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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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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단테의 신곡 연옥편에 보면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계단을 오르는 벌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짐은 너무 무거워 허리가 휘어 땅에 닿을 정도이고 눈을 들어 사람도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바로 교만한 자가 받는 형벌입니다. 그 사람들 중 하나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 거만한 목덜미를 누르는 바위로 인해서 종일 머리를 숙이고 있어야 하네” 우리도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겸손을 연습하여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도무지 허리를 굽힐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만은 허세입니다. 자기 자랑이며 자기 부풀리기입니다. 교만은 마치 풍선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빵빵해 보이는데 속은 텅 비어 있습니다. 이런 교만은 자부심 또는 자존심과는 구분됩니다. 우리 주변에 자존심이 센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존심은 자기 긍정이요, 자기 존경입니다. 저는 자기를 존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라는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대단한 일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나란 존재는 특별하고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존경받고 있다는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자부심은 세상의 어떤 위력이나 고난 앞에서 자기를 지키게 하는 힘입니다. 요즘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소외 되고 위축되기 쉬운 현대인들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저는 그래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가 자녀들에게 잠자리에서 나누었던 다음과 같은 대화는 오늘날에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누구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너희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니?”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 일을 시켰니?” “하나님께서 시키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자존심과 자부심은 필요하지만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겸손하여야 합니다. 즉 내적으로는 자기를 지키되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부드럽고 겸손하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부풀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상대방을 수용할 태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 인생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차단막을 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내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지 않은 척 더 허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이 허세가 상대방을 괴롭게 하고 또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자부심과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들을 향하여 한없이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을 우리는 그분의 겸손함이라고 부릅니다. 빌립보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7-9)

자기를 비었다, 종의 형체를 가졌다,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자기를 낮추셨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이 모든 단어들은 예수님의 지극히 겸손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높고 높은 하늘 보좌 위에만 계실 때에는 유한하고 죄 투성이인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자세를 낮추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낮추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스스로를 높이고 있으면 접근할 수 없습니다. 물은 낮은 곳을 향하야 나아가고 모이듯 사랑도 교만한 곳이 아니라 겸손한 곳을 향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만함에 대해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은 바울이 사랑에 대한 어떤 불변의 진리를 전하려고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고린도 교회의 자기 자랑에 대해서 나누었는데 고린도 교회는 교만함의 문제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교만과 관련된 문제는 고린도전서 4장에서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4장을 중심으로 교만이란 무엇이고 이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말씀들을 보며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1) 첫째, 교만은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2차 선교 여행 때 1년 6개월을 유하며 개척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직업적으로 또는 단순한 사명감 정도가 아니라 아비의 심정으로 개척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4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 아비의 심정으로 목회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산고의 진통을 겪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웠고 그들을 양육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수고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4:11-13)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세우기 위해 자신은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았으며, 마치 만물의 찌꺼기 같은 취급을 당해도 자기 자존심을 덮고 살았다는 고백입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얻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제자로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부모들이 실제 그렇지요.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해서 다 내어줍니다. 자녀들을 위해서 자기 직장이나 꿈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존심도 내려놓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 엄마들은 참 눈물겨워요. 아이들 학원에 보내고 공부시키기 위해 식당 청소나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엄마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수고를 다 감당했기에 사도 바울은 너희를 내가 복음으로 낳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산고의 고통 가운데 낳았던 고린도의 일부 성도들이 바울을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3절입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도 나 스스로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로 바울을 판단했는지는 이후의 고린도후서에서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된 판단은 바울은 정식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정식으로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도 아니요, 예루살렘에서 파송 받은 공신력 있는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 편에서 보면 정말 미치고 펄쩍 뛸 일입니다. 자기의 사도권에 대한 문제도 부당할뿐더러 내 속으로 낳고 기른 자식이 자기를 배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의 교만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 가운데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다 타락의 길을 걷게 된 아담과 하와의 경우와 같다할 것입니다. 포도원을 사고 아름답게 꾸미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어서 그 경영을 청지기에게 맡겼는데 그 청지기가 주인을 몰아낸 것과 같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깊은 상처는 배신의 상처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할 때는 그 상처가 오래 갑니다.

