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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영원한 승리의 노래 (고전 15: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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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역사가가 남긴 유명한 말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사건은 세 가지이다. 첫째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 사는 세상에 오셨다는 것, 둘째 사건은 하나님을 인간들이 죽였다는 것, 세 번째 사건은 죽으신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이 세 가지가 가장 크다.” 인간은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두 가지를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눈으로 확인된 하나님을 믿고 싶은 마음, 또 하나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입니다. 과연 인간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가 있을 것인가? 이 두 가지 의문은 인간 누구나 관심 갖는 문제라서 절대 부정도, 절대 긍정도 못하는 일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배경을 보면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 지방에 전도하러 가셨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몇 가지 장점을 지닌 도시였습니다. 제일 큰 특징은 교육 도시입니다. 헬라 철학의 본 고장! 그것이 고린도입니다. 헬라의 상업 도시로 부유한 경제 도시입니다. 지중해의 동서를 연결하는 중요한 항구도시로서 세계인의 발걸음이 머무는 활력 있는 도시였습니다. 기원전 146년 로마의 왕 맛묘스가 이 도시를 파괴했는데 100년 후에 줄리어스 시저가 다시 복구했고, 기원 27년에 아가의 수도가 되어 발전한 도시입니다.

또, 당시 세계에서 제일 유명했던 신전인 세라피스 신전과 아프로디테 신전이 바로 여기에 있어서 세계적인 종교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의 사람들은 헬라 문화의 철학적이고 사변적 영향을 받아 인간의 모든 문제를 사변적 이해에 초점을 맞춰서 해석하는 지식과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장에 바울 사도가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니까 고린도 사람들의 사변적 지식에 절대로 맞지 않았습니다. 합리적 이해가 성립되지 않는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받아들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늘 바울 설교의 초점은 그리스도 부활에 두고 있습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5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말은 헬라의 사변적 철학에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니까 바울이 전하는 진리를 “미련한 것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헬라 철학의 본고장에 와서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그런 미련하고 이상한 소리를 하느냐?” 이렇게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를 보면 바울과 고린도 사람들의 항변적 반박 성명 같은 말이 계속됩니다.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람들이 하도 미련하다고 하니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1장 22절로 가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 전달! 고린도 사람들에게 항변적으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서 29절로 가면 바울이 더 심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지혜를 너무나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십자가의 진리와 헬라 철학이 맞서는 분위기로 고린도서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바울은 “이 구원의 진리는 그래서 진리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밀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계시를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다.” 본래 이 계시라는 말은 뚜껑을 열어주었다는 뜻입니다. 감추어진 비밀! 지금 여기 항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밖에서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서 보여주니까 그 속의 비밀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밀인데 하나님이 계시를 주어 즉, 뚜껑을 열어 보여준 자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다.” 이런 진리를 역설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비밀을 알게 된 자는 얼마나 큰 힘이 있는가? 이 비밀을 안 사람들은 무엇에나 다 이기는 능력자가 된다.”

오늘 55절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부활의 진리를 알기 전에는 사망이 왕 노릇 하였다는 겁니다. 사망 권세 앞에 모두 다 굴복합니다. 우리 육체의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믿기 때문에 인간이 제일 두려워하고 있는 존재는 사망 권세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망 권세 앞에 인간은 벌벌 떨고 종노릇해왔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위협하는 마지막 카드가 뭡니까? 죽인다는 겁니다. “너 죽여 버릴 거야!” 이러면 꼼짝 못하는 겁니다. 사망의 권세가 그렇게 무섭다는 겁니다. 저는 외국 생활을 많이 해서 비교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언어에는 폭력적인 말이 많습니다. 욕이 얼마나 많은지,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수없이 죽었을 겁니다. 학교 다닐 때부터 만났다 하면 “너 죽일 거야!”입으로 학생들, 친구들을 날마다 죽이고 날마다 부활하고….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았는데 아주 무식한 언어로 자기 자녀들도 날마다 죽입니다. 말 안 들었다 하면 “나가 죽어라, 이 놈!” 날마다 자식들을 죽이는 겁니다. “죽어라”는 말은 고상한 언어입니다. “나가 거꾸러져라! 뒈져라!” 별 소리 다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군가? “군인이다. 경찰이다. 깡패다. 강도다. 도둑놈이다.” 여러분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죽일 테면 죽여라!”하는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이 사람은 겁나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것을 믿고 행패적 생활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마을에서 큰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동네가 항상 소란하고 서로 만날까봐 벌벌 떨고 “죽일 테면 죽여라!” 막 행패 부리면서 돌아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매우 연약해 보이는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이 이 행패자를 가로막았습니다.

