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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목표하는 교회 (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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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미국의 신학자 '칼 두들(Carl Dudly)'의 조사에 따르면, 1940년부터 1960년까지 20년 동안이 미국교회가 가장 왕성했던 시기라고 합니다. ‘1940년대 미국의 주요 개신교 숫자가 미국 전 인구의 49% 였다,’고 합니다. 과반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다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이토록 왕성하게 성장하는 기간 동안 미국교회가 한 일과 그 당시 선포된 메시지의 주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칼 두들(Carl Dudly) 박사가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급성장의 물결을 타면서 미국 교회가 한 일은, 첫째, 예배당을 크게 지었다고 합니다. 지금 도심 가운데 비어있는 예배당들이 바로 그때 세워진 건물들이라고 합니다. 둘째, 신학교를 많이 세웠다고 합니다. 각 교단마다 앞 다투어 신학교들을 미국 곳곳에 세웠습니다. 현재는 해마다 문을 닫고 있습니다. 이제는 세일까지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셋째, 깊은 산 속이나 조용한 곳을 찾아다니며 캠프장이나 기도원을 많이 세웠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주로 선포된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1) '중산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즉, '예수를 믿으면 잘 살게 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2) 예수를 믿으면 좋은 사회적 지위를 얻는다고 선포했다고 합니다.

3) 예수를 믿으면 좋은 가정을 갖는다고 하는, 아메리칸 드림과 일치하는 메시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1960년부터 이런 소망이 실제로 현실화되면서부터 미국인들은 더 이상 교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가정이 안정되고, 지위가 안정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부터 교회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 실제 1964년부터 1974년까지 감리교인만 1백 만 명이 줄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84년까지는 920만 명이 줄었다고 합니다. 놀라운 얘기 아닙니까? 뭘 말해 주고 있는 통계입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사실들을 접하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십니까? 교회가 본질에서부터 벗어나게 되면 무너지고 병드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입니다.

실제 교회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에 의할 것 같으면, 교회사에서 '교회의 타락과 교회의 세속화는 콘스탄틴 대제가 주후 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다음부터였음'을 지적합니다. 그 이후부터 가정에서 모이는 모임 대신에 성전에서 모이기를 시작했고, 평신도 목회자들의 역할대신에 안수를 받은 성직자들의 역할이 강조되었습니다. 주 중의 모임 대신에 주일 모임만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교제의 기능은 상실된 채 예배만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교회의 구조는 더 이상 ‘가라.’ 구조가 아니라 ‘오라.’ 구조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공격적인 교회'가 아닌 '방어적인 교회'가 되어 버린 것이 교회 성장의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무기력한 구경꾼 평신도'가 생겨나게 되었고, 초대 교인들과 달리 더 이상 '세상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머리 깍인 삼손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모든 거룩한 일은 목사에게 위임하고 자신들은 철저하게 세속적인 사람들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전한교회의 정신은 목회자들의 손에만 있던 사역을 이제는 평신도들의 손에 되돌려 주자는 데 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오순절교회 이후의 가정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자는 데 있습니다.

기독교 초기의 예루살렘에 있었던 다락방교회인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식으로 말하자면 '[개척교회로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인류 최초의 교회였던 예루살렘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행1:13). 빌립보교회도 ‘루디아의 집’(행16:16)에서 시작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시작했습니다(고전16:19). 라오디게아 교회도 어느 무명의 여인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골로새교회 역시 빌레몬의 가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빌레몬의 가정교회 구성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들이 빌레몬의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가장은 빌레몬입니다. 자매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입니다.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입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는 가족 외에 빌레몬과 함께 주님을 섬기는 이웃들입니다. 이런 가정교회들의 형태가 3세기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과 함께 점차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중세사회의 ‘제도’ 혹은 ‘조직’이라는 신화에 빠져 이 소중한 가정교회의 기능들이 모두 사장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주님이 계획하시고 설계하셨던 교회의 모습과는 달리 이상한 또 하나의 교회 형태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아마 주님이 내려다보시고는 기겁을 하실 것입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우째 저런 교회가 세워졌단 말인가?”하시며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리지널 포인트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획하셨던 교회, 이것이 교회를 시작하게 된 동기요. 이유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목표하는 교회, 비전을 가진 교회, 꿈꾸는 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특히 교회의 본질에 대해 '빌레몬의 교회'를 통해서 교훈을 얻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의 모습이요, 우리 교회를 떠받치고 있는 중요한 기둥과 같은 원리로 삼아야 합니다.

