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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고전 1: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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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전화로 약속을 하고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서로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약속을 잘 해야 합니다.

옛날 핸드폰이 생기기 전에 얼굴을 모르는 두 사람이 약속한 시간에 그 장소에 가서 만나러 온 사람을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늦었나보다 하고 기다리다가 계속 오지 않으면 실내 방송을 합니다.
‘누구씨를 만나러 오신 분은 카운터로 나오십시오.’ 그런데도 사람이 나오질 않습니다.
집으로 전화를 해 보면 분명히 만나러 나갔다고 이야기합니다.
몇 시간 기다려 보지만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돌아갑니다.
상대편도 역시 똑같이 약속한 장소에 가서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만날 장소를 ‘소양강’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변에 소양강이 두 군데 있었습니다.
한 곳은 찻집이고, 한 곳은 술집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찻집 소양강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당연히 술집 소양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엇갈리게 나오면서 한 사람은 술집 소양강을, 한 사람은 찻집 소양강을 보면서 나왔지만 설마 그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두 사람은 분명히 자기 나름대로 약속을 지켰습니다.
상대방에게 말한 옷을 입고 약속한 좌석 카운터 옆에 앉아 이었습니다.
서로 자신은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찻집에 한 사람은 술집에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18-31절 말씀은 이 이야기와 비슷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오라하는 곳에 오지 않고 엉뚱한데 가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노력하다가 하나님을 찾지 못하자,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 속에 만들어 놓은 것이지 실재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 하나님은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않는 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을 찾아가서 만나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거룩한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만 하나님을 만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골방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시고, 광야에서 돌베개 잠을 잘 때 만나자고 하시며, 네 마음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는 자리는 너무 높고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올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마. 그것이 어디이든지 간에 내가 찾아가니 만나자’ 하십니다.
‘가장 낮은 자리, 죄인의 자리, 외롭고 고독한 자리, 거기서 만나자’ 하십니다.
그 자리가 바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골고다 언덕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형수로 죽어 가신 십자가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로 나아오지 않고 다른 곳을 찾아갑니다.

2.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많은 세상 학문을 통하여 세상 지혜를 많이 얻은 헬라인들은 하나님을 지식으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서관에 가야 만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세상적인 지혜를 많이 가진 사람들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강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힘없이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잡혀서 로마의 총독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습니다.

‘진정한 신은 죽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헬라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상상을 통하여 신을 만들어 냈는데 ‘신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고 감각이나 감정이 없다. 그리고 죽지도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사형수로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리는 아무도 트집을 잡지 못하게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진리라고 할 수 있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다른 신을 만나며, 구원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나서 도서관에 가서 아무리 책을 들여다보고 연구해 보아도 참 진리는 발견하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본문 18-23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18-23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나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기적을 행해 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기적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내가 무덤 속에 삼일 간 들어가 있다가 살아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나자고 하시는 그 자리에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많은 지식과 학문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 학문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기적과 이적이 일어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만나려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앞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나님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지식에 있지 않습니다.
화려하고 대단한 건물에서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려한 예배당을 찾으려면 로마에 가서 베드로 성당을 찾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화려한 베드로 성당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3. 우리는 십자가를 몸소 질 때 확실하게 하나님을 만납니다.

남편이 속 썩일 때,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꼭 참고, 비난하지 않고, 온유하게 대하다 보면, 그 남편 안에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만나 주십니다.
사실 그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환난과 고통이 다가와서, 견딜 수 없을 때에,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는데, 이 정도 고난을 참지 못하랴 생각하고, 우리의 생각이, 골고다로 향하여 가면, 그 고통스러운 사건과 슬픔들 속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나자고 약속하신 장소는, 바로, 골고다 언덕입니다.
십자가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곳에는, 하나님도 없습니다.

큰 교회에 가면,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학식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사회에서, 좀 유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에 걸맞게, 큰 교회를, 찾습니다.
물론,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은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덜하다는 얘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작고 열악한 교회일수록, 몸소 봉사하며, 신앙을 키워가기에, 유익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믿음은, 몸소, 하나님의 일에 뛰어들 때, 몸소, 봉사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 감동과 눈물이 있고, 영광을, 더욱 돌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쑥쑥 커가는 것이에요.
내가, 십자가 질 일이 있는 곳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입니다.

