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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슬픈 노래를 지어 부른 사람(다윗의 영성시리즈 4) (삼하 2: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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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희 어머니가 암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관이 나가는 장례식 날 아버지는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노래를 부르셨다. 마을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는데 노래가 나오느냐?”고 수군거렸지만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때 아버지는 어머니가 19살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맨 처음 부끄러운 듯 불렀다는 그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아버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슬픔을 그렇게 노래하고 있었다. 그 목이 멘 아픈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는 없지만 그 때 저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들어 보았다. 여러분은 노래를 들으면서 가장 깊은 슬픔을 경험해 보았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국악을 참 좋아한다. 언젠가 국립국악원에서 심청가 완창 판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다.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공양미 3백석에 자신을 팔기로 한다. 이제 내일이면 배에 실려서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뛰어들어야 하는데 그 날 저녁 심청은 눈먼 아버지에게 가장 좋은 반찬으로 저녁을 해드리고 홀로 살아가실 아버지를 보면서 노래한다. 한 마디로 그 노래는 창자가 끊어질듯 한 노래였고 그 노래를 듣는 나도 나의 창자가 끊어지는 듯했다. 나는 혼에서 나오는 그 판소리를 들으면서 수없이 눈물이 흘렸던 적이 있다. 누군가가 말했다. 
“사람이 슬픔을 겪으면 눈물이 나온다. 사람이 큰 슬픔을 당하면 침묵한다. 그러나 가장 큰 슬픔을 만난 사람은 노래한다.”고.
  오늘 다윗은 가장 큰 슬픔을 가진 채 노래하고 있다. 비가를 부르고 있다.

2. 다윗의 비가의 특징

1) 우선 이 비가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전에 ‘다윗은 왜 무엇 때문에, 누구를 향해 이 비가를 부르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 슬픈 노래는 사울과 요나단이 길보아산에서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한 후에 지은 노래다.

  사울이 다윗에게는 어떤 사람인가? 미친 사람처럼 자신을 죽이려고 날뛰었던 사람이다. 다윗을 잡기 위해 광야를 샅샅이 뒤졌고 눈에 독기를 품었던 사람이다. 다윗은 그를 피해 고아처럼 광야를 헤매 다녀야만 했다. 다윗은 아무런 무기도 없이, 아무런 양식도 없이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아무데서나 들어가서 무엇을 달라고 구걸할 수도 없었다. 사울의 밀고자들이 항상 그 주변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숨 막힌 삶을 살았다. 다윗이 경험했던 위험, 역경, 외로움, 상실 등은 모두 사울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만약 사울이 다윗 자신의 삶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다윗은 쉽게 왕이 되어서 편안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때문에 맘 편안한 날 없이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외쳐야만 했던 사람이다. “내가 저 사울 때문에 이렇게 망했다. 이렇게 망했어.” 만약 그가 정말 맨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사울의 죽음 앞에서 잘 됐다고, 고소하다고, 역시 하나님은 틀림없다고 쾌재를 불러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다. 그의 노래 속에는 사울에 대한 어떤 불평이나 비난이 전혀 없다. 그 흔하디흔한 권선징악의 단 한 마디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다윗은 진실로 사울을 애도한다.

  다윗은 요나단을 애도한다. 우리가 그것은 이해된다. 다윗과 요나단은 가장 깊은 우정을 나눈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다윗의 이 비가를 보라. 다윗은 가장 사랑하고 끈끈한 우정을 나누었던 요나단과 똑같은 깊이의 슬픔을 사울을 향해서도 표현한다. 아니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그 슬픔은 똑같다. 그 슬픔을 질량으로 달아보면 똑같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다윗에게도 사울은 힘든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를 보면 분노가 일어나고, 미워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그런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다윗이 집중했던 것은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보다 ‘저 사람이 하나님에게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보였다. 다윗이 추구했던 것은 ‘사울이 나에게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저 사울에게 무엇을 했느냐?’가 더 중요했다. 하나님은 저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행하신 일. 다윗은 이것을 인정했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기로 한 것이다. 다윗은 사울에 대한 증오로 인생을 살지 않았고,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입각해서 기도하고 결단했다. 사울은 다윗을 힘들게 했지만 결코 다윗을 파멸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만약 다윗이 사울을 향한 분노로 인생을 살아갔다면 다윗의 생애는 스스로 파멸을 맞이했을 것이다. 다윗은 사울에 의해 메마른 광야에서 살아갔지만 그의 마음은 결코 메마른 광야와 같은 삶을 살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당신은 누군가를 몹시 미워하고 있는가? 당신은 그 사람 때문에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당신은 누군가가 잘못되었을 때, 또는 그가 죽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잘 됐다고 박수를 칠 것인가? 아니면 오늘 다윗처럼 진실로 애도할 것인가? 내가 누군가의 불행에 대해서 잘됐다고 반응한다면, 시원하다고 말한다면, 그 모든 감정을 숨기고 마음속으로 웃고 있다면 나는 그 동안 광야 속에서 가시밭과 같은 인생을 살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아무리 그 사람이 나에게 고통을 주고 상실을 경험하게 했을지라도 그를 슬퍼하며 비탄에 잠길 수 있다면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내 스스로 메마른 광야에서 살 것인지, 사랑이 꽃피는 화원에서 살 것인지는 내가 지금 그를 대하는 태도와 마음에 달려있다.

