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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일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요일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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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평양 대 부흥의 기폭제가 된 것은 회개였습니다. 사람들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은혜를 받았을 때 마음의 찔림을 받았습니다. 지난 날 지었던 모든 죄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회개하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은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찾아가 죄의 용서를 구하고 물질적인 손해를 배상해 주었습니다. 부흥회를 마치고 난 다음 날은 평양 시내가 더욱 분주해졌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서로 죄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찾아 나섰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좇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2,10-11)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고 인정하셨던 믿음의 사람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그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구약의 가장 뛰어난 믿음의 사람 다윗, 그러나 그도 연약한 인간이었으며 죄의 유혹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그가 홀로 궁에서 지내고 있을 때 다윗의 눈에 아리따운 여인의 아름다운 몸이 들어 왔습니다.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바라 본 다윗은 욕정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자신의 침실로 불러드렸습니다. 다윗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 7계명과 제10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늘 죄의 유혹이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도 죄의 유혹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 기도방을 지나가던 사람은 깜짝 놀랐습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계속 똑 같은 기도가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자 어거스틴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아파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행위의 범죄만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의 범죄를 행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돈과 여자라는 말씀을 하신 선배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두 가지를 초월하면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가장 큰 시험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해보니까 그 두 가지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끊임없는 유혹과 시험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훌륭한 신앙의 사람 다윗도 넘어졌습니다. 더군다나 죄가 탄로 나는 것이 두려워 더욱 큰 죄를 범했습니다. 자기의 충복이었던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 몰아 죽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임에 틀림없습니다. 간음하고, 살인하고 모든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였고 살인하며 쾌락의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저는 사울왕의 죄와 다윗왕의 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전히 다윗왕의 죄가 더욱 크다고 여겨집니다. 간음하고 살인하고 행위로서 계명을 명백히 어긴 죄가 다윗의 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사울을 하나님이 버리셨습니다. 오히려 더 명백한 죄를 지은 다윗은 용서하시고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명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느냐 아니면 죄를 부인하고 회개치 아니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죄를 지적하시며 사무엘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죄를 시인하지 않았으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범죄 하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는 분이시므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발에 무릎을 꿇고 죄를 시인하며 용서를 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사랑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분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숨기고 회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회개하는 자를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00)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1서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00)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00)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사람을 위하여 있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를 위하여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에 독생자를 보내서 죄와 사망에서 나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과 피를 흘리심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님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시기에 또한 끝없이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죄를 시인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눅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친히 하신 예화의 말씀입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는 순간부터 아버지는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던 작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먼 길에 오는 남루한 거지가 아들인 것을 아시고 달려가 끌어 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이미 우리가 지은 모든 죄까지도 용서하시기로 결심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죄를 깨닫고 스스로 죄인임을 자백하는 것이 필요하며 죄인임을 시인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죄를 자백하면”
자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백하는 순간 자기의 모든 좋았던 이미지는 땅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심한 책망과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도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너무 커서 자백하지 못하고 감추고 깊은 고뇌와 아픔을 속으로 삭이며 사는지도 모릅니다.

자백하는 것,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시인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성령이 도우시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나를 감동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의 모든 죄를 자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의 역사가 회개였다면 그들의 회개를 가능케 한 힘은 성령이셨습니다. 그들이 은혜 가운데 성령을 받고 감동되었을 때 자기들의 죄가 생각났고 아팠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추었던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내주하시고 감동하시는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어두운 죄의 마음속에 밝은 빛으로 임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죄인임을 깨닫고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함께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죄를 자백하고 난 후에는 엄청난 은혜가 그 사람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은혜는 한 개인에게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임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모두가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은혜는 용서입니다. 무한한 용서를 받습니다.

다윗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다윗이 죄를 시인하고 자백함으로 하나님은 그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사울이 용서받지 못한 이유는 그 죄가 더 큰 것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용서받은 자의 기쁨을 아십니까? 용서받은 자의 기쁨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 여인은 죄 많은 인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과 만나 대화하면서 그분이 선지자요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게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 고백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진실한 말입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네 말이 참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랑이 담긴 용서의 말씀입니다. 진실을 고백하는 여인을 주님은 이미 용서하신 것입니다.
용서받은 여인은 기뻐하며 사마리아 성으로 달려가 “와보라 여기 내가 만난 그분 메시야를 보라”고 외쳤습니다.

