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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하나님 나라 때문에 (시 45:5~7, 행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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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주일학교에서 교사가 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교회에 바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요?” 아이가 대답합니다. “아뇨”. “만약에 매일같이 교회를 깨끗하게 청소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요?” “아뇨”.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를 갈 수 있죠?” 다섯 살 난 꼬마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죽어야 가요.”

  맞습니다. 죽어야 갑니다. 우리가 다 죽어야 하나님 나라에 가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하나님 나라를 삽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는 별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때문에 오셨고, 하나님나라를 주셨고, 지금도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칼뱅은 “그리스도인의 첫째 의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보이게 삽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처럼 믿으며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물리적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며 영향력이며 하나님의 완전한 권위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주기도문에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새로 번역된 주기도문에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을 지배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의 삶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을 지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처럼 하나님의 주권으로 살고 영향력을 미치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과 정의와 평화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됩니다.

  누가복음 17:20 하반절에서 21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within)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임 가운데(among)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요 목회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하늘나라를 향한 여행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간에 다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 여행을 떠나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여행의 가이드이십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때문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에덴을 회복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상실된 하나님의 나라를 찾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에덴을 쫓겨났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실했습니다. 이것을 찾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요한이 전파한 말씀을 보세요. 마태복음 3:2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의 첫 선포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예수님께서 하실 말씀을 미리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말씀을 보세요. 마태복음 4:17에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받으신 다음에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선포도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 선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마태, 마가, 누가가 같이 기록하고 있는 중요한 비유입니다. 포도원을 잘 꾸며놓고 농부에게 맡기고 멀리 떠난 주인이 있었습니다.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 종을 포도원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종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주인은 다른 종을 보냈지만 똑같이 때리고 죽였습니다. 주인의 생각에는 아들을 보내면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농부들은 그 아들은 상속자이니 죽이자고 하면서 죽였습니다. 주인이 와서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농부들을 진멸하고 다른 농부에게 포도원을 새로 줄 것입니다. 마태복음 21:43에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주려고 했지만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서는 도리어 빼앗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신약에는 ‘하나님 나라’, ‘천국’이란 단어가 100여 번 나옵니다. 이 단어들은 거의 모두 복음서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거의 모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선포의 핵심인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때문에 오셨고,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가치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은 비유의 장입니다. 천국 비유를 많이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라고 하시면서 천국을 설명하십니다.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것 때문에 오심을 증명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상은 예수님께로부터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갔습니다. 바울과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이 이 사상을 전파하였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과 교부들이 이 사상을 받고 전파하였습니다. 신학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이 이 사상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는 전파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는 팔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팔복의 첫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여덟째 복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고 합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첫째와 마지막 이 두 가지 복은 현재형입니다. 현재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복을 누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으로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소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을 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라고 하셨을까요?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순수한 것 같지 않아요. 하나님 나라도 이제 어린이들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린이들도 이제는 어른 같아요.

  A. J. 코니어스는 “우리는 천국이 사라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즘은 하나님 나라를 얘기하면 케케묵은 옛날 얘기 정도로 듣습니다. 하나님 나라 설교하면 구식 목사 정도로 생각합니다. 근래에는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말씀을 거의 들을 수가 없습니다. 번영, 신앙, 은사, 사역 등은 설교하면서도 제일 중요한 주제인 하나님 나라는 좀처럼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설교의 주제는 거의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예수 천당”이 주제였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 갑시다”가 복음이었습니다. 저의 어릴 때 기억으로는 야외예배 가는 버스에서도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불렀습니다. 얼마 후에는 “내게 강 같은 평화”를 많이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은 “어머나”도 부릅니다. 노래방에서 제일 많이 불러지는 가요가 “소양강 처녀”라는데 야외예배 가는 버스에서 이 노래도 나옵니다.

  1960년대가 되자 경제 개발과 더불어 “우리도 잘 살 수 있다”가 국민적 구호였습니다. 그 다음부터 하나님 나라는 점점 멀어지고 “예수 믿고 부자 되자”, “예수 믿고 병 고침 받자”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 복음이 아닙니다. 참 복음은 하나님 나라밖에 없습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작시한 존 뉴턴은 방탕한 생활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토머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개심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늘나라에 가면 세 가지로 놀라운 일을 발견하리라. 첫째는 예상치 않은 사람이 있어서 놀랄 것이고, 둘째는 예상했던 사람이 없어서 놀랄 것이고, 셋째는 내가 거기에 있어서 놀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에 가서 내가 거기에 있어서 한번 크게 놀라봅시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 좋아서 놀랄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 나라에 사는 것 때문에 놀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때문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그 나라 때문에 놀라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 하나님 나라 소유하고 이 땅에 살다가, 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주인과 함께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때문에 머무셨습니다.

