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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절 그 이후 (눅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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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그 이후
눅24:1-12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11)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죽음 앞에 선 예수님

인간을 가장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합니다. 우리 주변에 또는 가족 중에 죽음을 경험하고 나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또 죽음이 얼마나 그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지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가고 싶지 않은 곳 중에 하나가 아마 장례식장일 것입니다. 어느 정도 나이 들어 돌아가신 분의 장례식은 그런 대로 괜찮지만, 젊어서 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분의 장례식은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석가모니가 왕자로서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한 이유도 이 생로병사의 문제 때문입니다.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태어남과 늙음과 병듬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석가모니의 일화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죽은 아기를 안고 석가모니를 찾아왔습니다. 슬픔에 젖은 여인이 혹시 그 사랑하는 아기를 살릴 수 있을까 하는 희망에서 였습니다. 석가모니는 그런 여인을 바라보며 이렇게 명령하였습니다. “죽은 식구가 없는 집을 찾아 그곳에서 겨자씨를 한 웅큼 가져오라. 그러면 살려주리라” 그 여인은 기쁨 마음으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집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집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았고, 슬픔이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이 여인은 출가하여 고행의 길을 가게 됩니다.

죽음의 문제는 현대철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쓴 실존철학자입니다. 그는 인간을 정의하기를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절망하고 있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은 자기라는 생명에 대한 사형선고입니다. 이런 죽음을 안고 있는 자가 절망하지 않는 것은 비정상적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절망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했는데 가장 위험한 절망은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모르는 절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마치 알코올 중독자 같습니다. 술에 취해 있어야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제정신 차리는 것이 두렵습니다. 술뿐만 아니라 다른 물질이나 이념으로 마치 구원을 받는 것처럼 취해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늘어난 아파트 평수와 배기량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해 키에르케고르는 “돈 5달러를 잃었을 때는 심각해지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를 잃은 것에 대해서는 심각해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이보다 나은 절망은 ‘자신이 절망상태에 있음을 깨닫는 절망’입니다. 곧 자신이 당하는 괴로움이 돈이 없고 일이 풀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덧없고 무의미한 삶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 두 종류로 달라집니다. 한 부류는 그 절망이 힘들기 때문에 외면하고 다른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자기 자신이 너무 싫은 나머지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마치 자기가 아닌 것처럼 행세합니다. 자신은 마치 절망을 극복한 훌륭한 도인처럼 꾸밉니다. 나머지 한 부류는 그 절망에 끝까지 맞서 싸웁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론은 자살입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인생에 희망이 없음을 알기에 용감하게 자기를 포기하는 자살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가? 키에르케고르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절망의 반대는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다.” 신은 죽어 사라져 버려서 의미없을 우리네 삶을 비로소 가치 있고 영원하게 만듭니다. 이런 일이 바로 우리 예수님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바로 이 죽음의 문제와 정면으로 씨름하신 분입니다. 세상에는 죽음 앞에 용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소크라테스는 충분히 도주할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담담히 독배를 마셨습니다. 적에게 항복하느니 용감하게 자결한 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죽음 앞에서 너무나 초라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이시면 좀 당당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호소합니다. 심지어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막14:34) 함께 기도해달라고 요청하십니다. 십자가 상에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탄식하십니다.

죽음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 모습 같기도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 모습이 마음에 듭니다. 실상은 정직한 우리들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것은 얼마나 두렵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듭니까? 예수님은 인간이 당하는 죽음의 고통을 그대로 직면하셨습니다. 영웅심이나 이념이나 어떤 마약에 취해 죽음의 고통을 외면하신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외로움과 고통 앞에 자신을 그대로 노출시켰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해 놓았는데 그것은 실상 인간의 최대 원수인 죽음과의 투쟁이었습니다.

그 싸움의 결과는 죽음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죽음의 세력의 완승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들이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을 찾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향료는 세마포로 시신을 싸기 전에 발라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돌아가셨고, 또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어지는 안식일에는 일할 수 없고, 안식일은 토요일 저녁에 끝나 밤이 되면 무덤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빠른 날이 주일 아침 새벽이었습니다.   

