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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보장(保障)으로 돌아오라! (슥 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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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속의 빈곤이라는 말처럼,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도 시시각각 밀려오는 두려움과 불안요소들로 인해서 영적, 정신적인 빈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각종 사고나 재해에 대한 두려움과 예기치 못한 죽음의 문제, 직장생활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인해서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더 가중되는 시대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내일의 삶을 보장받기 위해서 온갖 종류의 보험에 가입하여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현대 사회는 갈수록 보험천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로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각종 보험에 가입을 하면서 다가올 미래의 문제들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보험이 필요한 이유를 크게 3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사고나 질병, 재해의 위험시 생존 치료비를 보장받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로 예기치 않은 조기 사망의 위험시 남은 가족의 삶을 보장받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셋째로는 준비없이 늙어가는 위험에 대비하여 행복한 노후생활을 보장받기 위한 것입니다.

선진국의 중요한 특징가운데 하나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다는데 있습니다. 유럽의 스웨덴이나 덴마크, 프랑스등 선진국에서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의 모든 등록금을 국가에서 다 보장을 해 줍니다. 그리고 퇴직을 하면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국가에서 연금을 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미래에 대한 큰 염려없이 편안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험이나 사회보장제도가 우리 인생의 미래를 보다 편안하고 행복하게 꾸려 갈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이기에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내일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이 살다가 나중에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베짱이 인생이 되기보다는 오늘의 수고와 땀 흘림을 통해서 내일을 준비하여 미래를 보장받는 개미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심각한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의 보장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보장을 향한 관심은 점점 잃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현실적인 각종 보장제도를 좇다가 우리 인생의 영원한 보장이 되시는 하나님을 점점 상실해 버린다는 것에 이 시대의 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보장이심을 알았기에 이 땅의 보장만을 좇아서 살아가지 않고,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며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들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배부르고 안락한 이 세상의 보장에 시선을 고정한 나머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가 아니라,  ‘주 예수여 거기 가만히 계시옵소서’ 라며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팽개쳐 버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서울예수’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의 흐름속에 표류해 흘러가는 한국교회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인데요. 이런 웃지 못할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서울에 오셔서 아름답게 잘 지어진 기독교 회관에 들어가시려는데, 입구에서 어떤 목사님과 마주친 거예요. 그때 목사님은 예수님이심을 알아채고는 “아이고, 예수님 어떡하시려고 이 누추한 땅에 내려오셨습니까? 하늘에 가만히 계시면 우리가 정성껏 예배하고 헌금도 거두어 올려 드릴텐데요.”라면서 예수님을 떠나가시라고 밀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다소 과장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뭏튼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진정한 보장을 보는 영안은 점점 어두워져가고, 이 땅의 안락함과 편리함이 준비되어 있는 이 땅의 보장을 보는 육안은 지나치게 밝아져 간다는 것이 신앙의 문제가 아닐까요?

