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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은 우리의 희망 (요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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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면 그대로 자멸하고 맙니다. 런던의 랍비인 휴고 그린 씨는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집단 수용소에서 겪었던 뼈아픈 고난의 체험담을 전후 독일의 [데르 모르겐]잡지에 이렇게 기고했습니다.

[그날은 1944년 몹시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사실 집단 수용소에 달력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감금되어 있었던 저의 아버지께서 저와 몇 친구분들을 데리고 수용소 건물 한 구석으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날이 유대인의 명절인 [하누카의 저녁]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우습게 생긴 진흙 주발을 내어 놓으시더니 수용소에서 좀처럼 구하기 힘든 귀한 버터 기름을 녹여서 심지를 적셔 촛불을 대신하여 불을 켰습니다.

아버지가 송축 기원을 말씀하시기 전, 저는 아버지께 그 귀한 버터기름을 먹지 않고 낭비하는 데에 대하여 항의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가만히 보시더니 버터 기름을 가지고 초를 만들어서 붙여 놓은 불빛을 보신 후에 [네가알고 내가 알듯이 사람은 밥을 먹지 않고도 3주간을 살 수가 있어, 우리는 한때 물을 먹지 않고 3일동안 살아 있었다. 그러나 너와 내가 알다시피 사람은 희망이 없이는 살 수가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그 어떤 절망적인 환경 가운데서도 희망을 찾아 몸부림 칩니다. 사람은 가슴 속에 희망이 있으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에게 영원한 희망을 준 사건 이었습니다. 이 지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희망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이요 인류 역사는 깊은 어둠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절망을 체험했던 제자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4:17)고 외치신 후 죄인을 용서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절망에 처해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모여 들었습니다. 초자연적인 권능과 하나님 나라의 진리로 예수님의 인기는 이스라엘을 진동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선택받은 자긍심과 그것으로 한자리하겠다는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곧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독립되고, 성경의 예언대로 메시아 왕국이 건설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설레임을 갖고 그들은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후 순식간에 예수님의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기가 막힌 사건이 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크게 실망한 가롯 유다는 실망이 분노와 배반으로 변해 급기야는 예수님을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강도들과 함께 처형당했습니다. 제자들은 여기에서 꿈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앞날의 희망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런데다 서슬이 퍼런 로마군인들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다 잡아서 멸하려고 했습니다.
이러므로 바깥 출입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의 절망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처참한 절망이었습니다.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부활 그리고 희망 또 희망
과연 이 절망적인 제자들에게 희망의 빛이 비칠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죽었고 첫날이 지났지만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희희낙락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지 이틀이 되었어도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은 빌라도의 명령을 받은 로마의 정예 군인이 창검을 들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틀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자 원수들은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이 땅에서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흘째 아침이 되었습니다. 여자들은 슬픔에 꽉 들어찼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시체에다가 향유나 듬뿍 뿌려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른 아침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 그리고 여러 명이 여자들이 새벽 일찍 예수 그리스도께서 묻히신 산을 향해서 올라가기 시작 했습니다. 산 언덕을 올라가면서 그들은 [무덤의 문을 막고 있는 큰 돌을 어떻게 옮겨 놓을 수 있을까]하고 서로 염려했습니다. 이런 걱정을 하면서 올라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놀랐고, 그들의 발걸음은 멈췄습니다.

그때 바위가 굴러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한 줄기 섬광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산으로 올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장사지낸 곳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그랬더니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고, 그 돌위는 빛난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그는 보통 사람 같지 않고 천사 같았습니다. 그리고 무덤 문을 지키던 로마 군인들은 얼굴이 창백하여 죽은 사람같이 되어서 창검을 버리고 이리저리 도망치고 있 었습니다. 여자들은 너무 놀랐습니다. 여자들은 영문을 몰라 무덤 가까이 나아가서 무덤안을 들여다 보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 천사가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구나 예수님께서는 이 안에 계시지 않고 이미 부활하셔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

