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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요 12:2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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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1970여 년 전 오늘,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말씀을 이 주간의 언제 하셨을까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이 주간 예수님의 행적이 요일별로 잘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일 다음에 바로 오늘 본문이 이어진 것을 보면 오늘 이 말씀을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목요일에 이 말씀을 하셨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27절과 28절의 앞부분,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목요일 밤에 하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a)
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b)
와 비슷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에 ‘제2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라는 제목을 붙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를 ‘그러나의 종교’라고 말하는데 제1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도 “그러나”가 들어가고 제2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도 “그러나”가 들어갑니다.

27절 앞부분을 보세요.
예수님은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괴롭다는 말, 예전 성경에는 “민망하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심한 불안, 동요, 고통,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헬라말로는 타랏소(ταράσσω)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을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이 때 예수님의 이 괴로운 마음을 두고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이렇게 심한 괴로움 가운데 있으면 다른 것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생각을 집중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은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였습니다.
이것은 ‘나는 이 고통 가운데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그 고통을 생각하면서 순간적으로 주춤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최고의 순종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동시에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을 우리가 많이 쓰는 말로 바꾸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가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어떤 것이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고 싶은 본능적인 마음을 누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셨을까요?
오늘은 이 사실을 생각하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집중되어 있고 그것으로 일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무엇이라고 찬송하였습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였습니다.

이 찬송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 중에 평화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풀이해도 좋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끝은 무엇입니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b) 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 일을 지내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 마귀가 예수님께 천하 만국을 보이며 자기에게 절하면 이 모든 권위와 영광을 네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4장 5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며 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이 받아야 할 것이지 내가 받을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 장애인들을 고쳐주신 기록 다음에 자주 붙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아라’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말로 ‘메시아 비밀’이라고 합니다.

그와 함께 많은 경우에 따라다니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씀입니다. 

본보기로 마태복음 9장 8절을 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일 다음에,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 더, 마태복음 15장 31절을 봅니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가버나움에서 사람들이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을 때(마 2:12, 눅 5:25-26), 
나인 성 과부의 독자를 살려주셨을 때(눅 7:16),
안식일에 회당에서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를 고쳐 주었을 때(눅 13:13),
여리고로 가는 길 가에 앉아 구걸하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었을 때(눅 18:43)
이와 같은 말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열 명을 고쳐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때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하셨습니다(눅 17:11-19).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그들을 고쳐 주셨는데 그 가운데 아홉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 기도가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1절에서 예수님은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어서 4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라고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나는 그 일을 다 이루어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제 결정적인 때가 되었는데 나를 도와주셔서 하나님을 크게 영화롭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부활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재림에서 대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은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 168장, “하나님의 나팔 소리 천지 진동할 때에“는 1절에서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진동할 때에 예수 영광 중에 구름 타시고
천사들을 세계 만국 모든 곳에 보내어 구원 얻은 성도들을 모으리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영광 중에 구름 타고 오실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아,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께 영광에서 출발해서 하나님께 영광에서 끝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탄생, 가르침, 기적,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레일 위에서 이뤄졌고, 이뤄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신 것은 ‘하나님, 이 레일에서 탈선하지 않게 하옵소서’ 라는 뜻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 모범을 본받아야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아야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주간에 하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엄숙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보고 그렇게 살라고 여러 군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다 무엇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까?)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매우 강하고 단정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삶을 지배하는 기본원리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일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아주 비싼 값을 치루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 몸으로” 여기에서 몸은 우리의 전 인격적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소극적이 아닙니다. 적극적입니다.
수동적이 아닙니다. 능동적입니다.
여러분, 씩씩하게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 하반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합니다.
신구약성경에는 “영광”이라는 말이 411군데 나옵니다.
이 말이 어떻게 쓰이나 살펴보면 “여호와의 영광” 이렇게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 이렇게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아야할 영광을 사람이 가로 채는 것은 용서 받지 못할 죄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지 아시지요? 그렇습니다. 헤롯입니다.
헤롯이 어느 날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을 했습니다.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했습니다.
그 연설을 듣는 사람들은 헤롯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미워했는데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수입해서 먹고 있었습니다.
헤롯에게 밉게 보였다가는 식량난을 면하지 못할 판이었습니다.
북한이 핵 문제로 국제사회의 미움을 받아 요즘 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지요.
그래서 그들은 헤롯과 화목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러니까 헤롯의 연설에 대해 그렇게 아첨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했을 때 헤롯은 ‘무슨 이야기냐? 그런 일을 있을 수 없다!’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습니다. 가로챘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행전 12장 21절은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라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일을 우리에게 많이 알려주고 있는 유세비우스라는 역사가가 있습니다.
이 역사가에 따르면 이 때 헤롯은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닷새 뒤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몸이 썩어 벌레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영광은 하나님께 돌여야 하는데 그것을 가로채는 사람은 이렇게 비참한 벌을 받습니다.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일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바울이 그를 고쳐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소리 질렀습니다.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급하게 이것을 만류합니다.
사도행전 14장 14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급했는지 말 보여주는 일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내가 대신 받고 싶어지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까? 
다른 유혹들도 물리쳐야 하지만 그런 유혹이야말로 정말 뿌리를 뽑아야 할 유혹입니다.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 ‘나도 헤롯!’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크리스천 운동선수들이 득점을 하고, 메달을 따고 인터뷰를 할 때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린 선수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께 영광!’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리아 앤더슨, 유명한 흑인 성악가입니다.
이 마리아 앤더슨이 입버릇처럼 한 말이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이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하는 마리아 앤더슨을 크게 쓰셨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마리아 앤더슨이 미국 국가를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힘쓰는 사람을 복주십니다.
그리고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 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21장,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기록입니다.
이 요한복음 21장에는 우리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세 번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베드로가 십자기에 달려 순교할 것을 예고하는 말씀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9절 앞부분,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아니 십자가에 달려죽는 것이 어떻게 영광이 됩니까?
더구나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습니다.
로마에 가면 여러 곳에서 그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 우리가 보기에는 수치스럽기 그지없는 방법, 이해가 되지 않는 방법을 통해서도 영광 받으시는 일이 많은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러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유다가 떡 조각을 받고 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대제사장들에게 간 것입니다.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요 13:31a)
라고 하셨습니다.

