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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낭비 (요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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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난하지만 너무 너무 뜨겁게 사랑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내일이 성탄절인데, 부인은 사랑하는 남편에게 무슨 선물을 줄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 재산이라곤 1달러 87센트(우리나라 돈으로 약 2,000원)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짐과 델라, 이 부부에게는 두 가지 커다란 자랑거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남편 짐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금시계이고, 하나는 부인 델라의 머리칼이었습니다. 순간 부인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모자를 쓰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로 나갔습니다. 이발, 미용 용품 판매점에 가서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금발의 머리카락을 잘라 20달러를 받고 팔았습니다. 그 돈으로 남편의 금시계에 안성맞춤인 백금으로 된 시계줄을 샀습니다. 이제 이 시계줄을 금시계에 달고 다닐 남편을 생각하면 빡빡머리가 결코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돌아온 남편은 성탄절에 아내에게 줄 선물로 거북껍질에다가 보석을 입힌 멋진 머리핀을 사왔습니다. 부인의 머리칼에 너무 잘 어울릴 빛깔의 머리핀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와 아내를 보는 순간 그 아름다운 머리핀을 꽂을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한편, 아내는 자신을 보고 멍하니 서 있는 남편을 부릅니다.
“여보, 당신의 금시계를 이리 줘봐요. 당신의 금시계에 잘 어울릴 백금 시계줄을 사왔어요.”
아뿔사. 남편은 아내의 거북껍질로 만든 고급 머리핀을 사기 위해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금시계를 팔아버렸던 것입니다.

오 헨리가 쓴 <매기의 선물> 혹은 <크리스마스 선물>로도 번역된 소설입니다.
서로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낭비해버린 것, 이것을 누가 낭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순전한 사랑에는 계산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때때로 낭비가 필요합니다. 연애하는 데도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사용하는 시간, 물질은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의 낭비입니다. 계산하는 사랑, 깍쟁이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2. 오늘 성경말씀에 등장하는 나사로의 집안은 조금 독특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이 나사로이고 그 여동생들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 예수님께서 잡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베다니에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마르다는 잔치 준비하느라 바쁘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고,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잔치는 나사로의 집에서 열렸다고 보는 게 개연성이 높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는 나사로 집안 형제 자매들의 훌륭한 믿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 들르신 사건이 세 번이나 기록될 정도로 나사로를 사랑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사로 집안은 신앙의 명문가임에 틀림없다고 봅니다. 당시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등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나사로와 그 자매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름이 자주 언급된 것을 보면, 나사로와 그 자매들이 얼마나 훌륭한 신앙의 명문가였는지 여실히 입증해줍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1장에서는 나사로가 죽어서 송장이 된지 나흘 째 되던 날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이후, 오늘 본문 12장에서 예수님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인 기사가 나온 것을 보면, 저자 요한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나사로와 같은 믿음의 명문가가 되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사로와 그 자매들인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름은 몇 번 등장하지만, 나사로의 아내나 자녀들, 마르다의 남편 혹은 마리아의 남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것을 보면, 나사로와 두 자매들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임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모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부모님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셨음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나사로의 집안은 어려운 집안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실만큼 훌륭한 믿음의 가문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가난해도 믿음의 명문가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이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앞둔 시점에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왜 잔치를 벌였습니까?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서입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났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나사로의 집안이 믿음의 명문가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점입니다. 받은 은혜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의 가문이었습니다. 세 사람이 모두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예수님을 접대했습니다. 마르다는 음식을 잘 만드니까, 부엌에서 일을 하여 예수님 드실 음식을 접대하였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음으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가장 소중히 여기는 향유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여기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순전한 나드 한 근이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향유가 얼마나 고급향유인지 300 데나리온이나 값이 나갔습니다. 1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300데나리온은 주일은 일할 수 없으니 제하고 1년 연봉에 해당합니다. 1년 연봉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당시 처녀들이 보관하고 있던 향유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결혼폐물입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머리털은 여자에게 있어서 아주 소중한 부분이 아닙니까?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는 것은 곧 존경과 겸손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룟유다는 이것을 보고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이 값진 향유를 허비하느냐?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줘야 할 게 아니냐?” 라고 말입니다.
가룟유다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말 같습니다. 한 사람의 발에 부어 허비하느니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는 게 훨씬 낫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나의 죽음을 예비한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낭비로 보이는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마26:13) 라고 크게 칭찬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가룟유다가 알지 못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나사로와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돈 밖에 없었습니다. 6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죽은 사람을 살려주신 은혜, 이 은혜는 생명 다 바쳐 감사드려도 부족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드린 값진 향유는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 곧 신앙의 표현이라는 것을 “순전한 나드 한 근”이란 부분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의 “순전한” 이란 표현은 헬라어로 pistikos 인데, 믿을만한, 신실한, 혹은 순전한 이라 번역합니다. pistikos는 pistis(믿음)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예수님께 나드 향유를 드린 것은 믿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을 믿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 받은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합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pistis,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1956년 1월, 미국의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은 네 명의 친구들과 함께 남미 에콰도르 아마존 유역에 살고 있는 가장 악명높고 접근하기 힘든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선교사로 자원하여 갔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제대로 전해보지도 못하고 원주민의 창에 찔러 순교하였습니다. 아우카 부족은 수백년 동안 외부인들을 죽여왔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도 엘리엇과 친구들은 불과 스물 여덟살에 모두 살해되어 강에 버려졌습니다. 당시 <라이프>지에는 이 비참한 사건을 장장 10페이지에 달하는 기사로 다루었습니다. 헤드라인이 이러합니다. “What an unnecessary waste!"(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