2) 유진 피터슨이 분석했던 것처럼 이 애가에는 과도한 동정심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애가를 듣는 동안 우리는 다윗을 향해 동정심이 들지 않는다. 이 슬픈 노래를 듣는 동안 다윗의 상실, 빼앗김, 고생, 외로움, 광야생활, 도망과 망명생활, 이런 것들로 인해서 다윗을 향한 동정심이 유발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윗을 향한 경탄의 마음이 든다. 오히려 그 비탄이 영적 매개물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성을 초월하도록 만들고 있다. 비탄은 상실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다윗은 빈곤해지지 않는다. 왜 그는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빈곤해지지 않았던 것일까? 유진 피터슨은 여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 질문을 계속하며 묵상했다.

  엘리자베스 퀴불로 로스는 <인생수업> “상실과 이별의 수업”이라는 파트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상실은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어려운 배움 중의 하나이다. 상실감에서 얼른 벗어나려고 애쓰고, 때로는 그것을 미화시켜보기도 하지만,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과 사물과의 헤어짐은 우리를 슬프고 고독하고 공허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상실 없이는 결코 성장도 없다.” 상실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은 상실과 직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다가 이런 점을 하나 발견했다. 죽음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그들의 행동에서 놀라운 상징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처음에 마치 “나는 한 때 이곳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 열심히 자기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병세가 차츰 악화되고 감정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면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는다. 사진조차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로소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그들은 비로소 상실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부분을 발견하고, 가장 소중하고 영원히 간직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누군가가 나를 애도할 것이다. 전에는 그런 걱정을 했었다. ‘나의 장례식장에서 나를 위해 슬퍼할 사람은 몇 사람이니 될까? 나의 장례행렬을 따라오면서 눈물을 흘릴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러나 오늘 다윗의 슬픈 노래를 들으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염려 하나가 생겼다. ‘나의 장례식 때 나를 애도하는 슬픔을 넘어서는 비장함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생길 것인가? 슬픈 눈물보다 더 강하게 드러나는 의연함과 경외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기게 할 것인가? 사람들이 나의 장례식에서 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넘어서서 삶에 대한 더 강한 희망과 열정, 이 세상의 것을 넘어서는 영원한 것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여러분은 어떤가? 여러분도 그렇게 할 자신이 있는가?
 
  3) 다윗은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요나단을 애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다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했다. 그래서 그 노래는 야살의 책에 기록되어서 유다백성들의 입을 통해서 구전되었다. 그들은 그 노래를 잊지 않았다. 왜 다윗은 그 노래를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노래로만 여기지 않고 그것을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가르치라고 했을까? 왜 그것을 야살의 책에 기록해서 잊지 않고 부르고 불러 후세에 전하라고 했을까? 다윗의 슬픈 노래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들려주고 있다.

  다윗은 그 슬픈 노래가 우리의 마음에 깊이 박히기를 원했다. 그 슬픈 노래가 전해주는 진리가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게 하라는 것이다. 이 슬픈 노래를 가르쳐라.
  사울과 같은 적의와 요나단과 같은 사랑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치라. 미움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사랑 때문에 겪는 고통이 만들어 내는 이 거대한 리듬을 내 삶에서 어떻게 진지하게 다루어야 하는지 가르치라. 그래서 우리의 삶이 그 고통으로 인해서 비참해지거나 빈곤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깊어질 수 있도록 해라.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을 발견하라는 말이다. 고통은 최악이 아니다. 미움 받는 것은 최악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도 최악이 아니다. 죽음은 최악이 아니다. 진짜 최악은 이 모든 현실과 대면하지 못하고 겉도는 것이다. 최악은 존귀한 것을 하찮게 여기고, 신성한 것을 모독하는 것이다. 최악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내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다. 최악은 스스로 누군가를 몹시 증오하다가 고통의 광야 속에 들어가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최악은 사랑하고 맡길 수 있는데도 계속 미워하고 고집을 부리는 일이다.
 
  현대사회는 고통을 회피하거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사람들을 인도한다. 바로 그것이 현대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중독과 우울증이다.
그러나 다윗의 슬픈 노래는 우리에게 말한다. “슬퍼하는 법을 배우라.”고. 비가를 지으며 슬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그 때 그 때 기분을 좋게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게 될 것이다. 슬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거절당할 때마다 우리는 그 현실을 부인하려고 할 것이다. 슬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실패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절망하고, 그것이 극에 달하면 스스로 자기의 삶을 끝낼 것이다. 슬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내 삶은 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움직일 것이다. 고통과 상실, 거절과 실패를 늘 부인하고 피하려고 든다면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이다.
진정으로 슬퍼하는 법을 우리가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죽게 될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부활도 준비하지 못할 것이다.

  엘리자베스 퀴롤로 로스의 말을 기억하라. 상실은 피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상실은 맞서 싸워야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가장 큰 상실, 죽음도 결코 우리가 피한다고 해서, 망각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신다. 주님은 그 곳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그 곳에서 다시 사셨다. 주님을 목숨을 내놓고 생명을 얻으셨다. 죽음을 통과해 생명을 얻으셨다. 낮아지심을 통해 높아지셨다. 종의 모습이 되심으로 영원한 왕이 되셨다. 범죄자로 죽어 심판자가 되셨다. 아픔을 당하심으로 치유하셨고, 하나님께 버림받으심으로 하나님의 품에 거하게 되셨다.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슬퍼하고, 비탄에 잠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와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슬픔을 만나거든 슬퍼하라. 그러나 슬픔 속에서도 나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를 지라. 그것이 진정 부활을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며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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