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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 (창 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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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시는 기회
창 7:1-12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라는 제목으로 증거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7장 11절을 보면 이 땅의 사람들의 죄악이 극성맞아지자 하나님은 후회하셨고, 노아에게 방주를 준비하라고 하셨고, 이제 비로소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고 표현된 심판을 하시게 됩니다. 여기 큰 깊음의 샘들이란, 온천지의 모든 물들이 솟았다는 것이고, 하늘의 창이 열렸다는 것은 위아래로 온세상이 물로 뒤덮이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난 후 애굽사람들이 그 홍해에 갖히는 모습처럼 마치 더이상 참기 힘든 역겨은 죄악을 깨끗히 씼기시려고 작심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보는 듯한 무서운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물천지가 무려 40일 동안이나 지속되었다고 말하고 그 쏟아진 물은 세상을 150일이나 덮었다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구원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노아의 식구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들이 심판을 면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초청에 응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먼저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향하여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심판의 때가 임박해지자, 자신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심판에 앞서 하나님의 초청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징계에 앞서 하나님의 부탁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거절되어지고 무시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요구와 부탁이 거절되어지는 것을 즐거워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요구사항이 매우 중요한 일이고, 꼭 필요한 것인데도 그것을 만홀히 여기는 경우라면 거절로 인한 서운함을 넘어서 참기 힘든 모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니의 부르심, 방주로 오라하심은 적어도 노아가 방주를 만들던 기간동안은 유효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120년이라는 기간이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주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생활의 모습 자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신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에 대한 거절이요, 모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이러한 하나님의 초청에 겸손하게 순종함으로, 심판 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초청에 겸손히 응하는 자만이 유효한 것입니다. 부름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부름에 응답해야 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 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겸손히 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 부름을 경홀히 여깁니다. 마치 예전에 하나님의 부름이 외쳐졌음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사람들처럼 무시합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주님 저는 세상일이 바쁩니다". "주님, 저에게도 지금 다른 일이 더 중요하거든요"., "주님, 저는 그런 것 필요없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자비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완악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멸시함으로, 그의 구원의 초청에 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노아 당시의 사람들과 같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앞둔 우리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에 겸손히 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 구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현세상의 멸망이 요원해 보이고, 그것이 가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에 응하여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되어 반드시 그대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2)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1절을 보면 노아와 그 가족이 온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선택되어 방주로 들어감으로 구원을 얻게 된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도 노아의 '의로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그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가 구원에 자리에 나아오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의 정결치 못함이 우리를 주님의 부르심에 나가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나같은 놈이 무슨 염치로 교회에 가냐? 나중에 좀 회개하고 가야겠다"고 말하며 그 부르심을 외면하고, 미루는 경우가 의외로 비일비재합니다. 정작은 마음에 가긴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정작은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르심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주님이 세상을 멸하실 생각이셨으면 아예 방주를 만들라고 하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나마 그들에게 방주를 만들라 하심은 비록 그들이 부족하고, 연약하여도 그들의 뜻, 생각의 결단을 보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과거가 우리의 구원을 가로막는 제목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또한 그럼에도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선하신 음성을 외롭게 만들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히 11:7을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의 믿음을 의로 간주해서 구원해 주셨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이것을 그의 의로 간주하여 그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습니다. 즉 인간은 누구나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자를 의롭다 여기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자기의 생각과 의지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의지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인정해 주시고, 우리를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노아로 방주로 들라시고 이제 '칠일' 후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또 10절에 보면 '칠일'후에 홍수가 땅에 덮었다 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셨다고 이루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마지막 기회라고 하시고,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하셨다는 의미로 '칠일'을 두 번이나 반복하였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일부로 강조했겠습니까? 이유야 명백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끝까지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도 굳이 하실 필요가 없는 일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하나님의 미련, 아쉬움, 서운함을 옅볼 수 있는 구절입니다. 주님은 죄악된 세상, 사람들을 후회하셨지만,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못난 아들의 한심스런 처사는 못마땅해도 그 못난 아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는 어미의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대로 된 자식은 그 어미의 눈물의 의미를 눈치챕니다. 그 눈물이 사실은 어머니의 사랑이요, 자식 잘되라는 어머니의 아픔임을 압니다. 옛날 그런 부모님들이 종종 계셨다지요, 자식의 종아리를 치면서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 말입니다. 그 아버지의 정신세계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랑이요, 서운함이요, 사랑의 후회가 담긴 애끊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못난 자식은 그런 애비, 애미를 경시합니다. 노인네가 주책이라고만 생각하지 왜 그런지를 모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죄악으로 관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유보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사 죄인들이 회개하여 심판 대신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계신 까닭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어디 있느냐고 웃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장차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노아 당시의 사람들과 같이 멸망의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하심을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노아처럼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선용하여, 구원에 들어가는 은총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죄인들의 죄를 심판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 시대의 죄인들의 죄도 반드시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우리가 진심으로 감사할 것은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우리 자신들에게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대신 받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방주 밖에서는 천하의 생명 있는 것이 다 멸망을 받았으나, 방주 안에 있던 노아와 그 가족들은 무사히 구원을 받았듯이, 이와 꼭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멸망을 당하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구원의 방주요, 구원의 문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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