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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에서 태어난 사람들 (엡 4:11 - 엡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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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은 “물에서 시작된 세상”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뜬금없이 ‘물’에 관한 본문이라니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하게 본문 전체를 읽게 되면 본문이 세례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세례의식은 자연스럽게 물과 관계한다는 사실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자, 방금 전에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세례의 물에서 생겨난 새로운 세상과 사람들에 관해 말씀입니다. 그러나 좀 더 넓게 본문을 바라보면, 우리가 읽은 본문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를 연상케 합니다.

에베소서 4장과 5장 그리고 창세기 1장은 모두 “물에서 시작된 세상”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본문 모두 하나님께서 전혀 새로운 것을 불러 존재케 하시는 일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 무엇을 존재케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에 관한 본문들입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창세기 1장의 ‘최초의’ 창조는 혼돈과 무질서의 물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4장과 5장에서도 역시 새로운 창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물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창조에 대해 말씀합니다. ‘세례의 물’에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개의 창조, 즉 “첫 창조”(창 1장)와 “새 창조”(엡 4,5장) 모두 ‘물’에서 생겨난 셈입니다.
첫 창조와 물 첫 창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다시 한 번 귀담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실 때 땅은 형체가 없이 공허했으며, 어둠이 깊음 위에 덮였더니, 하나님으로부터 온 바람이 ‘물들’ 위로 불었더라.

창세기 1장은 이 물들이 어떻게 그곳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이 물들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들이 땅 위를 덮어라’라고 하시자 그대로 되었더라.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니 물들이 좋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은 이와는 정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물들을 물리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물들을 ‘피조(被造)된 질서’의 가장 끝자락에 자리를정해 묶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물들의 절반을 창공 위의 바다(大洋)에 담아두시고 나머지 절반의 물들은 땅 아래 낮은 바다에 담아두셨다는 것입니다(7절).

창세기 1장이 보여주고 있는 세상은 사방으로 공략당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이 가리키고 있는 세상은 하늘 위로 땅 아래로 엄청난 바다들에 둘러싸여 있는 매우 위험천만한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포위된 세상이요, 파괴적인 세력들에 의해 사방으로 둘러싸인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력들은 우리들 아래에도 있고, 우리들 위에도 있고, 우리들 주위 사방으로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세력들이 둘러싸여 공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들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모두는 죽은 오리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적인 말씀으로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시니까 망정이지, 아니 우리 머리 위에 있는 저 우주적 대양을 담고 있는 물보가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에 의해 그 자리에 그대로 묶여 있으니까 망정이지,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적인 말씀을 거두어 가신다면 우리 모두는 태고의 깊음(深淵)들 속에 빠져 다 익사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 덕분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러한 적대적인 세력들 한 가운데 ‘안전지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여러분과 내가 살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고 존재할 수 있는 ‘마른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저기에 그러한 ‘마른 땅’들이 있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창세기 1장이 선포하는 가장 위대한 기적의 복음입니다. 깊고 푸른 바다 한 가운데 여기 저기 육지라 부르는 마른 땅들이 있어 사람들이 목숨을 붙여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사방에 떼를 지어 몰려드는 무서운 파도에 둘러싸여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대양한 복판에 있는 ‘작은 섬’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들 한 복판에 여기 저기 ‘마른 땅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의 물과 새 창조
에베소서 4장과 5장을 읽을 때마다 창세기 1장의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에베소서 4장과 5장에도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물들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물에서부터, 세례의 물로부터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전체는 ‘세례의 물들’로 흠뻑 젖어 있습니다. 세례예식(baptismal liturgy)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는 본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4:22-24를 읽어보십시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벗는다’와 ‘입는다’는 두 단어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우리는 옛 자아를 ‘벗고’ 새로운 자아를 ‘입어야’ 합니다. 이 말은 ‘세례예식의 언어’(baptismal language)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하려면 초기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세례를 받았는지를 알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세례식이 베풀어질 때, 세례를 받게 될 후보자들은 그들이 평상시에 입고 있었던 옷을 벗습니다.
․그들이 살아온 이교적 과거를 뒤로 한다는 상징입니다.
․그들이 생활해 왔던 이교적 삶의 방식을 의절(義絶)한다는 상징입니다.
그리고는 세례(침례)를 위해 담아놓은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세 번 물속에 들어갔다 나옵니다. 일종의 "수중 장례식"입니다. 우스운 말로 하나님께서 개종자를 물 먹이시는 것입니다.
마치 요나를 물 먹이셔서 새 사람 되게 하려 하셨던 것처럼(요나 2장), 이스라엘을 백성을 홍해에서 물 먹이시고 새로운 민족으로 태어나게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은 전능자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습니까?”라고 세례를 집전하는 사람이 세례 후보자에게 질문합니다. “네, 나는 믿습니다!”라고 개종자가 대답합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 개종자들을 물속에 완전히 잠기게 합니다.