“야, 이놈아! 너가 뭔데 동네에서 행패부리며 돌아다니는 거야?” 야단을 쳤더니 “너는 뭐야? 너 죽고 싶어?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야! 덤빌래?” 막 서로 붙었습니다. 이 허름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는 한번 죽었었어!” 그러니까 그 의미가 뭔지 사람끼리는 통합니다.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아이고! 형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쇼.”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 죽은 겁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 같은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공갈 협박, 악의 세력이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왜? 이미 우리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보세요. 예루살렘에서 벌벌 떨고 문을 잠그고 “나가면 죽습니다.” 그러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부활 신앙을 갖게 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잠근 문고리를 자기들 스스로 열어젖히고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 거리로 튀어 나가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는 살아나셨다. 그는 메시야다. 주 예수를 믿으라!” 사람들이 놀라서 “아니, 저 놈들이 죽을라고?” “죽일 테면 죽여라!” 이것이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악의 세력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창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 축복을 받은 존재이지 않습니까?

만약에 인간이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 해결 방법이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동물만도 못합니다. 차라리 동물과 같이 사는 시간까지 살다가 모르는 가운데 죽어버리면 훨씬 더 행복할 텐데, 보세요. 인간은 “나는 죽는다. 틀림없이 죽는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일지 모르겠다.” 이러면서 날마다 사니 인간이 얼마나 불안합니까? 여러분이 “벤허”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겁니다. “벤허”의 다른 제목은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작가 윌리스와 잉게르솔, 두 사람의 작품을 영화화 한 것입니다. 본래 이 사람들은 생각이 다른 데 있었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유명한 도서관을 다 찾아다니면서 재료를 수집했습니다. 재료 수집을 왜 했느냐? “허구의 소문이 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이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허무맹랑한 거짓말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이 허위를 밝혀내는 것이다. 내가 하겠다.” 그래서 자료 수집을 위해서 온 세계를 다니면서 유명한 책들은 다 뒤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를 연구하다가 성령이 충만해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작품으로 변하여 발표된 것입니다.

오늘 사망의 권세를 이겨낸 영원한 승리의 노래가 뭐라고 들립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는 이깁니다. 사망의 권세, 악의 세력, 이 세상천지를 개벽시킨다고 해도 굴복하지 않습니까? 바울 하나를 로마가 못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리에 서있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 부활신앙을 가진 형제들이여!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의 권세는 얼마나 힘이 강한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마저 죽여 무덤에 가뒀습니다. 거기서 만약 끝났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는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무섭게 생각하고 있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진리의 승리, 인간 승리의 영원성을 우리에게 선포하셨으며 그 사실에 대한 믿음의 고백자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부활의 권세를 선물해 주신 것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부활절 예배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 집행한 악의 무리들은 3일 동안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예루살렘 거리에서 악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우리가 승리했다. 이겼다.” 그때 진리는 땅 속에 묻히고 정의는 사라졌고 어두움의 세력자들이 나누는 축배의 흉악한 웃음소리가 소름끼치게 예루살렘 거리를 가득하게 매웠습니다. 그들의 세계는 3일로 끝났습니다.

안식 후 첫날 미명에 그 무덤에 돌은 소리 없이 옮겨지고 진리가 승리하는 조용한 소리가 천사들로부터 들려왔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간혹 우리는 마귀의 세력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마귀 세력이 굉장한 힘을 발휘하는 듯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마치 온 세상이 그 폭력적 세력 밑에 굴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세상의 악의 세력은 아무리 힘이 강하다 하여도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이미 항복한 권세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시킬 때 “이 땅의 마귀가 가득하여도 그리고 우리를 삼키려 하지만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라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가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진리의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오늘 우리는 진리의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바울이 선포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겁니다. 교회사 공부를 하면서 놀라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처음 들어갈 때 어느 나라나 기독교 말살 정책을 썼다는 것입니다. “이게 뭐가 들어왔어? 다 죽여 버려!” 어느 나라나 다 똑같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수없이 죽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악의 세력이 승리한 것인가? 그들의 피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 아침 세계 모든 나라나 특별한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예수는 다시 사셨다.”고 부활을 찬양할 것입니다. 온 세상은 지금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의 찬가로 가득 찬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리의 승리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악의 세력 앞에 굴복하지 마라.” 어떤 때는 악의 세력이 힘있게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굴복하지 마라. 그 세력은 벌써 이미 항복한 권세다.”