1. 가정과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관계가 가족임을 역설합니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자녀들 말입니다. 그래서 갈6:10절에 보면,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족들에게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엡2:19절에도 보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자, 문제는 뭡니까? 과연 오늘 우리가 교회에 와서 성도들을 만날 때 가족임을 느끼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여러분을 다 일어나라고 하고서 “앞뒤 좌우에 있는 분이 어떤 분인지 자세히 아는 사람만 앉으세요.”라고 한다면 과연 그 자리에 앉을 성도가 몇 사람이나 될까? 무척 궁금해집니다. 그 사람의 이름, 직분, 사는 곳, 가정, 직업, 그리고 기도 제목까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한다면 최소한 이 정도의 지식과 교제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모두 거짓말을 한 것이 됩니다. 조금 전에 뭐라고 신앙을 고백하셨습니까?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 교통이란 것이 바로 교제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믿는다고 해 놓고 바로 옆자리에 있는 분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리고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이 어떻게 제대로 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주님께서 들으시고 “거짓말하지 마!” 하실련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교회의 존재와 참된 교제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몇 가정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구역예배를 드리면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하면서 삶을 나누노라면 분명히 가족의 연대감을 강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육신의 형제이상의 친밀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역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1세기 빌레몬의 가정에서 모인 교회가 그러했다는 것 아닙니까?

자! 가정이 좋고 가족이 좋다는 게 무엇입니까? '좌우간 이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다 용납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해도 다 용서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매우 사랑하는 말씀이요. 특별히 은혜를 받는 말씀을 소개하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섰습니다. 그는 이렇게 갈라디아서 4장 13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도자가 된 것은 순수한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그 무엇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육체의 약점, 곧 고질적인 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저들은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두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14절)…" 이런 관계가 은혜의 관계입니다.

심지어 바울에게는 간질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교회에서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고 상상해봅시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이 뭐 저런가" 하고들 언짢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믿음에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같은 저들의 사랑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라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정작 우리가 당신을 존경합니다. 당신을 위해서 눈이라도 빼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면 그렇게까지는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인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곧 바울은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할 것 같습니까, 얼마나 수고할 것 같습니까? 시험하려들지 마십시오. 나를 사랑하는 사람 얼마든지 많습니다. 오늘이라도 내가 고통을 당하면 당장 달려와 나를 위로할 사람 많습니다. 나를 위하여 희생할 사람 많이 있습니다. 내 영혼을 위하여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눈물흘려 애도해줄 사람 얼마든지 있습니다. 고독해하지 마십시오. 내 마음이 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의 사랑이,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생각합니다. 저들은 나를 위해서라면 눈이라도 빼어줄 것이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은혜요.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해서 주노라, 내가 희생하노라.' 하고 큰소리치지 마십시오. 피곤하게 만드는 소리입니다. '나는 이렇게 큰 사랑을 받고 있노라.', '이 엄청난 사랑 안에 내가 있노라.'고 받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더러 그 사랑의 응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사랑의 참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관계가 주의 종과 성도와의 관계가 이런 가족과 같은 관계가 되어야 가장 이상적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감싸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치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나와 함께 진정 같은 마음으로 웃어주고, 같은 마음으로 함께 울어 줄 그 한 사람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나의 눈물이 이곳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나는 어디서 울어야 할까?
내 영이 이곳에서 날개를 펼 수 없다면, 나는 날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나의 가치를 인정해줄 가족 같은 사랑이 필요하다.
나는 내가 넘어졌을 때 내 손을 붙들어 줄 따뜻한 손길이 필요하다.
그곳은 아무런 느낌을 나눌 수 없는 닫힌 감옥 문이 아니다.
그곳은 웃음의 탈을 쓰고 춤추는 광대들의 광장도 아니다.
그곳은 의미 없고 지루한 얘기만 나누는 옛 노인들의 사랑방도 아니다.
그곳은 제 자랑만 늘어놓는 동창회 모임도 아니다.

