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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옛적 같게 하옵소서 (1) (애 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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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같게 하옵소서" 라는 망국의 한을 노래한 제하의 설교는 우리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제목의 설교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1931년 1월 22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제일교회당에서 개최된 전국 S.F.C 동기 수양회 때 동일한 주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976년 3월 9일 고려신학교가 서울에서 복교되었습니다. 복교한 그해 학기 초에 복교 및 개강 감사 집회가 9일부터 12일까지 개최되었습니다. 그 때에도 이 말씀이 표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간헐적으로 여러 주의 종들이 설교한 제목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이 말씀이 시대 시대마다 던지는 영적 파장이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Ⅰ. 빼앗긴 자의 비가(悲歌)입니다.

본문 5장 1절에 『여호와여 우리의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B.C 586년 바벨론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 성읍이 초토화 된 채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왔습니다. 본문은 이때 민족적 비극을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를 통하여 토해 놓는 한의 노래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슬프다 이 성이여(애 1:1)라는 비탄으로 시작해서 예레미야 4장 19절에는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가 없으니』라고 하는 비애에 찬 노래를 엮어가고 있습니다.

1) 기업을 빼앗겼습니다.
본문 5장 2절에 『우리 기업이 외인에게, 우리 집들도 외인에게 돌아갔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기업은 세습재산(patrimony), 유산(inheritance), 상속, 배당, 할당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기업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약속 받은 가나안 땅을 가리킵니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여호수아 시대에 마침내 정복되었습니다(창 12:7; 13:15-17; 수 13:1-14). 그러나 이스라엘이 범죄할 경우에 그 땅에서 쫓겨나리라는 것도 병행해서 말씀하셨습니다(레 26:31-33).
그들이 마땅히 차지하고 살아야 할 땅이지만 유다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바벨론 포로민의 처지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토와 주권을 빼앗기고 백성마저 빼앗겼으니 국가의 구성요소 전부를 강탈당했습니다. 이러한 참상 앞에 예레미야는 비통의 노래를 부르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집들을 빼앗겼습니다.
본문 5장 2절에 『…우리 집들도 외인에게 돌아갔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집』은 '바이트'인데 단순히 사람들이 사는 거주지로서의 집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의 집은 여러 가지의 것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1) 모든 족속들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6절에 『…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든가 히브리서 8장 8절에 『…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라는 구약적 배경에서 보면 모든 이스라엘 족속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2) 가문과 종족 및 자손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1장 33절에 『야곱의 집』이나 누가복음 2장 4절에 『요셉도 다윗의 족속인고로…』나 요한복음 4장 53절에 『자기와 온 집이 다 믿으니라』는 말씀이나 디모데전서 3장 4절에 『자기 집을 잘 다스려…』라는 표현은 구약과 신약에서 종종 가문이나 종족 또는 그 후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성전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2장 16절에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4)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14장 23절에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6장 5절에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을 교회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집이 가정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서 1장 2절에도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가리켜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는 『큰 집』이라고 했습니다.

(5)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 나타난 집은 단순히 사람이 사는 거주의 개념을 넘어서 생각해야 한다는 개연성(蓋然性)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삶의 기반마저 빼앗기고 집을 빼앗겼다는 말은 예배할 수 있는 처소까지 모두 빼앗겼다는 말입니다.

Ⅱ. 수치를 당한 자의 비가(悲歌)입니다.

본문 5장 1절에 『…우리의 당한 것…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처절한 표현입니다 이들이 당한 수치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떠난 수치입니다.
본문 5장 3절에 『우리는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이오며 우리 어미는 과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의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서 엄청난 고아와 과부가 발생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아무런 자기 보호 수단을 가지지 못한 과부와 고아를 유다 백성들로 비유했습니다. 이 말의 이면적인 의미는 바로 유다 백성이 부모를 잃은 고아처럼, 그리고 남편을 잃은 과부처럼 하나님을 잃고 보호받을 데 없는 처량한 민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 자기의 소유를 타인이 주관하는 수치입니다.
본문 5장 4절에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섶을 얻으오며』라고 했습니다.
원문에는 '우리의 물', '우리의 섶'이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자신의 소유인데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절한 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3) 고통당하는 수치입니다.
본문 5장 5절에 『우리를 쫓는 자는 우리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곤비하여 쉴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침략자들의 무자비한 탄압입니다. 한편 고대사회에서는 침략자가 항복한 자들의 목에다 발을 얹었습니다(수 10:24; 사 5:23).

