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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전승 (막 15: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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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승(마가복음 15:16-47절)

한국 권투에 새로운 신화를 만든 사건 중에 '홍수환 선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950년 5월 26일 서울에서 출생한 홍수환은 한국 최초의 2체급 제패라는 기록과 '4전 5기의 신화'를 이룩한 권투선수입니다.

그의 전적을 보면 1974년 7월 3일 '아놀드 테일러'에게 15회 판정승하여 WBA 밴텀급 챔피언을 획득하였고, 동년 12월 28일 '페르난도 카바넬라'를 15회 판정으로 1차 방어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1975년 3월 14일 '알폰소 사모라'에게 4회 KO패로 타이틀을 상실하였고, 1976년 10월 16일 '알폰소 사모라'에게 다시 도전하였으나 12회 KO로 도전에 실패하였습니다.

1977년 11월 26일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3회 KO로 WBA쥬니어 페더급 획득에 성공한 그는 바로 이 경기에서 3회까지 4번의 다운을 당했으나 굴복하지 않고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은 후 마침내 KO로 승리하여 타이틀을 획득하였습니다. 이 기록이 역전승의 신화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8년 2월 1일 유타가 ‘가사하라’를 15회 판정으로 1차 방어에 성공, 1978년 5월 7일 ‘리카르도 카르도나’를 12회 TKO패로 타이틀 상실한 후 계속해서 도전하였으나 결국 타이틀 획득에 실패하였습니다.

50전 41승(14KO) 4무 5패의 전적을 가진 그가 아직도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승리를 쟁취한 후 "어머니"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던 복서의 모습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영원한 국민 마라토너! 마지막까지 투혼을 불사르는 의지의 한국인 국민마라토너! 봉달이! 마라톤영웅! 모두 '이봉주' 선수를 칭하는 말입니다. 방콕에 이어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마라톤 2연패를 달성한 '이봉주(삼성전자)'가 2003년 1월 20일 제8회 코카콜라 체육대상을 받았습니다. '마치 여기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37, 삼성전자)'가 6년만에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며 부활의 나래를 폈습니다.

'이봉주'는 2007년 3월 18일(주일) 오전 8시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을 출발해 숭례문, 청계천, 서울 숲 도심을 달려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 이르는 42.195km 풀코스에서 치러진 2007년 '서울국제마라톤'에서 2시간 8분 4초의 기록으로 '폴 키프로프 키루이(27, 케냐)'를 제치고 1위로 결승점에 골인했습니다.

이로써 '이봉주'는 지난 2001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이후 6년만에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1995년 서울국제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10분 58초의 기록으로 정상에 오른 뒤 12년만에 대회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 날 '이봉주'는 케냐 선수 3명과 30km 지점까지 선두그룹을 유지했고, 35km 지점부터 '키루이'와 2파전을 벌였지만 체력이 떨어지면서 2위로 처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봉주'는 40km를 향하는 지점에서 놀라운 막판 스퍼트를 펼치며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키루이'를 역전시켜 제치는 기염을 토하며 제일 처음 결승선 테이프를 끊었습니다. 이봉주는 개인 통상 35번째 풀코스 완주기록을 남겼고, 한국 선수로는 '김이용(국민체육공단)'이 로테르담마라톤에서 세운 2시간 7분 49초이후 8년만에 가장 좋은 기록을 수립하였으며, 최선을 다하는 선수야말로 진정한 선수라고 말하는 성실한 선수!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그의 의지로역전승으로 보답한 '역전의 이봉주'씨에게 큰??박수를 보냅니다.