만약 이곳이 나의 눈물이 이해될 수 없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로 가야할까?
만약 이곳이 나의 기쁨이 곧 너의 기쁨이 될 수 없다면, 나는 어디서 웃어야 할까?
만약 이곳이 나의 슬픔을 인해 함께 울어줄 수 없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서 내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을까?
만약 이곳에서 내 영혼이 날수 없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할까?

형제여, 자매여! 이리로 교회로 오시오. 당신의 모습 그대로 오시오. 가면을 쓰지 말고 오시오.
이곳은 좋은 옷을 자랑하는 곳도, 나의 잘남을 뽐내는 곳도 아니라오.
이곳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삶을 나누는 사랑의 가족,
이곳은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랑의 관계,
이곳은 마주보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한곳을 바라보는 비전과 눈물의 모임,
그 눈물에 주님이 웃고 계신다오.
이곳은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당신 안에 계시는 주님을 환영하는 천국 공동체라.오”

저는 우리 교회 예배당 구석구석에서 서로를 부등켜 앉고 울며, 웃으며, 축하해 주며, 함께 기도해 주는 아름다운 분위기,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꿈꾸어 봅니다. 머지않아 우리도 그런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리라 기대해 봅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매 교회, 형제 관계을 뛰어 넘어 부부 처럼 한 몸처럼 주안에서 하나되어 탄생되고, 가족들로 이루어진 교회들이 새롭게 개척되리라 기대해 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이 일에 선구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초대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따라합시다.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한가족입니다." 이 일을 위해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2. 만인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즐겨 쓰던 구호들이 있었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 그리고 끝으로 주장하던 것이 바로 '만인제사장직'이었습니다. 특별한 사제나 목사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 사제를 통해 고해성사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공로로 다 직접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는 진리의 재발견한 것입니다.

동시에 종교개혁자들의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모든 성도들이 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일'이었습니다. 목회자들이 독점하고 있던 사역을 이제는 평신도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 가운데 구경꾼 입장이 아닌 일군으로 헌신해서 사역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레그 옥덴이' 쓴 「교회 개혁 이야기」라는 책에 보면, “교회 내에서 10% 내지 20%의 사람만이 사역에 참여하고 있고 나머지 8,90%의 사람들은 구경꾼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날 개교회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교회 내에 사역의 자리를 많이 만들어 낸다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포와 같은 셀교회, 즉 모든 성도들이 참여하고 헌신하는 교회로 전환한다면 이것이 역전될 수 있습니다. '8~90%가 사역자로, 나머지 10내지 20%만 구경꾼이나 방관자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성숙한 교회에서는 사람들의 은사가 쉽게 발견됩니다. 또 구조적으로 서로에게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목자 혼자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닌 목원들 모두가 자기 은사대로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만인제사장 교회입니다. 우리가 꿈꾸고 회복하고자 하는 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빌레몬 가정의 교회가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 대해서 “동역자”라 그랬고, 압비아에 대해서는 자매라 그랬고, 아킵보에 대해서는 ‘군사’라고 그랬습니다. 얼마나 헌신적으로 일을 했으면 군사라고 불렀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느 누구 하나 방관자 없이 모두가 일하는 교회, 모두가 부름 받고 쓰임 받는 그런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흔히 교회의 유형을 이야기 할 때 세 가지의 유형이 있습니다.