음악과 문학의 천재적 은사를 가진 젊은 청년 하나가 살았습니다. 그의 탁월한 음악적 감각이나 문학적 재능이 주변 모든 사람들의 감탄을 얻었습니다. 그의 장래성에 대해서 누구든지 화려한 성취 예언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아마도 너는 대한민국의 베토벤이 될 것이다. 아니면 톨스토이가 되어라!” 자신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 자신을 보면 남보다 훨씬 뛰어난 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문이 많이 났습니다. 한 대한민국의 재벌의 딸이 그에게 관심 있게 접근해서 남편감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저 청년에게 다소 힘이 되어 준다면 분명히 저 사람은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큰 출세인이 될 것이 확실하다.’ 자기 남편감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는 겁니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연주회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면서 수만 관중 앞에서 장엄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지휘자가 되거나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문필가의 고상한 남편감을 기대하면서 사랑을 주고 있는데, 두 사람 사이에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청년이 어느 날 소명을 받아 목사 공부를 하겠다는 겁니다. 이 여학생은 온갖 힘을 다하여 그 생각이 바뀌도록 설득했습니다. “당신은 대한민국의 베토벤이 될 사람인데 왜 목사가 되려고 하는 겁니까?” 소용이 없습니다. 이 여학생은 낙심이 되었습니다.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내가 목사 부인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새벽기도 나가고 개척교회를 하면 그런 거 따라다녀야 하고…. 이를 어쩌면 좋으냐?’ 어느 날 이 처녀는 파고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공원 한쪽 구석에서 몇 명의 청년들이 요란한 북을 울리면서 몇 사람의 찬송가 합창이 막 들려오는 겁니다. “

♬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병 같으니♪”
막 떠드는 겁니다. ‘이건 또 뭐야?’ 몇 명의 청년들이 노방전도를 하러 나온 겁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오!” 한 청년의 등에는 북이 매달려 있습니다. 여름 방학인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삼복더위에 장단을 맞춰 북을 “둥당둥당” 울리면서 예수 믿으라고 땀을 흘리고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전도를 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공원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열심히 나눠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노방 전도해 보셨죠? 누가 관심 갖습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은 핀잔만 줄 뿐입니다. “어휴! 저런, 저런 젊은 사람들이 뭐 할 짓이 없어서 저러고 돌아다닐까? 창피하게….” 다만 할 일이 없는 할아버지 몇 사람이 없는 것보다는 덜 심심하니까 그냥 바라보는 겁니다. 등에 북을 메고 둥당 거리면서 창피스럽게 소리를 지르는 그 청년이 바로 자기가 남편감으로 정해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하도 기가 막혀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습니다.

‘저게 뭐냐? 저게 젊은 사람이 할 짓이냐? 저 고상한 사람이 거리의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무슨 약장사인 것처럼 북을 둥당거리면서 저 짓을 할까? 할 수 없다. 체념이다.’ 떠나버렸습니다. 이 신학생은 6·25 동란 때 포로가 된 중공군 수용소를 찾아갔습니다. ‘내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 그래서 상처 난 환자들을 돌보면서 중국말을 할 수 있는 통역자를 구해서 열광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상처 난 중공군들을 씻겨주려고 세숫대야에 물을 뜨러 가는 길에 쓰러져서 30대 초반에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남대문 교회 배명준 목사님이 집례한 추모 예배에는 맨 앞자리에 검정색 옷차림의 한 여학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들지 않았고 중공군 포로들이 화선지에 먹 글씨를 써서 보내준 추모사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평화의 왕자, 사랑의 사도시여! 선생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복음을 이 불구의 몸을 끌고 돌아가 중국 땅에 전하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우리는 전쟁 때문에 한반도를 온 것이 아니라 복음의 생명수를 받아 중국 땅에 심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선생이 가르쳐준 찬송가를 중국 땅에 가서 우리는 울리게 할 것이며 마지막 설교 시편 23편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중국군 형제들은 일제히 소리 내어 통곡합니다. 우리 모두는 선생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기를 소원하는데 그 해답을 선생이 가르쳐주신 예수의 부활의 진리에서 찾았습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영원히 영원히 선생과 함께 있을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 예수 안에 있을 것을 약속합니다. 어쩌면 선생은 우리와 영원히 같이 있기 위하여 우리 곁에서 이 세상을 떠나셨나이다. 십자가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사실을 선생이 가르쳐준 대로 우리는 믿겠습니다. 선생은 우리 때문에 돌아가셨고 우리는 선생 때문에 영원히 살았습니다. 우리 다시 만나 함께 살아갈 부활의 그 날을 기다리면서 선생의 생명을 바쳐 사랑했던 중국군 포로 일동.”
오늘 바울이 전하는 부활의 진리가 우리 모두의 똑같은 고백이 되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 왜 부활하셨는가? 왜 부활의 진리를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아니하는가? 부활의 신앙이라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가? 바울이 전하여준 진리를 우리 마음속에 그대로 받아들여서 매우 강인하고 담대한 부활의 신앙으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권위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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