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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신 13:13~15, 갈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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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은 인간 역사에 오랜 예술의 한 장르입니다. 동시에 마술은 기독교사에 큰 적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마술사의 마술을 보노라면 때로는 눈가림인지 아니면 귀신의 힘인지 분간하기 힘든 때도 있습니다. 1920년대 헝가리 태생 미국인인 해리 후디니라는 유명한 마술사가 있었습니다. 현존하는 마술사로는 단연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가장 이름이 알려진 마술사일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제트기가 사라지게 하고. 자유의 여신상이 온데 간데 없어지고, 만리장성을 통과하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통하는 마술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는 마술사가 아주 인기 있는 직업이 되었습니다. 이은결, 최현우, 오은영 등 신세대 마술사들은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마술의 세계란 아는 사람에게는 싱거운 일이며 눈을 잠시 속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에게는 신기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마술이란 그 비밀을 몰라야 재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래 전에 마술의 요령을 가르쳐 주는 TV 프로가 있었습니다. 그 마술사가 다른 마술사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심지어 살해협박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마술의 비밀을 알면 마술사들은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마술은 눈가림입니다. 분명히 눈속임인데 뻔히 알면서도 동작이나 말에 속아 넘어갑니다. 이것이 마술의 묘미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마술사는 빌립이 사마리아에 전도하러 가서 만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세례를 받고 빌립을 따라 다니며 표적을 보고 놀랍니다. 그 때 베드로가 사마리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냅니다. 베드로가 와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받기를 기도하였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본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에게 돈을 주며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안수할 때에 성령을 받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책망합니다. 그 때 시몬은 잘못을 깨닫고 “주께 말한 것이 임하지 않게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마술사는 성령의 감동도 마술로 생각합니다. 돈으로 성령의 감동을 사려고 합니다.

  마술은 현상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령강림도 마술로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눈가림으로 속이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실한 성령의 강림을 알지 못합니다. 신앙의 세계는 신앙으로 아는 사람은 아무 것도 신기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도 모르면 신기하고, 이상하고, 마술처럼 생각합니다.

  마귀는 꼬이는 자입니다. 유혹하는 자입니다. 넘어지게 하는 자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그것이 마귀의 일이니까 그렇습니다. 마귀는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유혹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시험하시는 분이십니다. 헬라어의 ‘페이라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시험하다는 말(test)과 유혹하다(tempt)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는 유혹하지만 하나님은 시험하십니다. 마귀의 꼬임은 그 목적이 넘어지게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그 목적이 훈련하여 든든히 서게 하는 데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유혹은 아담의 공명심에 대한 꼬임이었습니다. 지음 받은 인간이 지으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유혹입니다. 인간은 그 때부터 칭찬과 사람의 찬사에 중독 되어 있습니다. 뱀이 꼬인 것을 잘 보세요. 뱀이 얼마나 영악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와에게 다가갔습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보다 감각으로 들어오는 유혹에 약합니다. 마귀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둘째는 뱀은 아담이 없을 때 하와에게 다가갑니다. 아담이 어디 갔는지 모르지만 아담이 하와 옆에 있었더라면 뱀도 감히 꼬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셋째는 눈으로 꼬임을 받게 합니다. 넷째는 먹는 것 즉 식욕으로 꼬임을 받게 합니다. 먹는 것은 누구나 가장 유혹 받기 쉬운 부분입니다. 다섯째는 과다한 지식에 대한 욕망으로 꼬임을 받습니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는 지식의 욕망은 유혹의 이유입니다. 대개 유혹이란 거의 이런 유형들입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 친구네 집에 한 번 가보고 싶어서 늘 졸라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자친구가 자기 집에 아무도 없다고 놀러오라고 했습니다. 기다리던 날이 왔다고 환호하며 여자 친구의 집에 갔습니다. 가서 벨을 눌렀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벨을 눌러도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아무도 없었습니다. 너무 기다리던 나머지 완전히 꼬임에 빠진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았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고 합니다. “꾀더냐”는 말은 “에바스카넨”이란 단어인데 이 말은 신약에서 이곳에만 기록된 단어입니다. ‘중상함’이란 뜻입니다. “누가 마술을 피우더냐?”란 뜻입니다. 마술사가 눈으로 사람을 응시하면서 주문으로 미혹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눈 뻔히 뜨고 있는데도 속이려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사탄의 전략은 뻔히 아는 것을 가지고 우기고 속이려는 것입니다. 속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눈에 보이는 것도 부인하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바울은 말합니다. “밝히 보이거늘”이란 말은 ‘프로에그라페’란 말입니다. ‘분명히 표시되어 지다’, ‘확실히 보여지다’란 뜻입니다. 불을 보는 듯이 명확하다는 뜻의 사자성어인 ‘명약관화’(明若觀火)와 같은 의미입니다.