그러나 이토록 배은망덕한 그들을 향하여 바울은 판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궁극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4장 5절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여러분 다른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지 마십시오. 판단한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 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은 게으르다, 이기적이다, 악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판단은 우리 자의적인 판단일 경우가 많습니다. 나와 다르다는 점 때문에 싫어하고 판단하는 것이지요. 내가 너무 부지런하고 청결하고 일을 보면 즉시 처리해야 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게을러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그 사람은 신체 리듬상 하루에 8시간 이상을 자야 몸에 피로가 쌓이지 않는 유형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강제로 부지런하게 만들면 병납니다.

또한 아무리 악인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그렇게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알고 난 연후에는 우리는 그를 섣불리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가 그런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아픔을 알게 되거나, 혹 그 집에 갔다가 어린 자녀들의 눈망울 보게 되거나, 나이 들고 병든 노모를 보고 난 연후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시며 하셨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8:11) 주님도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권리와 자격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겠습니까? 판단은 하나님 몫입니다. 우리가 남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교만입니다.

바울은 또한 자기 자신도 판단하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4장 3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실수가 많고 연약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싫어지고, 나는 쓸모없는 존재라거나, 나는 무능하다든지, 나는 믿음이 없다든지 판단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도 중지하십시오. 내 자신에 대한 판단 또한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내 속에 있는 생각과 마음이지만 내 자신도 속을 때도 있습니다. 내 인생이지만 내 계획 한 대로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 자신에 대한 궁극적 판단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내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판단하는 것도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교만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너무 쪼지 말고 그냥 가만 놔두세요. 자꾸 건들면 우리 자아도 화를 내고 또 반대로 좌절하거나 낙망하기도 합니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지켜보기만 하세요. 마지막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2) 둘째, 교만은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서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교만은 계시된 이 성경 말씀 밖으로 넘어서려는 행위입니다. 사도바울은 4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말씀을 넘어서려 할 때 우리는 교만해집니다.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는 하나님 말씀을 의시하고 넘어서려 했을 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이 침투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나 복음으로 말미암은 자유함, 또 넘치는 헬라철학으로 말미암아 말씀 밖으로 나가려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이나 지식을 성경 말씀 안으로 제한해야 합니다. 66권 성경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고 또 평생을 다 드려도 그 뜻을 다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이단들이 생기는 이유는 기록된 말씀 밖으로 나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 앞에 겸손히 무릎 꿇기보다는 무언가 더 새로운 것이 있는 것처럼, 성경은 마치 부족한 것처럼 생각할 때 교만이 침투하고 우리는 진리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또한 우리 인생이 어렵고 곤고할 때 성경에는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할지 다 말씀되어 있습니다. 충분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이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다른 곳에 해답이 있는 것처럼 헤매고 또 이곳에는 나의 이 어려움을 돌파할 수 있는 열쇠가 없는 것처럼 외면합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6-17절에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우리가 가야할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잘못된 길을 갈 때는 책망의 말이 있습니다. 그릇된 것을 고쳐 바르게 하며 의로 교육하여 우리 인격을 온전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사람들에게만 말씀합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다른 데서 보다 하나님 말씀 앞에 돌아오십시오. 이 말씀을 가지고 씨름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말씀을 사랑하는 자요 말씀 앞에 무릎 꿇는 자입니다.

3) 셋째, 교만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있는 채 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풍선처럼 겉으로는 허세를 부리지만 속은 비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4장 18-20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우리는 너무나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백 마디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번의 실천입니다. 병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나 치료 방법에 대한 해설보다 비록 말은 어눌할지라도 그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있는 척 하는 것이 교만이요 허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직에 대해서 평가할 정도라면 자신들이 사도 정도의 능력이나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말로 그치는 비판,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고 있다면 사도 바울은 그것을 교만이라 하고 있습니다.