성도님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진정한 보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인생은 오늘 무엇으로 인해 든든함을 느낍니까?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미래적인 천국을 보장받고 살아가는 자임은 분명하지만,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루 하루 이 땅을 살아가면서 나는 과연 무엇을 내 인생의 보장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2종류의 대조적인 보장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본문9장 3절과 12절입니다. 먼저 3절에 보면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며 나라를 새롭게 일으키고 있는 당시 두로라는 나라가 뛰어난 상업술과 해외무역으로 당대 최고의 부국이 되었습니다. 2절에는 그 나라가 넓은 지혜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번역성경에 보면 ‘영리하고 빈틈이 없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은과 금을 태산처럼 쌓아놓고 그것들로 자기들을 위하여 보장을 건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세워놓은 견고한 보장이 그들을 영원히 보호하고 지켜줄 줄로 생각하면서 교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뢰했던 그 보장은 후에 알렉산더의 침략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반해 12절에는 또 다른 보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제국의 포로라는 물 없는 구덩이에 갇혀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소망을 주셨고 그들을 기적적으로 건져내셨습니다. 바벨론의 70년 포로생활의 구덩이에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들을 구해 내셔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의 진정한 보장이 무엇이냐? 너희들의 참된 소망이 무엇이냐?”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의 고통속에 있을때 그 어느 것도 그들의 보장이 되어주지 못했었는데, 오직 하나님이 그들에게 소망이 되어 주시고 그들을 물 없는 구덩이같은 바벨론 포로생활속에서 건져내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보장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는 너희의 진정한 보장이 되는 내게로 돌아와라. 돌아와서 오직 나만을 보장삼으며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스가랴 말씀에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씀이 47회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은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 모든 군대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이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시며, 우리 인생의 진정한 보장이 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도님 여러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쌓아올렸던 보장은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옛날 시날평지에서 인간이 연합하여 쌓아 올렸던 바벨탑이라는 견고한 보장도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인간은 온 지면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인생이 쌓아 올리는 그 어떤 보장도 언젠가는 다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지혜와 명예이든, 학벌과 지위이든, 금과 은이든 간에 그것들을 보장삼고 사는 인생은 결국 무서운 파멸을 경험하고 말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영원한 보장으로 삼고 오늘도 힘차게 세상을 향하여 진군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게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하고 영원한 보장을 내려보내 주셨습니다. 그 보장이 무엇인지를 9절 말씀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우리의 왕이신 그분,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처음에 그분은 너무나 초라하고 낮은자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도무지 우리 인생의 영원한 보장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저주의 죽음을 당하신 비참한 그분의 모습,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존귀하신 만왕의 왕이셨는데, 그분이 초라해 지시고 낮아지신 것,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오직 우리 인생의 영원한 보장이 되어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군림하고 지배하는 정복자로서 우리의 보장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우리 인생의 죄와 저주와 마귀의 속박에서 건져내어 자유케 하기위해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신 희생제물로서 우리의 진정한 보장이 되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우리에게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보장, 영원한 보장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님 여러분! 우리 인생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보장이 되어 주심을 굳게 믿으며 사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이 그들의 영원한 보장이심을  굳게 믿었기에, 몸은 비록 어두운 지하공동묘지인 카타쿰베에 묶여 있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한없는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하동굴 벽에 독수리 형상을 그려 놓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그들의 든든한 보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독수리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같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육신은 핍박과 억압으로 묶여 있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한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는 육신은 너무나 안락하고 자유롭지만, 영혼은 세상적인 온갖 것들로 묶여서 고통하며 어두움속에서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 여러분들은 이 땅의 것들을 보장으로 붙들고 살지 않고,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보장 삼고 놀라운 자유와 기쁨, 행복을 누리며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인생의 보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의 삶에 얼마나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살펴 보도록 합시다.

1.구원의 보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보장해 주십니다. 
9절에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라고 했습니다. 16절에는 “이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같이 구원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11절을 보세요.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여줍니다. 갇힌 자들을 물없는 구덩이에서 건져내는 것처럼, 그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한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내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는 종교다원주의라는 이름하에 우리의 구원의 보장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파괴하고 십자가의 죽으심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란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듯이,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구원의 정상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통하든지,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를 통하든지 간에 결국 정상에서 만나게 되기에 서로 자기의 길을 고집하거나 다툴 필요가 없고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하면서 함께 정상을 향해 걷자는 것입니다.

천주교도 종교다원주의를 그들의 구원의 길로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근간에 불교에 대해서 문을 활짝 열고 두 종교간에 화합과 대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님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사랑을 나누며 섬기며 봉사하기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절대 진리는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된 진리는 거짓된 사상과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이 혼탁한 시대속에서도 우리 위해 죽음 당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결코 욕되게 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 보배로운 언약의 피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구원의 보장이심을 믿으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화평의 보장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화평을 보장해 주십니다. 
10절을 보세요.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역사속에는 다툼과 분쟁, 미움과 분노가 끊이지를 않습니다. 찬양곡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은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정치권을 보시면 자기들의 잇권 때문에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찬양가사에서 알수있듯이 인간중심의 세상에서는 전쟁과 다툼의 지겨움이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전쟁을 종식시키시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전쟁의 무기가 평화의 도구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쟁하고 싸워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섬기고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치열하게 싸울 대상은 단 하나입니다.