“당신은 그분의 유일한 아드님(獨生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두 번째 질문이 주어집니다. “네, 믿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물속에 수장(水葬)시킵니다.
“당신은 성령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라고 개종자가 대답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물속에 잠급니다. 죽음을 경험하는 장사(葬事)를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례(침례)를 받은 크리스천들이 물에서 올라옵니다. 물에서 새로 태어났다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마치 새 옷을 입듯이 그리스도를 ‘입었다’는 상징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죽음의 물속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부도덕과 거짓된 갈망들의 물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른 땅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마른 땅, 도덕적 왕국이라는 안전지대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여러분의 옛 자아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입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도록 창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뜻입니다.
의복의 변화라는 것은 벗고 입는 행위를 상징합니다. 사람들이 입고 있는 의복을 보면 그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군인들이나 수감된 죄수들은 특별한 옷을 입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해야 할 역할이 바뀌게 되면 이전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습니다. 죄수들이 석방될 때 죄수복을 벗고 일반 복장으로 갈아입습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할 때 군복을 벗고 민간인의 복장으로 갈아입습니다.
이처럼, 세례를 받을 때, 사람들은 그들의 옛 부도덕한 자아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자아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습니다. 새 창조의 역사가 세례 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례 받은 자처럼 살아야
에베소서 4장과 5장은 세례예식의 물로 흠뻑 적셔져 있는 장(章)들입니다. 그중 한 가지 예를 보십시오. 에베소서 5:8은 말씀하기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살라”고 하십니다.
세례예식에 종종 사용되는 전형적인 문장의 특징은 ‘이전과 이후’입니다. ‘전에는-이제는’이란 용어가 특징입니다. 그래서 “세례받기 전에는 여러분은 어둠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받은 후에는 여러분은 빛입니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전-이후’의 언어를 신약성경 전체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디도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 역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순종하지 않고 잘못된 행동을 하며 육체의 즐거움을 따라 세상일의 노예가 되었고, 악한 일을 하며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고 성령으로 새롭게 하셨습니다.”(3:3-6)

인용구의 끝부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라는 구절은 ”다시 태어남(重生)의 물을 통하여“라는 것입니다. 여기도 물에서부터 새롭게 태어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전 삶
‘이전 삶’을 한마디로 ‘어두움’이라 부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살듯이 살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바울은 엡 4:18에서, “그들은 무익한 삶을 살았습니다. 쓸모없고 헛된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단 말입니까?
․공허한 삶, 목적이 없는 삶, 깊이가 없는 얄팍한 삶,
․온갖 불결한 행동을 추구하는 삶, 어둔 삶
․보이는 것이 없는 눈들, 개안(開眼)되지 않는 눈들을 갖고 사는 삶,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고 있는 그림자의 세상 안에 사는 삶,
․하나님의 얼굴을 흐릿하게 하는 어둠의 세계 안에 사는 삶,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나와 있는 삶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겨져 있는 삶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고의적인 무지와 강퍅한 마음 때문입니다.
새 삶에로의 권고
바울의 권고는 매우 혁신적입니다.
․당신들의 이교적 자아를 벗어버리라.
․헌 옷을 벗어버리듯이 당신들의 옛 성품을 벗어버리라.
․그곳에서 벗어나라.
․당신들의 삶을 더 이상 낭비하지 말라.
바울은 실질적으로 이렇게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 것이 지겨워졌습니까? 옛 것에 지쳤습니까? 옛 것에 의해 학대당했다고 느끼십니까?
옛 것에 갇히게 되었다고 생각되십니까? 옛 것이라는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옛 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한 번도 진정한 만족함을 느껴보지 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옛것이 가져다는 주는 것이 결국 별것이 아니구나 하는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옛 것의 무가치성, 사소함, 왜소함, 가벼움, 무한한 지겨움 등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옛 자아를 벗어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처럼 창조된 새 자아를 옷 입으십시오!”

세례: “분명하고도 거치적거림이 없는 시작”
Gail Sheehy의 소설 Passages(1974)에 아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로 그 분야의 정상에 서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진 모든 풍요와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행하고 비참했습니다. 그의 결혼생활은 고통스러웠으며 게다가 육체적 정서적 문제까지 겹쳤습니다. 내면적 붕괴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정신과 의사의 치료를 받으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면밀하게 조사해보았습니다.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기간을 갖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가 간절한 소원은 ‘분명한 시작, 거치적거림이 없는 시작’(clear, unencumbered beginning)이다!”

