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룟 유다의 비극 (요 6:66-71)

  • 잡초 잡초
  • 564
  • 0

첨부 1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유다라는 이름은 서양에서는 유다라는 아주 혐오스런 것입니다. 집안에 키우는 개에게도 그 이름은 붙이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는 정말 비참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비참하고 원통한 최후를 스스로 맞이하여 그리로 걸어갔습니다. 그야말로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간 사람입니다. 과연 가룟 유다의 비극은 무엇일까요? 저는 가룟 유다의 비극을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 구원받지 못한 것이 비극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구원받지 못한 것이 대비극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말씀도 들었습니다. 사도라는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비극입니까? 구원은 굉장히 쉬운 것 같지만 정말 큰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너무 쉽게 받기 때문에 왜 구원을 못 받느냐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구원이 너무나 쉽고 간단하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삼 년 반이나 따라다녔지만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마귀의 역사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를 보면 구원은 참으로 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 중에서 회계를 맡아본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이 사람이 아주 명석하고 체계적이고 주도면밀한 사람인 것을 말해줍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을 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 하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는 혁명가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혁명을 위해 자금을 모으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에 대해 실망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에게 나올 때에 어떠한 동기로 나오는가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잘못된 동기로 나오게 되면 그 사람은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유다는 다른 사람을 책망도 한 일이 있었습니다(요12:4,5).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 적도 있었습니다(마10:1). 그런데도 구원받은 사실은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아버지가 물장사인데 목말라 죽었다면 얼마나 비극입니까? 여러분의 아버지가 빵장사인데 굶어죽었다면 얼마나 비극입니까? 유다의 첫 번째 비극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삼 년 반을 다니면서도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것이 비극입니다.
 
  가룟 유다의 두 번째 비극은 예수님을 판 것입니다. 과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이 돈 때문이었을까요? 그렇다면 돈을 좀 많이 받아야 하는데, 그가 얼마를 받았습니까? 은 삼십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은 삼십은 오늘로 하면 미화 9.5달러에 불과합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오늘 환율로 8,950원밖에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팔았을까요? 그것은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닌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구원이 없었기 때문이고 그의 민족해방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유혹과 예수님의 가벼운 책망에 쓴 뿌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요12:7,8). 요한복음 6장 6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온 사람이 아니고 이용하기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유대를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단체를 만들어서 항거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동기가 잘못되면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게 됩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스스럼없이 팔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을 보겠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처음에는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아야겠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마귀가 그를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악한 생각이 들어왔을 때 뿌리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마귀는 그의 마음에 들어갔습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13:27)
 
  여러분, 가룟 유다가 구원받지 못한 것이 예수님 때문입니까? 요새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발견한 유다복음서에서 주장하듯이 예수님께서 조용히 유다를 불러서 “너, 나를 팔아라, 그래야 내가 죽을 수 있고 그래야 인류가 구원받는다, 그 대신 내가 너를 위대하게 만들어주겠다, 그 대가를 지불하겠다, 네가 나쁜 짓을 한다고 하지만 네가 아니면 누가 나를 팔겠느냐? 나중에 내가 보상을 하겠다, 너는 영웅이 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았나요? 그것은 가룟 유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입니다. 가룟 유다 자신이 마귀의 역사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팔기에 이르고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을 받지만, 멸망의 자식이 된 유다는 마귀를 영접하고 만 것입니다(요1:12,13:20). 이것이 그의 두 번째 비극인 것입니다.
 
  세 번째, 회개의 기회를 놓친 것이 비극입니다.
 
  이것이 대단히 민감한 부분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회개하라는 말을 할 때마다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8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회개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사전적 회개도 있고 신학적 회개도 있고 논리적 회개도 있고 교파별로 회개가 다릅니다. 기성교회에서는 죄를 지을 때마다 울부짖는 것을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가룟 유다가 왜 지옥에 갔느냐 하는, 구원과 관련된 회개는 생명 얻는 회개만을 말합니다. 그 회개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입니다. 죄에 대한 회개입니다.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의 회개, 구원의 회개는 죄 때문에 있는 회개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 2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여기 보시면 악함을 돌이키고 뉘우치고 그리고 주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기도하라고 했습니까? 천주교 신부에게 가서 기도하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주께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주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러면 회개를 했을까요? 마태복음 27장 3-5절을 보겠습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여기에 “스스로 뉘우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까? 회개는 repent himself가 아니라 repent unto God입니다. 회개는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뉘우치는 것, 반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회개의 대상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한 회개는 겉모양은 회개이나 진정한 구원과는 거리가 먼 자기 방식대로 한 후회였을 뿐입니다. 죄사함을 얻을 수 없는 “스스로의 뉘우침”에 그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곧 회개다”라는 단순 논리는 참회개가 아닙니다. 구원에 있어서 회개와 믿음은 각기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성에 요구되지만 그 문양이 다르듯이 그 각각의 역할과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다른 역할과 기능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행20:21). 진정한 회개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인됨을 통회자복 할 때 구원이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한 것, 이것이 가룟 유다의 세 번째 비극입니다. 
 
  가룟 유다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 비극은 구주 예수님을 삼 년 반이나 좇아 다녔으면서도 구원받지 것입니다. 두 번째 비극은 스승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사단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마귀를 영접하고 멸망을 받았습니다. 세 번째의 비극은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었음에도 회개를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끝끝내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룟 유다의 비극입니다.
  여러분, 구원을 받았습니까? 비극을 스스로 만들지 마시고 속히 구원의 확신을 얻으십시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