  사탄은 뻔히 보고, 아는 것을 가지고 꼬입니다. 더 간절히 알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사탄은 접근하여 유혹합니다. 아예 열심이 없고 간절한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접근하지도 않습니다. 사술과 거짓을 가지고 정말인 것처럼 꾸며대며, 사랑을 홀리게 하는 것입니다. 순진한 믿음을 거짓 진리로써 꾀는 것입니다. 인조진리로 참 진리를 꼬이고 말장난으로 진리를 호도하는 것입니다.

  빌립은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요한복음 14:9의 말씀처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답하십니다. 이미 보고 있는 것도 신령한 지식이 없으면 알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져보고야 믿겠다고 하던 도마에게 예수님은 요한복음 20:29에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도마는 보고야 믿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고 복인데 보아도 믿지 못하고 부인하게 하는 것이 유혹이고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어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아도 예수님의 구주성을 모릅니다. 이들은 다 얼마 후에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으로 돌변했습니다.

  교회사에서 ‘가현설’(假顯說)이란 이단 사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한 나머지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은 예수님이 아니라 구레네 시몬인데 사람들이 너무 슬퍼한 나머지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고 착각했다는 설입니다. 분명히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는데 구레네 시몬이 대신 죽었다고 주장합니다. 환각상태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보고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부활을 듣고 고대하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37에는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고 합니다. 보고도 믿지 못합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 힘겹게 노를 젓고 있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오시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자 마태복음 14:26에는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이라고 합니다. 보고도 믿지 못합니다. 우리의 감각이란 전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시험에 들기 아주 쉽습니다.

  미혹하는 자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꼬입니다. 사탄의 유혹은 대개 몇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는 유혹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시험하게 하는 유혹입니다. 셋째는 사탄을 믿게 만드는 유혹입니다.

  여러분, 사이비 이단을 보세요.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누가 봐도 뻔히 알 일을 가지고 유혹에 빠집니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는데도 꼬임을 당합니다. 이런 꼬임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열심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탄의 꼬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꼬여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꼬임입니다. 미혹하는 자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보는 듯이 믿는 사람을 하나님을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는 기도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절실한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될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시험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가사에 보세요.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니라고 부정하는 시대에 이 눈에 아무 증거 없지만 믿음만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게 합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합니다. 사탄의 제일 큰 꼬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육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합니다. 다시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라고 합니다. 어리석다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아노에토이’란 이 말은 ‘아 노에오’에서 나온 말입니다. ‘노에오’는 안다는 말입니다. 헬라어에서 ‘아’는 반대 의미를 표시합니다. 이 말은 도덕적 판단력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어리석음이란 무엇입니까? 판단력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판단력 없느냐? 보고도 모르냐?”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지은 사람이 육체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창세기 6:3에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한탄입니다. 하나님의 실망입니다. 사탄의 끝없는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육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영으로 시작한 삶을 육체로 마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보세요. 사울은 성령으로 시작한 사람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기스의 집에 가서 아들 사울을 봤을 때 하나님께서는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삼상 9:17)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을 때에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삼상 10:6)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육체로 마쳤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죽이고 백성들이 환호하자 사울은 시기가 가득 차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은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니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삼상 19:6)고 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9:9에는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의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라고 합니다. 금방 마음이 변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악령이 접하였기 때문입니다. 악령이 접하면 육체로 끝납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죽이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신접한 자에게 묻고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육체로 끝난 것은 악령의 꼬임 때문입니다. 사탄의 꼬임은 성령으로 시작한 사람까지도 육체로 끝나게 합니다.