세례가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이런 시작입니다. ‘분명하고도 거치적거림이 없는 시작’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는 우리에게 분명하고도 거치적거림이 없는 시작을 제공합니다. 분명한 시작, 뚜렷한 첫 출발, 부담이 없는 첫 발, 뒤에서 잡을 것이 없는 신선한 시작, 아무런 방해가 없는 첫 걸음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한때 우리는 무익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이해력과 분별력과 깨달음에 관한한 어두움 가운데서 해매였으며, 하나님의 생명과는 멀리 떨어져 사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 받는 날이 온 것입니다. 우리의 부도덕한 과거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장사지내고 그분과 함께 새로운 삶에로 일어난 날이 온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분명하고도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는 시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 묶어지지 않는 새 인생이 시작하는 날이었습니다. 한때 우리는 어두움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주님 안에서 빛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주님 안에서 빛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빛 아래서 걷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마른 땅을 걷는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빛 가운데 걷는 삶의 예들

[예 1] 주님 안에서 빛이 된다는 것은,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입니다(4:25).
바울이 그 당시의 세상을 바라보듯이 우리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면 거짓으로 가득찬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진실을 왜곡시키기도 하고 조작하기도 합니다. 거짓은 사회를 부식시키고 침식시킵니다. 거짓은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크리스천 공동체의 현저한 특질은 정직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는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들, 그들의 말은 신뢰할 수 있고 믿을만한 사람들이라고 알려져야 합니다.

[예 2] 주님 안에서 빛이 된다는 것은, 바울이 4:26-27에서 말하기를,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해가 지기 전에 분노를 매듭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화를 내더라도 그 화는 정의로운 분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내는 화가 아니어야하며, 앙갚음이나 악의나 적대감이나 복수심이나 원한으로부터 자유로운 분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빛이 된다는 것은 당신의 분노를 길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노의 숯이 연기를 내며 벌겋게 타오르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 3] 주님 안에서 빛이 된다는 것은, 바울이 4:28에서 말하기를, 도둑질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여 남에게 베풀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둑들은 훔치는 일을 멈추어야합니다. 자신의 손으로 정직하게 일하고, 얻어진 열매들을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과 나누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 4] 주님 안에서 빛이 된다는 것은, 바울이 29절에서 말하기를, 악한데 혀를 사용하지 말고 선하고 착한 일에 입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더럽고 추한 언어를 사용하지 말고 상황에 적합한 좋은 말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말들을 사용하시어 다른 사람들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소위 건덕(建德), 즉 덕을 세우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혀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동일한 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옳지 않다!” 무서운 지적입니다. “어떻게 한 입에서 축복과 저주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질책하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을 낼 수 있겠는가? 무화과나무에서 올리브가 나올 수 있으며 포도나무에서 무화과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예 5] 주님 안에서 빛이 된다는 것은, 바울이 4:31-32에서 말하듯이, 여섯 가지 좋지 못한 태도들을 멀리한다는 뜻입니다.
․심한 다툼,
․노여워하는 일
․쉽게 화를 내는 일,
․말로 상대방을 비비꼬는 일,
․헐뜯고 비방하고 중상하는 일,
․해코자하는 마음(惡意).
그 대신 여러분에게 그런 일들이 있을 때 오히려 친절과 부드러운 마음과 용서로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 6] 주님 안에서 빛이 된다는 것은, 바울이 5:3-4에서 말하듯이, 성(sex)에 관하여 음담패설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오히려 성에 대해서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추호(秋毫)라도 성적으로 부도덕한 일들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형태의 도덕적 불결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부적절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맞지도 않는 음담패설이나 어리석은 잡담이나 쓸데없는 농담을 멀리하고 감사의 말과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性)을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선물들은 감사의 주제들이지 결코 농담거리가 아닙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농담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평가절하 하는 것입
니다. 그것들에 대해 감사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하나님이 하사하신 복들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한때 “물 먹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물 먹이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의 물을 통하여 죽음을 경험하고 옛 옷을 벗게 하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새 옷을 입게 하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흠뻑 젖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속에서 올라온 자들이 그런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깨끗하게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말쑥한 차림의 신사숙녀들이 된 것입니다. 성도(聖徒)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때 어두움이었지만 이제는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사십시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십시오. 부활의 영으로 흠뻑 젖어서 비록 “좁은 길을 걸어도 밤낮 기뻐하는 그리스도인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류호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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