1) 첫째는, 피라미드형의 교회입니다.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목사가 앉아있고, 그 밑에 서열대로 자리를 잡고 있는 교회형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형태일수록 교회의 직분을 마치 사회의 계급처럼 생각합니다. 그래 뭐 오가는 말속에 보면 ‘집사를 땄다’고 합니다. 뭐, 장로 따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라나? 완전히 계급 개념입니다. 어떤 교회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 어떤 새 신자가 당회실에 주일마다 들어와 커피를 하다가 어느 날엔가 문득 그런 말을 하더랍니다. ‘알고 보니 여기는 장성들만 모이는 곳인데 당신이 몰랐노라고...’ 그 분의 생각에는 교회의 직분을 일종의 계급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피리미드 유형의 교회에서는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런 교회일수록 섬기거나 일은 하지 않고 군림하려고 듭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큰 암적인 요소입니다.

2) 둘째는, 마차형의 교회가 있습니다.

목사 한 사람이 앞에서 수레를 끌고 나머지 성도들은 그 수레에 탄 사람들입니다. 관객이요 구경꾼이요. 손님입니다. 거기서 하는 말이 마차가 늦게 간다느니, 너무 빠르다느니, 덜컹거린다느니 뭐 별 소리 다 합니다. 그러면서 팔짱을 끼고 세상을 즐기거나, 세상모르고 졸고 있습니다. 목사 혼자서 운전하고 끌고 가는 교회,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계획하셨던 교회와는 다른 교회입니다.

3) 마지막 세 번째는, 코치형의 교회(필드형)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그 팀의 감독이라면, 성도들은 경기장에서 직접 뛰는 선수들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남북교회라는 한 팀에 소속된 사람들입니다. 감독이 제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혼자서 경기를 승리로 이끌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선수 개개인이 아무리 뛰어난 자질들을 가지고 있다 해도 감독이 없는 팀은 또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선수들은 감독의 코치를 받고 필드에 나가서 열심히 뜁니다. 감독이 필드에서 뛰는 것이 아닌 선수들 개개인의 재능과 은사에 맞게 위치를 선정해 주고 뛰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요,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추구하는 모델링의 교회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다 함께 뛰고 사역하는 교회 말입니다.

3. '코이노니아'가 잘 이루어 지는 건전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성숙한 교회에는 예배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이 예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의 본질이 성경공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있습니다. 그렇다고??교회의 본질이 기도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찬양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숙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코이노니아에 있습니다.

코이노니아 만큼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성도의 교제, 친교, 나눔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삶을 함께 나누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 지난 한 주간 동안에 있었던 이야기,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거기서 찬송과 기도가 어우러집니다. 그런데 이런 나눔의 교제가운데 놀라운 치유와 위로와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초대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행 2:46~7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 속에 엄청난 파워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빌레몬의 가정 교회 속에는 5절에 보면,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6절에 보면, 믿음의 교제가 살아 있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6절에 보면, 이로써 사람들이 선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필요하며 선도들과의 올바른 가족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문화연구소에서 실직을 당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몇가지 중요한 충고와 함께 조언을 해서 화재가 된 일이 있습니다. 즉, 교제를 통한 관계회복과 협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그 충고가운데

1) '어려움을 이웃에게 알리고 기도를 부탁하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알까해서 쉬쉬한다든지, 창피해서 혼자만 알고 고민을 하면, 문제를 풀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되도록이면 이웃에게 나의 어려움을 알리고 조언을 부탁하고, 기도를 부탁하라는 것입니다. 옛말에도 병은 나팔을 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2)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면, 오늘의 이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절대 사람들을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때도 있고 저런 때도 있는 법인데, 어려움에 빠지고 나면 자책하게 되고 자신이 무능력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이 심하면 열등감에 빠져 사람을 피하게 됩니다. 이런 소극적인 마음이 숱한 병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 백인들보다는 흑인들에게 더 많이 걸리는 병이 하나 있습니다. “적혈구 빈혈증”이라는 병입니다.