그들 중 아무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 그 육중한 무덤 문을 열어 줄고?’ 걱정하며 갔는데 이미 돌은 굴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4절에 보면 이를 인하여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전합니다. 그때 두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씀합니다. 5절과 6절입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도무지 우리의 귀를 의심할만한 소리입니다. 죽었던 자가 살아났다는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을 여자들이 사도들에게 전하지만 11절에 보면 사도들 또한 저들의 말을 허탄하게 여겨 믿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용기를 내어 무덤에 달려가지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세마포만 보고 단지 기이히 여겼을 뿐입니다. 제자들의 이런 반응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죽음이란 것은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사태임을 우리 또한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죽음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기독교는 이 대선언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여인들과 제자들이 무덤을 찾았지만 그 곳은 시체가 없는 빈무덤이었을 뿐입니다. 기독교의 시작은 성탄절이 아니라 바로 이 부활절로부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날의 크리스마스 이브도, 성금요일의 십자가의 수난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구세주라면 우리에게 성인의 한 사람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인간이 당하고 있는 절망이라는 고통에서 구원해 낼 수 없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비참하게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수석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그의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시 하나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전로마를 뒤집어버렸습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믿습니까? 바로 부활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확신하게 됩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는 바로 이 부활절입니다. 부활이 있고 나서야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나 사건이 하나의 줄로 연결됩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생애는 단순히 한 위대한 위인의 삶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충격 앞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되새겨 보기 시작했고, 그때서야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주님의 말씀이 부활 이후에서야 비로소 깨달아졌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에서 창세기가 먼저입니까? 출애굽기가 먼저입니까? 물론 성경 순서나 역사로 보나 창세기가 먼저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가장 먼저는 출애굽기입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한 민족을 형성하기까지의 과정입니다. 이들은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약속을 하셨는가 궁금해졌습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창세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노예처럼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해방이 되고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자 자신의 가족사가 궁금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출애굽기가 창세기보다 먼저요, 부활이 성탄절보다 먼저라는 뜻입니다. 태초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빛과 질서와 생명의 충만으로 가득 찬 창조 역사를 보며 이들은 자신을 애굽의 무의미와 무질서, 고통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처음부터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빛에서, 부활의 감격에서, 부활의 그 능력과 은혜를 체험한 자의 눈으로  다시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한 구절 한 구절에는 부활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말씀하지만 그 주된 모티프는 슬픈 애가가 아니라 희망을 담고 있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지난 성 금요일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보냈습니다.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까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가 복음서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당할 것을 미리 예견하셨습니다. 모든 복음서는 2장이 넘게 길게 예수님의 고뇌에 찬 겟세마네 기도로부터 체포당하심, 제자들의 배반, 심문과 채찍에 맞으심,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조롱을 당하심, 십자가에 높이 달리우시고, 목이 마르고 최후의 피와 물 한 방울까지 다 쏟아내는 고통을 당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들입니다. 그런데도 성경 기자들은 담담히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고, 또 우리들도 비록 가슴은 아프지만 성금요일 밤을 견디어 냅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고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있기에 예수님의 어떤 고통도 더 이상 절망일 수 없습니다. 비록 부활절과 관련된 말씀들이 성경에 짧게 언급되어 있다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의 그림자가 전 성경 위에 드리우고 있다 할 것입니다.

