽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것이 그 분이 하신 사역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노벨 평화상을 받고 인도의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헨리나우웬의 책을 보니 디라는 목사님이 장애우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에 와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기 몸 하나 지탱하기 어려운 중증 장애자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침을 흘리고, 어떤 사람은 괴성을 지르며 온 몸을 쥐어짜는 듯한 모습들이었습니다. 디 목사는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무슨 말을 전할 수 있을까? 알아듣기는 할까?’ 그 날 밤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장애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기가 막히더랍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멍청히 서 있는데, 장애인 한 남자가 오더니 디 목사의 손을 꼭 잡아 주더랍니다. 이것에 용기를 얻은 디는 비로소 마음 문이 열려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친 다음 디는 자기 손을 잡아 준 장애인 남자에게 고맙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장애인 남자가 온 몸을 쥐어짜면서 겨우겨우 말하기를 "손은.....잡으라고....있는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디 목사는 이 말이 마치 살아계신 예수께서 자기에게 들려준 말씀으로 마치 천둥 소리 처럼 뚜렷하게 들렸습니다. 손은 잡으라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부담스럽게 생각이 되시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그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은 가장 편안하고 놀라운 삶입니다. 그 전에는 내가 다 결정하고 내가 다 고민하고 내가 결과를 책임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참여하는 삶의 방식은 처음에는 힘들 것 같아도 가장 편한 길입니다. 염려 두려움 다 사라집니다.

  미국 수정궁 교회 로버트슐러 목사님, 한국에 와서 특별 집회를 하고 있는 동안에 그의 13살 난 딸이 오토바이 사고로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급히 돌아가는 동안에 어린 딸의 절망하는 모습을 그리며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안타까왔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병원 문에 들어설 때 아내는 울고 있었습니다. 로버트슐러 박사는 ‘지금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가?’ 생각했습니다. 마음에서는 진정으로 찬미하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할렐루야, 주님 홀로 영광을 받으소서.' 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딸은 기쁨에 넘치는 표정으로ꡒ안녕, 아빠! 안녕, 엄마!ꡓ하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아빠, 엄마, 내가 왜 사고를 당해 다리를 자르게 되었는지 이제 깨달았어요. 하나님께서는 나와 같이 불구가 된 장애자들을 위해 일하게 하시려는 특별한 뜻을 가지고 계셨던 거예요.ꡓ그녀는 장애인들을 위한 귀한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큰 불행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속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부광교회를 김상현목사님은 제 친구인데, 같은 부산에서 목회를 했었습니다. 부산 광안리에서 개척 교회를 섬겼는데 밤마다 교회에서 철야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를 부흥시켜주옵소서!” 소리를 지르며 기도할 때, 조용히 주시는 하나님의 생각이 있었답니다. ‘이 교회 부흥을 네가 원하느냐 내가 원하느냐?’ 당연히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이 깨달아지자 눈물이 쏟아지고 마음의 짐이 다 내려지더랍니다. 염려와 두려움과 조급함이 사라지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데, 된다!’하고 믿어지더랍니다. 그래서 선포하고 확신하니 교회에 교인들이 모이고 큰 교회로 부흥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고 사역하는 것과 막연히 사역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되는 것을 누가 원하십니까? 여러분 자신입니까? 하나님이 더 원하십니다. 정말 그렇다고 확신합니까? 그러면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더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나는 참여하는 것 뿐이지 내가 그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애걸복걸할 문제가 아닙니다. 확신이고 누림입니다. “하나님 하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구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 제 눈을 열어서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주시옵소서. 제 가정에서 제 직장에서 그리고 섬기는 이 교회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제가 보기 원합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겠습니다. 주님 저를 인도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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