  사도행전 1:3에는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 40일 동안 세상에 더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더 세상에 머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부활을 확인시키려고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려고 더 머무셨습니다. 자신을 때리고, 못 박고, 죽이고, 수치를 당하게 한 이런 세상에 뭘 더 계시고 싶으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차마 이 사람들을 버리고 갈 수 없었습니다.

  유대 전승에는 탕자의 비유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눈을 감지 못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한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다른 지방에 가서 마음껏 즐기고 삽니다. 집안의 주위 사람들은 모두가 자식이 아니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아버지가 늙어 운명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차마 눈을 감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겨우 입을 벌리고 아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께 물어봅니다. “아버지, 뭘 원하세요? 누굴 기다리세요?” 아버지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눈치를 채고 동생에 기별하여 오게 합니다. 멀리 갔던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방탕한 아들, 거지와 같이 변한 아들의 손을 잡으며 “아들아!” 한 마디를 하고 비로소 눈을 감습니다. 멀리 간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는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아버지입니다. 이미 부활하셨지만 차마 제자들을 버리고 가지 못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지 못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나가서 일꾼을 데려 옵니다. 다시 3시에 나가서 데려옵니다. 다시 9시에 그리고 포도원 일이 끝날 1시간 전인 11시에 다시 나가서 일꾼을 데리고 옵니다. 포도원 주인의 끈기가 아니면 포도원에 들어오지 못할 일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끝까지 머물고, 기다리고, 들어오기를 기대하시는 이런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오랫동안 참으심, 오랫동안 머무심입니다.

  C. S. 루이스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기들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궁금하지요? 아마 아기는 따뜻하고 안전한 어머니 뱃속에 머무는 쪽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요? 아기 생각에는 뱃속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생각은 틀립니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 머물면 죽습니다.
  예수님은 빨리 안전한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어 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머무셔야 우리가 삽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려 또 다시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28:30-31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의 행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 행전의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의 전파의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바울의 전 생에도 하나님 나라 때문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산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까지 간 이유가 무엇이니까? 죄인이라서 갔습니까? 로마 시민권자라서 갔습니까? 바울이 가이사에게 고소해서 갔습니까? 정답은 하나님 나라 때문에 로마까지 간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에는 두 가지 같은 의미의 비유가 있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진주 장사의 비유입니다. 이 두 가지 비유는 똑같이 모든 것을 다 팔아 샀다는 것입니다. 밭에 값비싼 보화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모든 것을 다 팔아 밭을 샀습니다. 가장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모든 것을 다 팔아 진주를 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을 다 주고 바꿀 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하나님 나라입니다. 모든 것을 다 주고 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고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가시지 않고 40일을 더 계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 때문입니다. 바울은 태장으로 맞고, 돌에 맞고, 파선 당하고, 굶주리며 풍랑을 만나 죽을 뻔하면서 로마까지 갔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 때문입니다.

  작년 어느 기독교신문의 설문에 의하면 ‘믿지 않아도 천국에 간다’는 사람이 71.5%나 됩니다. 모든 걸 다 팔아서 살 가치가 있는 하나님 나라를 아무 것도 안 팔고, 아무 것도 안하고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습니다. 이런 얌체가 어디 있습니까? 꿈 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싸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면 어느 학급의 급훈이 “우주정복”입니다. “우리는 주말에 정석을 복습한다”는 뜻이랍니다. “우주정복”은 “우리는 주님 때문에 정말 복 받았다”입니다. 왜요? 하나님 나라 때문에 오시고 머무셨으니까 복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됐으니까 복 받은 것입니다.

결론

  어느 부인이 가정생활이 너무 힘들어 자신을 비관하였습니다. “하나님, 빨리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습니다.” “그래, 그런데 내 말대로 하면 데리고 오겠다. 우선 집이 너무 지저분하구나. 3일 동안만이라도 좋은 부인이란 말을 듣게 집안 청소를 하여라.” 부인은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다시 3일 후에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3일 동안만이라도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란 말을 듣게 사랑을 베풀어 주어라.” 하나님 말씀대로 했습니다. 3일 후에 다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3일 동안만이라도 좋은 아내였다는 말을 듣게 남편에게 친절을 베풀어라.” 이 부인은 최선을 다해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가자. 그런데 마지막으로 집을 한번 돌아보아라.” 집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어 너무 예뻤습니다. 애들이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남편도 흐뭇한 미소를 지우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부인은 “여기가 하늘나라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은 “이 하나님 나라는 네가 만든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부인은 “이제부터 하늘나라를 만들며 살아보렵니다”라고 하였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만드세요. 찬송가 가사에 있는 대로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C. S, 루이스는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 때문에 오시고, 머무신 주님, 그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만들며 사십시오.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면 세상도 덤으로 얻습니다.

하나님 나라도 세상도 다 얻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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