부활은 현재형

저는 우리 인생을 이런 부활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입니다. ‘나는 장차 부활할 것을 믿어’가 아니라 장차 부활할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현재의 고통이 오히려 즐거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우리들에게 요청하셨던 바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죽은지 나흘이나 썩은 내가 나는 나사로를 앞에 두고 그의 여동생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요11:23) 그러자 마르다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11:24) 마르다의 이 고백은 실상 우리들의 고백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의 재림과 함께 다시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 자체로도 대단하다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종말에 대한 믿음조차 확실히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대답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11:25,26) 이 말씀의 강조점은 죽지 않는다 영원히 산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는 결코 죽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육신의 죽음도 더 이상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생의 믿음을 가진 자는 더 이상 죽음이 그 삶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부활을 단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길 원하십니다. 먼 미래의 부활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이 우리 온 현재를 지배하길 원하십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대기업 회장의 아들은 장차 그 기업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는 지금부터 회장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또 자신 또한 그렇게 믿으며 행세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요청하시는 부활의 현재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우리가 가진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보여주십니다. 사실 이것을 나사로의 부활이라고 하지만 실제 부활은 아닙니다. 나사로는 다시 살아났지만 늙어 죽든, 어떤 모습으로든 또 죽었을 것입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가진 분이시며, 또 부활 신앙을 가진 자는 반드시 살아날 것을 상징적으로 맛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이런 부활 신앙을 가졌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어느 인간이 죽음 앞에서 이런 담대한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 부활의 능력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이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고, 밤을 밝히는 기름처럼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감내했던 것은 바로 이 부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인들이 장례식에서 곡을 해도 시원찮은 데 찬송을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 부활의 소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분이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장례식에서 찬송을 부르는 신앙인들의 모습이 희한해서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노래하는 그들의 신앙이 너무 대단해보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장례식장에서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단지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눈물이지, 절망의 눈물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멀리 유학 보내거나 군대에 보낼 때 웁니다. 다시 만날 것을 알면서도 웁니다. 그러므로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인간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 눈물이 절망의 눈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곧 다시 부활하여 다시 만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어두움이 우리를 붙드는 손보다 더 강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은 힘을 잃었습니다. 어떤 분이 전쟁터에 나가면서 자기 부인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만일 우리가 탄 순양함이 침몰하였는데 아무도 구조되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듣거든 울지 마시오. 나의 몸이 가라앉은 바다는 바로 나의 주님의 손바닥입니다. 아무것도 그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물론 바다는 여전히 우리를 무섭게 하는 바다입니다. 그러나 부활절 이후 그 바다는 이제 주님의 손바닥 위에 있는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삼킬듯한 바다도 주님의 손 안에서는 작은 수영장과 같습니다.

부활의 빛으로

부활 신앙의 눈으로 우리 현재의 모습을 보면 우리 현재의 실수나 연약함에 대해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게 됩니다. 베드로에게 일어난 사건도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거나 법정에 섰을 때 예수를 부인하거나 믿지 않겠다고 고백하면 살았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초대교회사에도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병인박해 때 우세영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진 고문을 견딜 수 없어 결국 배교를 선언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목숨은 살았지만 이 분이 자기가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교를 찾아가 참회하고 자기 발로 다시 포도청을 찾아갑니다. 또 다시 배교를 강요했지만 “나는 배교하고는 살 수 없다”고 하고는 순교의 길을 갑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은 거의 배교와 같은 행위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세 번 부인한 사건을 모든 복음서가 담담히 기록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부활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본 후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았고 영생의 확신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 부활절 이후의 빛에서 과거를 돌아보니 예수님을 배신한 사건은 더욱 아름다운 사건으로 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그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인데 이런 사람을 하나님의 사도로 삼으신 것이 놀랍고 감사할 것입니다. 또 자기의 실수한 모습을 통해 이후 신앙의 길을 가는 후배들에게 동일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교훈하고 격려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도 실수했다. 그러니 너도 좌절하지 말고 다시 시작해” 이렇게 베드로는 실패한 사람들을 격려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부활의 빛 아래 조명되기 때문에 아름답게 보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을 확실히 압니다. 우리는 영원한 부활 생명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를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실수는 베드로의 실수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계기입니다. 우리가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지금의 실수와 연약함은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을 받기 위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그 승리를 알고 게임에 임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녹화방송과 생방송의 차이와 같다 할 것입니다. 생방송은 승패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긴장도 되고 초조합니다. 쉽게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녹화방송은 이미 게임이 끝났기에 긴장도는 떨어지지만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승리로 끝난 경기였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위기를 맞으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만약 요셉의 이야기를 거꾸로 돌리며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형들에게 버림받고, 출세길에서 한 여인 때문에 좌절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집니다. 이것이 생방송 중이라면 정말 절망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총리입니다.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의 눈으로 이런 위기들과 굴곡들을 보면 더 자기 인생을 빛나게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선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미 승리한 인생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그 결과는 승리며 그 분의 품속입니다. 그 중간에 위기도 맞을지도 모릅니다. 거의 끝났다고 생각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버티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산 자입니다. 죽은 자가 아닙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할 수 없습니다. 부활절 이후의 우리 삶은 더 이상 죽음이 우리에게 횡포를 부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이 죽음의 빛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희망으로 현재의 고난과 무의미를 견디고 있다면 우리는 산 자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부활절 이전이 아니라 이후의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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