무디가 한 번은 말씀을 전하고 내려왔는데 어떤 지성인인 듯한 분이 무디를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는 무디의 설교중 문법이 틀리고, 단어가 부정확한 곳을 몇 곳을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무디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말에는 비록 졸하나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당신은 그 정확한 문장으로 몇 사람이나 구원시켰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차라리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4) 넷째, 교만은 말씀을 범하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지는 5장에서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전5:1-2)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는 것은 아마 죽은 아비의 소실이나 첩을 취한 경우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기록이 왕왕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불의함과 반인륜적인 모습을 보고도 교회가 그들을 책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범죄 한 사람이나 그것을 방치하는 자나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만홀히 여겼다는 증거입니다. 교만한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교만한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교회가 멸시 당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에서 벗어나 있는데도 통한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거짓말을 하든 불의한 방법을 쓰든 그 위기를 벗어나거나 원하는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자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분란이 일어나면 세상보다 더 합니다. 교회당을 점거하기 위해 온갖 불법과 폭력이 동원됩니다. 교회 재산을 마치 사유재산이나 되는 것 마냥 세습하고 유용해도 이를 못 본 채 합니다. 이에 대해 반대한 사람들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교회에서 쫓아내고 맙니다. 작은 소자 한 사람을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 더 낫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무신론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과감히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실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교만한 이유

바울은 이들이 교만한 이유는 자기들 것은 원래부터 하나도 없고 다 받은 것인데 그 은혜를 잊었기 때문이라 말씀합니다. 4장 7절입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고린도교회는 그리스의 남북을 잇고, 동서 바다를 잇는 곳에 위치한 항구도시입니다. 옛날 교통의 요지나 항구도시가 그렇듯이 고린도교회는 우상과 음란의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인 같다’ 하면 ‘음란하다’는 말과 같고, ‘고린도 여자’ 하면 창녀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유명한데 이곳에서 일하는 성창만 해도 1천 명에 이르던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보내셔서 고린도 교인들을 우상과 음란으로부터 구해내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배가 불러 은혜를 잊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진 것이 우리 것이라 생각할 때 우리는 교만해집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며,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도 순전히 내 노력만의 결과가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사랑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겸손해질 수가 있습니다. 물질에 대해서 내가 벌었다고 생각하면 교만해지고 인색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요 선물이라 생각하면 이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사용하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베풀면서도 내가 가진 것을 준다는 생각이 아니라 나도 거저 받은 것인데 그 중 일부를 돌려준다는 마음으로 행하기에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서 오히려 겸손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도우면서도 겸손히 도울 줄 알아야 합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은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당시는 우상이 없는 곳이 없었습니다. 시장에서 내다파는 음식들은 대부분 우상의 제물들이었습니다. 가뜩이나 고린도 교회처럼 우상이 많은 곳은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 믿음이 있는 자는 이런 음식들을 개의치 않고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또 우상의 재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더 이상 다른 신은 없습니다. 우상은 없고 그 제물은 단지 중립적인 음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이 연약하거나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아직도 하나님과 우상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는 자들이 거리낌 없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 덩달아 먹다가 나중에 양심에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과 겸하여 우상을 믿어도 괜찮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자유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자유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거나 연약한 자를 실족케 한다면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13)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지식에는 사랑이 함께 해야 온전해집니다. 많이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쉽고, 또 나의 자유함으로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함의 비밀을 아는 자지만 형제를 위해서는 그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결코 교만하거나 다른 형제를 자기 지식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성 프란시스의 예화입니다. 성 프란시스의 수도원이 모두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금식이 힘들었던지 누군가가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훔쳐 먹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주방을 맡은 수도사가 프란시스에게 와서 누가 부엌에서 음식을 훔쳐 먹었다고 하며 그런 자는 수도원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프란시스가 그 음식을 내어 오라고 하더니 모두에게 먹으라고 명령합니다. 잘못을 드러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그로 말미암아 한 형제를 실족케 하느니 금식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 날카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부드러워지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헤아릴 수 없는 계획과 인도하심 앞에 우리는 단지 찬양과 영광만을 돌릴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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