오늘 읽어 드린 마가복음 15장 말씀에 보면, 몇 가지 재미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이지만 그 수난 자체보다 그 주변에 있었던 사람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그리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달아 놓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마가는 십자가의 수난이 단순한 수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놀라운 변화와 진리를 동반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증언한 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마가가 로마의 교회에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교회들에게 십자가에는 반드시 놀라운 진리가 담겨 있으며, 그 고난은 곧 능력으로 역전될 것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역전의 사건은 어떤 내용입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십자가를 통한 조롱 속에 담긴 진리를 통해 역전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자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들의 조롱의 말 속에 진리가 있다.'는 역설을 마가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문16절 이하에 보면,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라고 하며, “갈대로 머리를 치고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이 구절을 빼고 기록하여도 아무 지장이 없는데도, 굳이 이 이야기를 써넣은 까닭이 무엇일까요? 거기에는 분명 마가의 특별한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이 모욕적인 언사를 빼 버리고 기록했을 텐데, 어째서 마가는 이것을 그대로 기록하였을까요? 그것은 본문 29절 이하에 나오는 자들과 대제사장들의 조롱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그 부분을 빼 버려도 하등 지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빼 버리면 더 자연스러운 문장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27절의 말씀에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에 이어 32절 하반 절 말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가 이어진다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문장이 됩니다.

그런데 마가는 굳이 그 사이에 조롱 자들의 말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가 이렇게 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마가는 조롱의 말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혹은 희화적으로 그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롱 자들은 여기서 그들의 배역을 잘 수행하고 있으며, 그들은 무의식??중에 예수님의 참된 정체를 증언하는 고백자들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씌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자색 옷을 입힌 것은 자색이 바로 왕의 색깔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자색 옷은 왕이나 고귀한 자가 입는 옷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비록 가시로 만들기는 했지만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웠다는 것도 결국 왕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조롱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장난을 했지만, 사실상 그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진리를 증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진리란 예수님은 홀로 면류관을 쓰시고 모든 사람에게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진실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9절 이하에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에베소서 1장 21절 이하에서도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조롱하는 놀이로 행한 이 의식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증언이었다는 역설로 핵심을 찌르고 있다는 사실을 마가는 보여 주려 했던 것입니다.

본문 29절에서 십자가 형장을 지나가던 행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라고 모욕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심문을 당하실 때 거짓 증인들이 그에게 퍼붓던 말입니다. 그 말을 이제 지나가는 자의 입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외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이 우스꽝스러운 아니 정신 이상자의 말처럼 생각되어 조롱의 말로 사용하였겠지만, 그 말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흘 만에 부활로 연결될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율법에 근거한 낡은 성전은 헐어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어지는 새로운 예배 공동체가 이루어질 것을 저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아니 마가는 저들의 입을 빌려 오늘 고난당하는 교회야말로 새로운 성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초로 한 생명의 공동체임을 확신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 31절에서 대제사장들은 서기관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진리는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실제로 "남을 구원하는 자" 즉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고"고 온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그의 이적을 행하는 능력에 의해 수없이 많이 "남을 구원하였습니다."

또한 32절에서 다시금 예수님을 향해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라고 조롱하였습니다. 마가는 여기서 다시금 제사장이 예수를 심문하였을 때 물었던 질문, 즉 "네게 그리스도냐?" 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조롱 자들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참된 정체를 인정하는 고발 자들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들은 그들 자신이 모르는 가운데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를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모든 인간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깨달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와 그 역사 방법에 머리 숙여 찬양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자신의 구원 역사를 진행시키어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십자가란 잔인한 형틀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과의 화해의 상징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빈틈없는 구원의 역사 앞에 우리는 그저 감사와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따라합시다. "조롱 자들의 말이 사실로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역사가 바로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 움직이도록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떠난다 해도 결국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의 계획을 반드시 이루시며, 그러한 인간의 죄악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원으로 가는 길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면 자기가 승리하리라고 기대를 했지만, 놀랍게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는 길이 되었다.’는 사실에 사탄은 낙망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악이 성하여도 결국은 모든 것이 자신의 뜻으로 귀결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탄이 아무리 간교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깨트리려고 해도 그 자체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일이 되고야 말도록 간섭하시고, 역사하시고 역전 시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 나가는 모든 인간의 역사를 역전시켜 자신의 뜻을 합력하여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틀림없는 섭리를 우리가 두려움으로 바라보며,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이 귀한 찬양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어 지시기 바라며, 공의의 하나님께서 역전승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영광과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십자가를 붙잡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할 줄 믿습니다.