  예수님을 꼬인 사탄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육체적 고통을 말했을 때 아마 사탄은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끝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장난입니다. 육체로 끝나게 하려고 사탄은 지금도 수많은 영의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단은 우리보다 훨씬 열심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믿음도 적어서가 아닙니다. 이단들도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하였지만 사탄의 꼬임으로 육체로 마칩니다. 박태선이나 문선명을 보세요. 원래는 영으로 시작하였지만 육체로 변합니다. 이제는 종교집단이라기 보다 거대한 경제 집단으로 변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여 초기에는 부흥의 역사도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육체로 마칩니다.

  교회의 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이 극대화되어 마지막에는 육체로 마칩니다. 교회 분쟁의 대부분이 이런 유형입니다. 목사와 교회 혹은 교인과 교인의 문제를 보세요. 교회 안에서의 허니문이 지나면 인신공격, 비난, 거짓비방, 사방으로 편지 보내어 창피주기, 심지어는 조폭 동원하기 등 인간적인 방법을 총동원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교회가 육체로 마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기독교 학교도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학교가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 장사를 하고 이속 챙기기를 합니다. 무늬만 기독교이고 알맹이는 없는 학교들이 비난을 받습니다. 이런 학교가 사학법 재개정에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학교들입니다.

  교회봉사도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육체로 변하여 끝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지난 번 미국에 갔을 때에 우리 교회 계시던 주성염 목사님께 들은 얘기입니다. 미국 어느 한인 이민교회에 혼자 된 부인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교회를 섬기면서 뭘 봉사할까 하다가 강대상을 닦아야겠다고 작심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시간만 되면 교회에 와서 강대상을 열심히 닦았습니다. 그런데 한인교회가 미국교회 예배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미국교회 장로님이 교회에 올 때마다 이 부인이 강대상을 닦고 있는 걸 목격했습니다. 항상 부지런히 강대상을 닦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미국교회 장로님은 돈이 많은 홀아비였습니다. 그 장로님은 한인교회 목사님께 그 부인을 소개해 달라고 해서 얼마 후에 결혼하였습니다. 혼자 된 부인이 완전히 팔자가 펴졌습니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여성도들이 서로 강대상을 닦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교회 봉사도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면 안 됩니다. 성령으로 시작된 일을 육체로 마치려고 하는 유혹은 언제나 있습니다. 모든 교회의 일이 성령으로 시작하고 성령으로 마쳐야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된 봉사가 육체로 마치면 하나님의 일은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4:10을 보세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성령으로 시작한 일꾼들이 끝까지 머물지 못했습니다. 성령으로 인도되어 교회를 섬기던 일꾼들이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육체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것이 육체로 끝나는 것은 사탄의 꼬임입니다. 이런 유혹은 사탄이 가장 재미있어 하는 유혹입니다.

결론

  알렉산드리아의 키루스는 정욕의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은 희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유혹을 받지 않는 까닭은 이미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자리에서 죄와 싸우지 않는 사람은 이미 육체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은 유혹의 고통을 받지 않습니다.

  “가장 큰 유혹은 유혹이 전혀 없는 것이다. 가장 큰 공격은 공격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도 수 없이 많은 유혹이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동시에 지금도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꼬임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물리치는 것밖에 없습니다.
  사탄은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니라고 꼬입니다. 사탄은 성령으로 시작한 것을 육체로 마치게 합니다.

  이런 유혹의 시대에 믿음의 확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고 꼬임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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