왜 백인보다는 흑인이 더 많은가? 자신이 흑인이라는 열등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열등감이 마침내 중병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부한 사람들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병에 더 많이 걸리는 것도 알고 보면, 열등감 때문이고, 패배감 때문이라고 많은 의사들이 진단합니다. 혹 실패했더라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할지라도 사람들을 피하려 들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동하라는 것입니다. “쨍하고 해 뜰 날이 온다.”는 것을 믿고 말입니다.

4) '다시 올 기회를 위해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기회는 한번 지나가면 끝이 아닌 또 다시 옵니다. 기회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시 찾아옵니다. 그러니 또 다시 찾아 올 기회를 잡기 위해서 오늘 준비하는 일에 게으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의 불행이 내일에 가서는 어떻게 전화위복으로 바뀌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문제는 문제 자체가 아닌 그 문제를 대하는 나의 자세가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인 자세, 교제를 통한 관계회복과 협력을 통해 어려움을 이겨나가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면,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함을 얻게 되었고,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제를 통해 문제와 어려움을 이겨나간 성숙한 교회의 아름다움이요. 파워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의 교제와 모임의 성격이 바로 이러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그룹인 주일 모임뿐만 아니라 소그룹 구역모임이나 각 기관 모임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이요. 놀라운 기쁨과 위로를 맛볼 수 없는 요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코이노니아가 잘 이루어지는 성도와 각 기관이 되도록 헌신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좀 더 파워풀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명을 찾아 헌신하도록 헌신의 기회를 제공하는 교회로 전환했습니다. 물론 교회 식구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위로와 격려보다는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평생 살을 섞고 사는 부부도 뜻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하며 사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부딪치면서 모난 성격이나 인격이 비로소 원만한 신앙 인격으로 성장하며 성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제도에 있는 어느 해변 가에는 '조약돌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태양 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둥근 조약돌은 마치 예술품처럼 아름답기만 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예술품에 가까운 조약돌들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 많은 시간 동안 거센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조약돌은 서로 부딪치곤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모난 부분들이 깍이우고 다듬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혼자 살고 혼자 신앙생활 하는 것은 편하고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면 처음에는 불편하고 또한 부딪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부딪치고 깨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부딪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도 깊은 만남과 교제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 사람과 만나면 만날수록 자주 부딪치게 되지만 이를 통해 우리의 가면이 한 꺼풀씩 벗겨지게 됩니다. 부딪치면서 모난 우리의 성격이나 인격이 다듬어지고, 아름다운 공동체 습관을 만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모두 부딪침을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구더기 무섭다고 장을 안 담그시겠습니까? 오히려 부딪치면서 서로에게 진실한 모습과 아름다운 인격과 바람직한 생활습관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교제와 훈련장이 곧 교회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역예배와 주일 예배와 무엇이 다릅니까? 주일 예배의 축소판이 구역예배입니다. 그러나 구역 모임이 주중에 한 번 더 모이는 모임으로만 존재할 뿐, 교회의 기능과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작은 개척교회도 교회는 교회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역예배도 작은 교회입니다. 구역예배에는 목사가 없지 않느냐 반문하시겠지요? 아닙니다. 구역인도자가 평신도 목사인 셈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초대교회의 저력은 바로 이런 평신도 목사들이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성전은 물론 집에서까지 말입니다.

저에게는 이런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우리의 유일한 사역의 장이었던 예배당 안에서 뿐 아닌 발로 밟고 머무는 곳 어디서나 사역의 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날이 사역의 날이 될 것입니다. 지금 모양 주일만이 아닌 모든 날에 교제가 이루어지고, 말씀이 선포되고, 증거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가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신학교 나온 목회자가 사역하는 교회가 아닌 평신도 지도자들이 사역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비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기에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받아 주소서, 나를 보내소서. 나를 써 주소서. 이 시간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헌신하여 올바른 교제가 교회와 가정과 사회와 직장과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중심하는 섬김으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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