2. 박해자의 신앙고백을 통해 역전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와 같은 불행한 진리의 증언자들과는 달리 처음에는 박해자였으나 십자가를 보고서 변화되어 참된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책임자인 ‘로마 백부장’과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1) 로마의 백부장의 경우

당시 백부장은 빌라도 총독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로마 행정부의 대표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던 순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그가 단순한 죄인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은 초대 기독교 신앙고백 가운데 중심적인 고백입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가장 중요한 용어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명칭이 마가복음의 제목과도 같은 첫 절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예수님의 세례(1:11)와 변화산(9:7) 변모에서 이 명칭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제 수난의 이야기의 정점에서 바로 예수님의 처형을 담당했던 이방인인 로마 백부장의 입을 통해서 이 가장 중요한 명칭을 다시 한 번 더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역전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처형하고 그에 대해 무관심하였던 로마 백부장이 변화되어 바로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가는 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로마가 기독교회를 박해하고 잡아 죽이지마는 마침내 그 로마는 변화되어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게 될 것을 마가는 내다본 것이 아닐까요? 아니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온 인류를 변화시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250년 동안 혹독하게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가 마침내 그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는데 까지 나가지 않았습니까? 이 역전극은 참으로 통쾌하고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역전극은 기독교 2천년의 역사를 통해 계속되어 왔습니다. 오늘도 이런 역전극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무신론을 바탕으로 한 공산주의 국가들에게서도 이런 역전극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련이 변화되고, 동구권이 바뀌었고 중국도 변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역전극은 저 북한 땅에서도 마침내 일어날 것입니다.

2) 아리마대 요셉의 경우

이렇게 변화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존경받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었습니다(15:43). ‘그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의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는 말입니다. 마가는 <산헤드린 의회의 '모든' 의원들이 예수님을 정죄하였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55절에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죄는 분명히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가결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님의 정죄에 찬표를 던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리마대 요셉이 처음에는 예수를 반대하여 그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다가 나중에는 오히려 예수님의 편에 서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게끔 정죄하였던 자가 이제는 반대로 예수님의 장례를 지내 주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막 15:43)가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이전의 요셉과 이후의 요셉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마가는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는 기독교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이스라엘의 전통 종교인 유대교를 따르는 사람들도 마침내는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그런 변화를 통해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진 것을 보면서 그것을 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회피하는 까닭은 어쩌면 기독교회의 잘못 때문이라고 봅니다. 중세 시대에 기독교가 흥왕하던 때, 그들은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라고 하여 그들을 박해하였고, 히틀러는 그들을 6백만 명이나 죽였던 것입니다. 러시아에서도 정교회가 흥왕하면서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이스라엘인들이 기독교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지 이것이 사라질 때 저들도 마침내 변화되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완악한 모든 인간을 뒤바꾸어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가장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 거기에 모든 죄에 대한 대가가 담겼고, 그로 인하여 죄의 권능이 소멸되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던 죄의 권세가 깨어지고 자유가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래서 위대한 능력이며, 놀라운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이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에서 확실하게 증명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룩해 가시는 인류 구원의 역사는 신비하고 오묘한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저질러진 모든 역사까지 합하여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고 계신 것임을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배반의 역사를 역전시켜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이런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수난의 자취를 보여주는 복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구원의 역전극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에서 마가는 놀라운 역전을 보여 주며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종려 주일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며, 주여 부디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외친 그 함성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참된 메시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극심한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승리의 찬송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고난을 승리의 과정으로 볼 수 있는 신앙을 우리에게 심어 주는 것입니다. 이제 잠시 이 땅에 악한 세력이 판을 치는 것 같고, 악인이 형통하며, 마귀 사탄이 잠시 이기는 것 같지만 믿음으로 사는 성도에게 때로는 어려움과 고통과 실패와 질병과 위기가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역전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려 주일 왕으로 입성하였으나 그를 다르던 무리들의 배반으로 십자가의 조롱과 멸시, 예수님의 죽으심의 자리에 가겼으나 오히려 메시야 되심을 부활로 상황을 역전시켰고, 참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는 반드시 최후의 승리자가 될 줄 믿습니다.

'모든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으로 완성된다.'는 신앙과 소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하며, 전도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한 도구로 살 수 있기를 바라며, 무엇보다 승리의 부활을 기다리며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충성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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