세상의 가치와 안목으로 판단하면 당연합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이 인생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갓 결혼한 아내의 뱃 속에 아이를 두고 처참히 죽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기자들에게 정색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남편의 죽음은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온 생애를 이것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이 시간을 위해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늘이 주신 자기의 책임을 수행하고 생의 목표를 달성하고 죽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4. 여러분이 이 시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시간낭비입니다. 6일동안 힘들게 일하고 쉬는 날인데, 이렇게 아침부터 나와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 라고 말할 법도 합니다. 차라리 골프를 치는 게 훨씬 사업에 유익합니다. 가게 문을 여는게 돈 버는데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왜 문을 닫고, 사업상의 골프 약속도 하지 않고, 피곤한데 집에서 쉬지도 않고 예배드립니까?
Marva J. Dawn(마르바 던) 이란 미국 학자가 쓴 예배에 대한 책이 있습니다. <A Royal Waste of Time 고귀한 시간 낭비> 입니다. 이 책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배는 시간 낭비다. 그런데, 고귀한 시간 낭비다.”  왜 고귀한 시간 낭비냐 하면, 예배 속에서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빛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에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영광의 시간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신24: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하나님께서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추수할 때에 곡식단을 나르다가 한 단을 빠뜨리고 왔거든, 다시 돌아가서 가져오지 말고 내버려두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등 가난한 사람들이 먹도록 내버려두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낭비입니다. 바보같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 낭비는 거룩한 낭비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과소비의 반대말은 절약이 아니라, 거룩한 소비입니다. 근검절약은 필요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낭비를 위한 근검절약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이 죽은 후, 간호사 훈련을 받고 1년 후 아우카 부족의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아우카 부족은 외부에서 들어온 남자는 죽여도 여자는 죽이지 않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5년간 이 부족과 생활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5년 뒤 떠나려는 엘리자베스에게 파티를 열어주며 추장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당신들이 죽인 그 남자의 아내입니다. 남편이 가지고 있었던 당신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나는 이곳을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짐 엘리엇이 살해당한 지 수십년이 지난 후, 그들이 죽은 마을에서 수 백개의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엘리엇이 죽고 난후 태어난 유복 아들이 그곳 교회의 목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장로와 교사로 교회를 섬기는 이들이 바로 엘리엇과 그의 네 친구들을 죽였던 원수들이라는 것입니다.

짐 엘리엇의 순교는 결코 안타까운 젊은 피를 낭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피가 수백개의 교회라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거룩한 낭비는 반드시 30배, 60배, 100배 열매맺게 되어 있습니다.

5.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보다 더 비경제적인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구원받고 안 받고는 예수님께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스스로 만족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고, 아무 부족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위하여 죽으심으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유익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경제적으로 따지지 말고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나눠주지 않으렵니까?
우리가 받은 복음의 감격을 불신 친구들과 이웃에게 나눠주지 않으렵니까?
우리 교회 근처의 어느 교회 남자 집사님은 자동차 시트를 판매 시공하는 사업을 하십니다. 그분은 한 분이라도 더 전도하기 위하여 탁구동호회를 조직하여 불신 탁구동호회원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고, 자기의 전도대상자들에게 자동차 시트를 무료로 교체해주면서까지 사랑을 베풀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낭비입니까? 그렇습니다. 거룩한 낭비입니다. 그 수고와 낭비로 한 사람으리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 낭비는 거룩한 낭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귀중한 시간, 재능, 능력, 물질을 정말 가치 있는 일에,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교회 봉사에, 이웃의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일에 낭비해보지 않으렵니까? 거룩한 낭비, 거룩한 낭비, 이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낭비요, 믿음의 명문가를 세우는 거룩한 낭비입니다.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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