제자가, 그것도 신뢰해서 돈궤를 맡긴 제자가 배반을 하기 위해 나간 때에 ‘지금 영광을 받았다’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비극이 시작되었다.’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꼭 필요한 과정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윌리엄 버클리라는 잘 알려진 성서주석가가 있습니다.
이 분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살피는 작은 책을 썼습니다.
그 제목을 「비극과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다.’ 이런 뜻으로 풀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은 심한 손해를 보고 모욕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피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 나는 어떤 희생을 당하더라도 다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는데 까지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라는 소리가 났습니다.
하나님이 참 빨리도 응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할 때, 특히 나에게는 손해, 나에게는 고통이 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것을 감수하여 할 때 하나님은 즉석 응답을 하십니다.
여러분,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 답답할 때가 있지요?
그럴 때는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 반드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하늘에서 소리가 난 일이 세 번 있었지요.

한 번은 공생애를 시작할 때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라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공생애 중간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전환점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할 때 다시 한 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중간, 끝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큰 소리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 일은 십자가의 시련을 앞둔 예수님에게 큰 용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시편 29편 1절과 2절 말씀,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이 말씀에 따르시기 바랍니다.

하박국서 2장 14절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우리는 이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힘쓰며 살아갈 때 이런 세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고난주간, 성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주간은 다른 주간과 좀 다르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나라에 강조주간이 많지요. 불조심 강조주간, 저축 강조주간, 독서강조주간, 강조주간들이 많습니다.
이번 주간은 경건강조주간이 되어야합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텔레비전 보는 시간 줄이기, 아예 안 보기, 컴퓨터 게임 시간 줄이기, 아예 안 하기, 커피 안 마시기 이런 사소한 것을 실천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이것을 강조하면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평소에도 자주 그렇게 하셨겠지만 이번 주간에는 무슨 일을 할 때, 무슨 말을 할 때, 무슨 생각을 할 때 ‘이 일이, 이 말이, 이 생각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필터를 설치하고 그것을 통과하지 못한 행동과 말과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통과한 행동과 말과 생각 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이 주간에 드린 이 기도가 또한 여러분과 저의 기도가 되기를 우리를 위해 지금 이 시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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