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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압살롬과 다윗 (삼하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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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과 다윗 
삼하18:5-9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성자일수록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 생각하며, 도덕적으로 겸손하게 살고, 적당하게 나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자기는 별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제일 악한 사람은 자신이 제일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멕베드, 햄릿, 오셀로, 리어왕) 중에 하나인 멕베드는 스코틀랜드의 장군인데 스코틀랜드 왕 당컨을 암살하고 자신이 왕이 됩니다. 후에 자살함으로 인생을 마감하지만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두려움 때문에 고백하기를 “세상에서 제일 좋은 향수를 가져다가 우리 손을 씻어도 죄를 씻을 수 없고, 어떤 망각제를 먹어도 죄를 없이 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말씀하셨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은 그 죄에 대한 심판이 너무 괴로워 이렇게 말합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4:13) 이렇게 죄 없는 인간은 없으며, 따라서 죄를 지은 인간은 그 마음에 평안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다윗을 거역하고 왕위를 찬탈한 압살롬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켜 주시지 아니하였더라면 악독한 압살롬의 칼날에 다윗은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악독해 질 수 있는가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무한한가를 배우게 됩니다.

1. 욕망의 노예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신문 지상이나 매스컴을 통해서 반인륜적인 패륜아적인 사건들을 많이 접해 봅니다.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부모를 살해하는 그런 자식들이 있는가 하면 부모 모시기가 싫다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내다 버리는가 하면, 보험을 수령하기 위해 보험을 들어 놓고 청부살인을 하는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집니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짐승이 따로 없어! 그게 짐승이지 사람이야?!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어!!”

오늘 본문의 압살롬도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물론 가정적인 아픔은 있었습니다. 다윗의 큰 아들 암논에게 자기의 사랑하는 여동생 다말이 겁탈을 당한 것에 대해서 분하고 억울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여 아버지의 왕위를 노리고 반역하고 역모를 꾀하였습니다. 아들 압살롬에 반역으로 전쟁의 영웅인 다윗이 벗은 발로 울면서 도망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의 후궁들을 백주(白晝)에 윤간하는 패륜을 저지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을 한 것도 욕망 때문이었으며,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범한 것도, 압살롬이 살인과 패역을 저지른 것도 모두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다 욕망으로 시작된 일들입니다.

첫째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람이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특별히 압살롬에게 있어서는 권력을 향한 욕망이 부모자식도 모르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욕망으로 눈이 멀게 되면 더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하는 불행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소중한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지 못합니다. 욕망의 헛된 것을 잡고 있는 동안에 정말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관계가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오히려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욕망에 사로잡히면 관계가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아담도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욕망 때문에 하나님과 에덴동산을 잃어버렸습니다. 압살롬은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셋째로 인간의 비극은 이 욕망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사의 비극은 더 높아지고, 더 많이 차지하고, 더 가지려 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는 욕망 때문에 일어납니다. 아버지 보다 더 높아지려는 압살롬은 욕망 때문에 아버지를 배신하고,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었습니다. 또한 아버지보다 자기가 더 큰 권세가 있다는 의미로  피하지 못한 후궁들을 대낮에 공개적으로 범했습니다. 정말 동물 같은 짓입니다. 욕망은 이렇게 사람을 동물같이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이 욕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 욕망은 결국 참담한 실패를 가져옵니다.

압살롬은 피를 흘리며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보좌에 앉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입니다. 원하던 왕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습니까? 아버지의 후한 때문에 두려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수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고 뒤를 쫓았습니다. 그러나 철없는 욕망 덩어리, 신출내기가 역전의 용사 다윗을 당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에브라임 수풀에서 압살롬의 군대는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환궁하고 압살롬은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노새를 타고 도망가다가 상수리나무 아래를 지날 때, 그만 압살롬의 화려하고 자랑하던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의 창에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 말씀대로 된 줄로 믿습니다.

함께 삼하18:9절을 봉독하도록 하시겠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과 마주 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리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 나간지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압살롬의 머리털이 상수리나무 가지에 걸렸다.’는 말씀과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 나갔다.’라는 말씀입니다.