4) 이방인에게 구걸하는 수치입니다.
본문 5장 6절에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애굽은 앗수르에게, 앗수르는 바벨론에게 패망했지만 바벨론의 지배는 비교적 자유롭고 먹고 사는 데는 풍요로웠습니다.
여기 『악수했다』는 말은 그들과 동맹을 맺은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주종관계를 약속하고 그들에게 구걸하는 비참한 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렘 43:1-7).

5) 이방인 하급 관리자들에게 지배를 받는 수치입니다.
본문 5장 8절에 『종들이 우리를 관할함이여…』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남유다 전역을 관리하기 위한 바벨론의 중하급 관리자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요 제사장 나라였던(출 19:6)유다에 비교할 때 예레미야는 그들이 한갓 종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6) 궁핍의 수치입니다.
본문 5장 10절에 『주림의 열기로 인하여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먹지 못한 기갈로 살이 빠지어 검게 된 피부를 말합니다(애 4:8; 욥 30:30)

7) 여인들을 보호할 능력을 상실한 수치입니다.
본문 5장 11절에 『대적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자들이 강제로 겁탈당하는 모습을 보고도 유다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8)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의 수치입니다.
본문 5장 12절에 『방백들의 손이 매어 달리며 장로들의 얼굴이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유다 지도자들이 나무에 달려 고문당하고 죽어가는 것을 하나님의 저주(신 21:23)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9) 유다 공동체의 질서가 무너지는 수치입니다.
본문 5장 14절에 『노인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소년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원로들과 재판관들이 주재했던 성문도 폐허가 되었고 권위를 상실한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더 이상 존경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다 공동체의 위계질서가 붕괴되는 자멸의 수치입니다.

10) 희락이 사라진 수치입니다.
본문 5장 15절에 『우리 마음에 희락이 그쳤고 우리의 무도가 변하여 애통이 되었사오며』라고 했습니다.

11) 과거와 비교당하는 수치입니다.
본문 5장 16절에 『우리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라고 했습니다.
국토와 주권을 빼앗긴 백성들이 모두 사지로 끌려가는 참혹함을 이전에 남유다의 찬란했던 영광과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Ⅲ.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는 자의 비가 (悲歌)입니다.

1) 조상의 죄악을 단절하지 못한 후회입니다.
본문 5장 7절에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라고 한 말은 조상의 죄가 자손에게 미친다(렘 16:11)는 의미가 아니라 열조들의 죄악을 단절하지 못한 결과 후대에 와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일입니다.

2) 청소년들을 보호하지 못한 후회입니다.
본문 5장 13절에 『소년들이 맷돌을 지오며 아이들이 섶을 지다가 엎드러지오며』라고 했습니다.
청소년은 나라의 미래이자 희망입니다. 이들에게까지 고통에 동참시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입니다.

3) 하나님의 성전이 더럽힘을 당하는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본문 5장 18절에 『시온산이 황무하여 여우가 거기서 노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시온산은 예루살렘과 그곳에 있는 성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공적으로 만나주시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시온산이 파괴되고 그곳에 여우가 논다는 것은 유다 백성들의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옛적 같게 하옵소서" 라는 통한의 탄성은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는 슬픈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교회를 세상의 윤리적 잣대로 보는 데서 끝나면 안됩니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보다 근원적인 것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천국 신앙을 빼앗긴 오늘의 한국교회 성도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비참한 일입니다.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의 집(교회)을 가지지 못한 성도, 즉 이른바 철새교인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진풍경은 실로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교회로부터 받은 자기 직분에 사명감이 없는 것은 수치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수치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쟁취하지 못하고 불신자들에게 빼앗기는 것이 얼마나 큰 수치입니까?
불신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구걸하는 참혹한 일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난과 궁핍과 조상들의 망령된 유전을 단절하지 못하는 미온적인 태도는 결국 화를 자초할 것입니다. 남자들이 약한 부녀들을 보호할 힘이 없고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을 하나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수치입니다. 오늘날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위계질서가 함몰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혼란입니다.
인간의 기본권에 대해서는 평등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할과 기능마저도 평등해야 된다는 고집은 바로 잡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 전도하는 시간, 봉사하는 시간이 즐거워야 합니다. 교회로부터 받은 자기 직분에 애착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듣고 싶은 노래는 있지만 다시 듣고 싶은 설교가 없는 것은 우리 모두의 수치입니다.(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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