용서 받은 자의 기쁨은 부끄러움을 이기게 합니다. 그 어떤 수모와 멸시와 천대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인은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도 어렸을 적에는 일반 소년들처럼 평범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궁리 끝에 집에 돌아와서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몰래 아버지의 침실로 들어가서 장롱을 뒤져 동전 몇 푼을 꺼내들고 상점으로 달려가 고기 몇 점을 사먹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맛이 있어서 단번에 먹어 치우기는 하였지만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그는 잠자리에 누웠으나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이불 속에서 뜬눈으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보다 차라리 벌을 받을지언정 정직하게 고백하는 편이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늦은 밤에 아버지께 찾아가 직접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작은 종이 조각에 몇 줄을 적어서 그 것을 돌돌 말아 가지고 아버지의 침실문 열쇠구멍에 끼워 넣고 돌아오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이 밝았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자 어쩐지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달려오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급히 아버지의 침실 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가서 보니 열쇠구멍에 꽂혔던 종이 조각은 없어지고 그 구멍을 통해 방안을 살피니 아버지께서 그 종이 조각을 읽으시며 눈물을 닦으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때 그는 더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의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하였고 아버지는 그를 꼭 껴안아 뜨거운 사랑을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그는 성인이 되어 이때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아버지의 용서하여 주시는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용서입니다. 무한한 용서는 그를 감동과 기쁨의 삶으로 변화시켜주는 것입니다.

2.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은혜는 치유와 회복입니다.

마가3장에는 손 마른 자를 치유해주시는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자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손 마른 자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부끄러운 마른 손을 회중들 앞에서 높이 들었습니다. 그때에 그의 마른 손이 펴지며 고침을 받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는 물론이고 손 마른 자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어려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손을 든다는 것도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만 더 큰 용기는 안식일에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손 마른 자의 이와 같은 행동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는 용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 자신의 부끄러운 것을 드러내는 그 용기는 치유의 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며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고백합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나이다. 나를 아들이라 생각지 마시고 품꾼의 하나로 써주시옵소서.”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살진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금가락지를 그 손에 끼워주셨습니다. 죽었던 내 아들이 돌아왔으니 함께 즐거워하자고 사람들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귀한 아들의 자리에 앉게 해주었습니다. 아들은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다시 아들의 자리로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죄를 자백하면 주는 미쁘시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3.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세 번째 은혜는 변화와 갱신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성난 사자와 같이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려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난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말씀에 사람들은 찔림을 받고 그 여인을 떠나갔습니다. 간신히 죽음의 고비를 넘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당부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여인에게 회개를 넘어서 변화와 갱신을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회개는 갱신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입술로만 고백하는 정도의 회개라면 진정한 회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회개는 갱신이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회개가 갱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회개는 변화이어야 하고 갱신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새로워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바람, 새 역사를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이 놀라운 부흥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회개운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회개가 갱신의 삶으로 변화되었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부흥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회개의 합당한 갱신의 삶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변화하였습니다. 이타적인 사람으로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만 고집하지 않고 모두를 위한 것으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들의 갱신은 자기를 넘어서서 서로 물건을 통용하며 함께 떡을 떼며 교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한사람도 궁핍한 사람이 없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19장에는 회개를 넘어 갱신을 이룬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죄를 범했습니다. 특히 남의 물건을 토색하며 갈취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데 힘썼습니다. 사람들을 돈으로 보고 형제도 배반하며 민족도 배반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개하였습니다.
눈물로 사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까지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다면 4배나 값겠노라고 결단했습니다. 착취하므로 축적했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회개를 넘어 갱신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던 삭게오입니다.

해비타트운동이라 불리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이 있습니다.
밀러드 풀러는 이 운동을 전세계적으로 이끌고 있는 국제 해비타트 설립자입니다. 그가 20대 백만장자에서 30대 자원봉사자로 일생일대의 변신을 하게 된 것은 `더 이상 돈만을 최고로 아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아내의 결별선언이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새로운 삶의 비전에 눈을 뜬 그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회단체에 기부하며 무주택자와 극빈자를 위해 집을 짓는 봉사활동에 뛰어듭니다. 지금까지 의약^교육^식량으로 사회활동을 하는 단체는 많았지만 막대한 비용과 인력 등의 부담으로 집을 짓는 활동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운동으로 600여개 도시에서 집을 지었으며 밀러드 풀러는 최근 국내에 발간된 `망치의 신학'이라는 책에서 집짓기까지의 역사와 감동적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돈만 알았던 수전노에서 사회봉사자로의 변화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갱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용서입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자의 기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받습니다. 회개는 기적을 시작하는 출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삶의 변화와 갱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새로운 삶으로 이러져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갱신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도 용서받은 자의 기쁨과 치유와 회복 갱신의 삶이 실현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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