에베소서 6: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바로 어두움의 주관자인 마귀와 악의 영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주적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와 그 악한 영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람과 다투고 싸우고 있다면 지금 마귀에게 지고 있고 농락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님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화평의 보장이 되어 주십니다. 인간의 화평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과 가정속에서의 화평, 그리고 이웃과 세상속에서의 화평은 우리의 화평의 보장되시는 주님을 의지할 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조금전 소개한 찬양곡 뒷부분은 이렇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 여기 계시니 우리가 아들믿을때에 그의 영으로 하나 돼 우리가 아들 믿을때에 그의 영으로 하나 돼 하날세 우리모두다 하날세”
미움과 다툼과 분쟁과 전쟁이 소용돌이치는 이 세상속에서 화평의 보장이 되시는 주님안에서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머무는 그곳에서 인간관계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통치권의 보장

세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통치권을 보장해 주십니다.
10절 하반절에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사람이 되면 바뀌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참으로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의 통치권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내 인생의 주인이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각이나 말과 행동을 내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니 그분이 바로 내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인생의 주관자가 되심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영적으로 어둡고 어리석어서 평소에는 자기가 주인되어서 자기 힘과 지혜와 방법으로 통치권을 행사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인생의 문제가 나 자신의 힘으로 풀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나 자신이 너무나 무력한 자이며, 부도난 인생임을 철저히 인식하면서, 주님이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시며 통치권자임을 발견하고 그분께 통치권을 이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우리 인생을 옷으로 비유했습니다. 백화점을 가보면 몇천원, 몇만원짜리에서 수천만원짜리 옷까지 가격이 천차만별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입은 옷 가운데에도 가격을 따져보면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노회때 3개 만원짜리 넥타이를 샀는데, 얼마나 멋있어 보이든지 저도 살려고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마는 아마 그 목사님이 메고 있는 넥타이가 그런 가격이라는 것을 성도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제아무리 저렴하고 또 값비싼 옷이라 할찌라도 옷은 입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옷은 사람이 입어야만 옷의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이 바로 옷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스스로는 벗어놓은 옷같이 아무런 힘도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통치자이신 주님이 우리를 입으시고 사용하실 때, 우리는 가치있고 능력있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아침에 서재실에 가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주님 저는 벗어놓은 옷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저를 입지 않으신다면 저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주님 저를 옷 입으시옵소서.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가며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따라 살겠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성도님 여러분!
민해경이라는 가수가 불렀죠.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모든 것 책임질 수 있어요” 우리는 더 이상 이렇게 노래하며 내 인생의 통치권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이제는 “내 인생은 주의 것 내 인생은 주의 것 그냥 주님께 맡겨 드려요 내 인생은 주의 것 내 인생은 주의 것 주님 모든 것 책임져 주세요”라는 고백으로 바꾸며 주님의 통치속에서 그분의 능력으로 하루하루 강하고 풍요롭게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가치의 보장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우리의 가치를 보장해 주십니다.
본문에 두 종류의 돌이 나옵니다. 15절에는 물매 돌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매 돌을 밟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물매 돌은 하나님이 없는 이방나라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반면 16절에는 면류관의 보석이 나옵니다.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면류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서 빛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면류관의 보석이란 가치의 절정, 최고의 가치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이 물매 돌 같은 인생이었지 않습니까?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부딪치고 밟히며 가치없이 살아가던 우리 인생이 아니었던가요? 버지니아 공대 총기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모식에서 희생자 명단에 사건의 주범인 조승희 이름도 포함시켜 33명의 명단이 올려졌다고 합니다.  버지니아 공대측에서 설명하기를 “그도 공대 재학생이었고 또한 그도 이 사건의 또 다른 희생자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학살 사건의 주범이었지만, 그 역시 또 다른 희생자이라는 말에 너무나도 가슴이 저미었습니다. 무엇이 조승희를 그토록 엄청난 비극의 주인공으로 끝나게 했던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도 역시 32명의 희생자들과는 또 다른 모습의 희생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가치없는 물맷 돌로 나뒹굴다가 끝나버릴 인생이었지만,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면류관의 보석같이 빛나는 존재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을 한번 바라보세요. 물매 돌로 보지 마시고 면류관에 박혀있는 빛나는 보석으로 보세요. 부부끼리 쓰는 호칭 가운데 ‘여보’라는 말 있죠? 그 의미를 아시는지요? 같을 여, 보배 보입니다. 여보라는 말은 ‘내게 보배와도 같은 소중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서로를 그렇게 불러볼까요?  아마 우리 주님도 우리를 이렇게 불러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우리 마음 다른 곳에 빼앗기지 맙시다. 그 어떤 것도 우리 인생의 진정한 보장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영원한 보장으로 삼고 살아갑시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화평을 주시며, 보석같이 가치있는 존재로 삼아주신 주님께 날마다 우리 인생의 통치권을 이양합시다. 그래서 그분의 통치안에서 능력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풍요로운 인생길을 걸어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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