4. 하나님은, 생각지도 않은, 만남의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위대한 사람들을 만나려면, 그럴싸한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남녀를 중매하여, 선을 볼 때에도, 아무나 만나지 않습니다.
중매쟁이 말을 들어보고, 어느 정도, 만날 만한 조건이 되어야, 만나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위대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대통령 만나기가 힘들지만, 미국에서 대통령이 오면, 언제라도, 한국의 대통령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국무총리나 장관들은, 대통령 만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대통령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높은 사람을 자주 만나려면, 나도 높아져야 합니다.
위대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도, 위대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십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신분이 낮을수록, 만나기가 쉽습니다.
곤고하고, 외로운 사람일수록, 만나기가 쉽습니다.
보잘 것 없고, 죄 많고, 나약한 사람일수록, 만나기가 쉽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 깊이, 하나님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을 폐하려 하시나니”(26-28)

마음이 낮은 데로 내려가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항상 회사에서, 말단 직원으로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장하고, 진급하고, 커져가야 합니다.
하지만, 마음은 늘 낮아지고, 작아지고 겸손할 때, 그는 하나님과 만나,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사에 직급이 높아지고, 회사가 더 커져서, 많은 사원을 거느려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부족한 사람이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세상의 방법과 다릅니다.
약할 때 곧 강해지고, 고독할 때 하나님과 만나며, 부족할 때 충만해지게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 명저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도망칠 수 없다. 십자가를 피한다면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밖으로 도망쳐도 거기 십자가가 있고, 그대가 밖으로 도망쳐도 거기 십자가가 있고, 안으로 숨어도 거기 십자가를 볼 것이다. 위로 올라가도 십자가가 기다리고 밑으로 파고들어도 십자가가 있을 것이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두 십자가를 세우고 십자가로 장식을 만듭니다.
하지만 교회 종탑에 높이 달린 십자가는 능력이 없습니다.
금과 보석으로 멋지게 장식한 십자가도 능력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직접 져 보아야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눈물도 흘려 본 적 없고, 땀도 흘려 본 적 없고, 고민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능력을 알지 못합니다.

***** 30년 동안 연극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맡았던 [안톤 레이지]라는 유명한 배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 여행가들 중에서 모든 카메라 장비를 짊어진 어느 부인이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어 옮기는 자기 남편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보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그 부부가 무대에 접근하여 남편이 십자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지만 너무 무거워서 그 십자가를 들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십자가를 가지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동안 그 유명한 배우 레인지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 여행가는 그에게 “이것은 연극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사용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배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만일 내가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면 내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어깨에는 십자가가 지어져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고 계십니까?
그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지금 십자가를 내려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난 번 성지 순례 갔을 때 일입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던 골고다를 향한 길을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올라갔었습니다.
아주 한적한 시간입니다.
사실 낮에 그 길을 갈 때면 묵상하며 조용히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걸으라고 안내자가 말합니다만 그게 잘 안됩니다.
우리는 묵상하며 걸어도 주변 상가들에서 부르는 호객 소리에 정신이 없습니다.
‘일 딸라 일 딸라, 아주 싸다, 비싸지 않다.’ 하며 장사꾼들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른 새벽에 그 행사를 했습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찬송을 부르며 한사람이 한절 부르는 동안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다가 한절 끝나면 다음사람이 옮겨 받아 지고 갑니다.
저는 처음에 지고 갔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남은 구간은 리더가 지라고 해서 다시 제가 짊어지고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 십자가는 그리 무거운 십자가는 아니었습니다.
내 키보다는 크지만 중간을 어깨에 메었기 때문에 약간 허리를 굽히면 땅에 질질 끌고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그렇게도 무겁더라구요.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이 십자가를 지시고 이 길을 걸어 가셨다라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한없이 쏟아 졌고 그 십자가가 내 어깨를 누르는데 등이 결려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서 그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저마다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고 계십니까?
그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지금 십자가를 내려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을 연구하고 기독교에 관한 박사가 된다고 기독교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뒤따르는 자라야 진정한 기독교를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희생입니다.
아픔입니다.
이것을 참아내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른 사람,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점잖은 자리에 가서 단추만 하나 떨어져도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발가벗겨져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만 보아도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얼굴에 침 밷김을 당하셨고, 뺨을 맞으셨으며 매를 맞으셨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많으나 이 땅위에서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고자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와 함께 만찬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고난을 맞이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기적에 경탄하지만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함께 하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핍박과 어려움이 닥치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위로를 받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힘없이 십자가를 지실 때 제자들은 모두 돌아섰습니다.

고난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싫어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한 고난이라면 달게 받아야 합니다.
그 안에 구원의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

십자가!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믿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약하고, 상처받고, 외롭고, 고독한 자!
마음이 가난한자!
그들의 마음에 오늘 주님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십니다.
‘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영접합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옵소서!’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 안에 계시고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영원한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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