여자들이 그 안을 들여다 보니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기쁘고 놀라 그길로 뛰어들었스빈다. 제일 젊은 막달라 마리아가 있는 힘을 다해서 뛰어 베드로와 요한이 있는 집으로 가고 다른 여자들은 또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뛰어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말하자. 베드로와 요한도 무덤을 향하여 뛰었습니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기 때문에 베드로보다 앞서서 뛰었습니다만 무덤가에 와서는 겁이 나서 들어가지 않고 쭈뼛쭈뼛 들여댜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곧장 뛰어 들어갔습니다. 가 보니 과연 예수님이 누웠던 자리에 시체는 온데 간데 없고 수의만 포개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일 누가 훔쳐갔다면 수의를 벗겨 깨끗이 포개 머리맡에 두고 갈리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럴때 막달라 마리아는 빈무덤에 혼자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뒤에 그림자가 홀연히 비쳤습니다. 동산지기로 안 마리아는 [선생님, 우리 주님을 어디다 갖다 놓았습니까? 갖다 놓은 곳을 알려 주시면 내가 그 시체를 가져가겠습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마리아여]하는데 음성이 자기가 익히 듣던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너무 반가워 예수님을 안으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뒷걸음을 치면서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하라 (요한복음 20:17)고 말씀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것을 보고 뛰어 내려가는데 예수님께서는 벌써 다른 여자들이 가는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와서 [평안하뇨] 라고 말씀하시자 여자들이 놀라며 그리스도의 발 앞에 엎드려 그 발을 잡고 경배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두 제자는 낙향해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들과 함께 가면서 [당신들은 왜 그렇게 슬퍼합니까? 왜 그렇게 절망적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니 여보시오, 오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 못 들었소? 예수님께서 사흘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는데 어떤 여자들은 말하기를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부활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같이 가던 분이 성경 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는데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분에게 여관에 함께 유숙할 것을 청해 같이 지내기로 했습니다. 저녁식사를 함께하는데 이 분이 음식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는데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 보니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이란 것을 알자 마자 예수님께서는 사라지셨습니다. 이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가던 길을 멈추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서 보니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 흥분하여 들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놀라 무서워하자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누가복음24:383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제자 도마가 없었는데 나중에 들어와 이 이야기를 듣고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여드레 후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고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 20:27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있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한복음 20: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후에 예수님께서 또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를 비롯한 여솟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마음과 달리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밝아지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나타나 [얘들아,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한복음 21;5)라고 물으셨습니다.제자들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요한복음 21:6)고 말씀하셔서 제자들이 그렇게 하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요한이 [예수님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웃옷을 걸쳐 입고 물 속에 뛰어들어 헤엄쳐 나갔고, 다른 제자들은 그물을 끌고 해변가에 나오니 예수님께서 이미 숯불에 고기와 떡을 구워 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배반한 베드로의 상처입은 마음을 치료해 주시고 그 일곱 제자를 모아 놓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께서 산 위에서 열한 제자를 또 만나 천국에 대한 교훈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감람 산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5백여명에 이르렀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 그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 서는 그들에게 복 주시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성경에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사도행전 1:1-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해받으신 후 사십일 동안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느 장소, 어느 때에 나타나실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확실한 증거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또 초시간적, 초공간적으로 나타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어느 곳에서나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어느 곳에서나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20)는 말씀을 확증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초시간적으로 초공 간적으로 초역사적으로 주님께서는 어느 시대든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 주십니다.


부활의 현재적 의미
그러면 부활의 현재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부활의 현재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죄에서 영원히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증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 즉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뿐 아니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이어받은 원죄까지도 주님께서 다 그 빚을 짊어지시고 죽음의 감옥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감옥에 들어가신 것은 당신의 죄 값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나와 같은 죄인의 빚을 갚기 위해서 들어가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죽음의 감옥에 들어가셔서 우리의 죄의 빚을 갚지 못하셨다면 구세주가 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소위 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 종교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죽음의 감옥에 들어가서 죄의 빚을 갚지 못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위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악의 빚을 다 짊어지시고 감옥에 들어가셔서 사흘 만에 그 빚을 다 갚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모든 죄가 눈 녹듯이 녹아 버리고 맙니다. 이 때문에 누구든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예수님 앞에 나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죄용서를 받고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죄의 채무를 벗어 버리고 의로움의 의복을 받아 입고 하나님의 앞에 부끄럼없이 설 수 있는 확실한 은혜 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것 없이 모두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부활의 현재적인 의미는 무의미의 삶에서 영구히 벗어 났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모두 다 회의에 꽉 들어차서 삽니다. 자기의 부모나 형제, 가까운 친지가 죽을 때마다 인간은 인생의 덧없음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아무리 부귀,영화, 공명이 많다 하더라도 죽어 버리고 난 다음에는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람처럼 왔다가 안개같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 인간입니다. 생자필명이요 회자정리라는 말처럼 살아 있는 사람은 다 죽고, 만나는 사람은 다 뿔뿔이 헤어지고 맙니다.

도대체 인간이 사는 의미가 무엇이며 가치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다함께 모여서 웃고,울고,손을 잡고 가는 것 가지만 실제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지극히 고독한 존재입니다. 태어날 때 혼자 울면서 태어나고, 죽을 때 혼자 맥없이 두 손을 풀고 죽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혼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을 알게 되었고 천국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옥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산다는 확실한 의미와 가치와 목표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목표가 없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된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알게 되고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의 삶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자고,깨고, 먹고,마시고, 일하는 모든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다 얻고도 자기 목숨 하나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사람이 자기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습니까? 종국적으로 우리의 모든 삶의 좌표가 예수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에 있지 아니하고 부귀 영화나 공명, 인간적인 목표 달성에 둔다면, 이것은 종국에 가서 무의미해지고는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만이 우리에게 영구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영원히 격파한 것을 증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망을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

죽음을 보고 사도 바울은 비웃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인류 태고 때부터의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셔서 사람을 대표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한복음 11:25,2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사망을 영원히 정복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종교는 인간의 소원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부활의 종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만이 죽음을 격파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부활을 통해 죄를 청산하시고 삶의 의미를 확립하시고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제 절망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는 소망밖에 없습니다. 죄와 무의미가 사라졌습니다. 죽음도 사라졌습니다. 천국과 영생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기쁨과 소망,또 소망 가운데서 매일매일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는 놀라운 은총이 주어졌습니다.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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