첫째로 ‘압살롬의 머리털이 상수리나무 가지에 걸렸다.’는 말씀입니다.

압살롬이 상수리나무 가지에 걸렸다고 했는데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렸다는 말인지, 아니면 압살롬이 자랑하던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렸다는 말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압살롬의 머리털이 걸린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Wycliffe Bible Commentary) 사랑하는 여러분! 압살롬은 그 머리털을 얼마나 자랑했습니까? 압살롬의 머리털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빨리 자라고 숱이 많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머리털은 힘과 미(美)의 상징이었습니다. 빨리 자란다는 것은 힘의 왕성함(삿16:17)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압살롬은 백성들의 인기와 사랑을 한 몸에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 자신도 그 머리털 때문에 한 없이 교만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머리털 때문에 압살롬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망하고 만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 세상의 자랑거리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둘째로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 나갔다.’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노새는 구약 시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대개 왕족이나 귀족들이 이용하던 운송 수단이었습니다.(삼하13:29) 따라서 압살롬이 탔던 노새는 왕위를 상징하는 노새입니다.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자 노새는 이 틈을 타 자연스럽게 빠져 나갔습니다. 이 틈에 다윗의 군대장군 요압의 창에 맞아 그는 참담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노새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왕위를 빼앗으셨다는 뜻입니다. 매달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대에 형벌을 받기 위하여 서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권력을 향한 압살롬의 집착은 이처럼 비참하고 참담한 최후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욕망의 늪이요, 그 최후는 비참한 것입니다. 인간이 물질과 권력과 명예 그리고 세상 것을 탐하면, 그 결과는 이런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지지와 도우심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압살롬의 최후같이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것을 모르고, 불의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세상의 물질과 권력과 명예를 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욕심과 욕망은 반드시 ‘죽음으로 끝난다.’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찾아 가고 있습니까? 엡2:2,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 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렇게 살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옛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살길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 내 허물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인 줄로 믿습니다.(엡2:3,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할 때에 죄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할 때, 마귀에게 종노릇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직 모든 욕심을 다 버리시고 자기를 낮추시되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자기를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만이 이 욕망을 이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길이 바로 축복의 길인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끝으로 망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같으면 압살롬을 용서하시겠습니까? 이런 패륜아도 용서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압살롬을 욕하고 그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할 때, 아버지인 다윗은 달랐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신하들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삼하18:5절을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뭐라고 합니까?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 자기의 후궁들을 범하여 가정의 질서를 깨뜨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권을 찬탈하고 국가의 질서를 깨뜨렸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아버지마저 죽이려고 군대를 거느리고 쫓아오는 아들에 대해서도 연민의 눈물을 흘립니다.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삼하18:5)고 신신당부를 합니다.

다 ‘그런 놈은 사람도 아니라’고 하는데! ‘그런 놈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는데! 그런 자의 죄는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여론이 일어나고 있는데! 아버지는 그를 용서하고 살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자기의 신실한 군사들이 다 죽어도, 그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도 아버지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생명이 더 소중했습니다. 어쩌면 아들이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기만 하면, 용서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아무리 자기를 짓밟고 죽이려는 패륜아와 같은 아들이지만, 그 아들에 대해서 끝까지 연민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야망을 채우는데 방해가 된다고 아버지를 제거하려는 압살롬을 그래도 아들이라고 자기 부하들에게 “너그러이 대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압살롬이 자기 부하들에게 살해당했을 때,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18:33) 하면서 울부짖으며 괴로워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이 다윗의 마음이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자신이 죽었더라면 하고 울부짖는 다윗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달리셔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호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모쪼록 사랑하는 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여기에 압살롬이 누구일까요? 아니 우리는 압살롬보다 더 나은 사람들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지 아니하였다면 우리는 압살롬보다 더 무서운 죄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처럼 허물 많은 더러운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 세상에서 승리의 삶을 살게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때문인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부디 그 사랑 때문에 큰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계속해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윤정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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