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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한 가정(2)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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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엔 가족간의 관계의 근본적인 대전제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별, 나이, 직업 그리고 민족의 차이를 뛰어 넘어 모든 사람을 똑 같이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가족간의 관계는 근본적인 면에서 평등한 관계여야 합니다. 이 전제하에 아내는 남편의 리더십을 존중해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진실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가정 안에 있는 또 다른 중요한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아무리 아름답고 건강하다고 해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깨진 다면 그 가정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고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갈 수가 없습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권위를 상실한 채 소외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가정이 많아지면 사회 역시 병들게 됩니다. 도덕적 퇴폐와 무질서에 휩싸이게 되며 많은 노인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독거노인들 중에 자녀가 있는 분이 적지 않다는 점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바울이 가르쳐 주는 보모와 자녀의 관계를 잘 배워 먼저 우리 가정에서부터 실현해갈 수 있길 바랍니다. 하여 각 가정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바울은 먼저 자녀의 의무부터 언급합니다.

1. 자녀의 의무(1-3)

바울은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불러내심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을 걱정하는 가족들이 찾아오자 예수님은 냉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막 3:33-35):

33 ...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34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이 말씀을 복음서 전체의 맥락과 분리해서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예수님은 마치 기존의 가족제도를 해체하려는 의도를 갖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전 베드로의 집에 방문하셔서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바 있습니다(막 1:29-31).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심으로 어머니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보이셨습니다(요 19:26-27). 예수님의 소년시절에 대한 유일한 기사에서 누가는 예수님이 부모를 순종하면서 지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눅 2:51). 이로서 예수님은 부모에 대한 순종이 자녀가 지켜야 할 의무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가족을 존중하면서도 초월하는 더 크고 넓은 공동체를 만들어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새롭게 창조한 공동체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가정에 있어서 자녀들은 여전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족에 부여한 근본적인 의미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창조하시고 부모를 자녀들을 위한 믿음과 도덕의 교사로 세우셨습니다(신 6:4-9). 인간은 영적이고 도덕적인 존재입니다. 부모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자라야 하기 때문에 동물과는 달리 근 2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명실상부 독립적인 존재가 됩니다. 이 과정을 성공적으로 거치려면 부모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아이들이 부모에게 너무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을 보면서 은근히 걱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이 너무 기죽고 개성과 줏대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가, 너무 평범한 소위 범생이 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합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버릇없이 구는 것을 볼 때 제가 뭐가 되겠구나 은연중 기대하는 경향마저 있습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저는 서구 강대국들의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숭상하거나 수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꼭 배워할 점이 있습니다. 제가 영국사람들과 신앙생활을 하면서 놀란 사실이 있습니다. 영국의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이 너무나 잘 훈련이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어른들과 거의 1시간 이상을 예배를 드릴 때에도 어른들과 똑 같이 자리에 가만히 조용하게 앉아 있습니다. 부모에게 철저히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저녁 8시쯤 되면 어김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놀다가 잡니다. 간식도 부모가 허락하는 만큼만 먹습니다. 우리 기준으로 보자면 아이들의 기가 너무 꺾여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이 어른이 되면 매우 독립적이고 개성과 주관이 뚜렷한 정체성을 갖게 된다는 점입니다.

반면 우리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서양 아이들에 비해 훨씬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납니다. 예배시간에 떠들거나 이리 저리 좀 다닌다고 해서 무슨 죽을 죄를 진 것처럼 혼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에겐 아이들의 기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아이들은 부모를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때를 쓰면 자기 뜻대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식에게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죽지 않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이상하게도 자기 정체성이 확고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대체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런 대조적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권위에 순종하며 자란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 자아를 더 잘 형성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부모로부터 유전자를 받아 세상에 태어납니다. 상당부분 부모를 닮아 태어나는 것이죠. 이성과 양심으로 성장해갈 수 있는 것들도 갖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이 결정된 존재는 아닙니다. 마치 포맷후 기본적인 운영체제를 설치한 하드디스크와 비슷합니다. 그 위에 어떤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느냐에 따라 컴퓨터의 기능이 달라지는 것처럼 사람도 자라는 과정에서 무엇을 배우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기계적이지 않고 매우 인격적이란 점에서 컴퓨터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은 더 설명이 필요 없겠죠.

이렇게 인격적으로 새로운 정보를 받아드리는 과정에서 아이들에겐 믿고 순종할 만한 권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일정한 나이가 되기 까진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고 무엇을 거부해야 할지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순종할 권위가 있는 경우 아이들은 일정하게 자아를 형성해가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가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순종할 권위가 없을 경우 때로는 기분 내키는 데로 때로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휩쓸려서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일관성 있는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집니다. 사람은 일단은 권위 있는 존재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이면서 자아를 형성해가야 합니다. 그 후에야 다양한 정보와 마주치면서 반성적 성찰을 통해 자신을 변화 발전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순종하라는 말은 자녀들에게 준 것이지 부모에게 준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는 이 말씀을 자녀를 복종시키기 위한 강압적인 무기로 마구 휘두르면 안됩니다. 그것은 병든 권위주의적 태도입니다. 권위 있는 부모는 자녀의 자유를 존중하고 즐거운 순종을 유도합니다. 권위주의는 연약함의 표시요 권위는 건강한 힘의 표현입니다. 부모는 권위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 권위주의자가 되서는 안됩니다.

둘째, 부모에게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은 순종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부모가 주님이 보실 때 잘못된 것을 가르치거나 요구할 때 자녀는 부모에게 불순종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은 예수님보다 부모를 더 사랑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마 10:34-36). 물론 이런 갈등상황에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과 부모의 뜻이 다르다고 해서 지금 당장 불순종하여야하는 사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불신자 부모가 자녀의 세례 받는 것을 반대할 때 더 기다릴 수도 있는 문제이죠. 꼭 불순종해야할 경우에도 부모에게 무례해선 안됩니다. 부모를 순종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의무는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언제까지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할 의무가 있는가에 대한 해답도 얻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나이까지라고 원칙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나이는 문화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원칙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몸소 보여주신 것과 같이 부모를 더 이상 순종할 나이가 넘었다고 해도 부모를 공경할 의무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이어서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일반적인 양심과 도덕에 비추어보아도 옳다는 말입니다. 각 나라의 문화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동양문화와 한국문화를 보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양심과 도덕도 무시하면 안됩니다. 교회가 깊이 병들면 세상이 오히려 양심적이고 더 도덕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일반적인 양심과 도덕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바울은 구약말씀 즉 십계명의 제5계명에 근거해서 자녀에게 보모를 공경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합니다(출 20:12). 유대인들은 제5계명을 전통적으로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 중에 첫 판에 기록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제5계명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즉 자녀들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오래 산다는 약속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잘되고'라는 말을 첨부하고 '여호와가 네게 준 땅'이란 표현을 그냥 '땅'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차이가 있음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약속은 부모를 잘 공경할 때 안정되고 건강한 사회를 이루어갈 수 있다는 일반적인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2. 부모의 의무(4)

존 스토트 목사가 잘 지적한 것처럼 바울은 아버지만을 언급하고 있지만 언어의 용법에 비추어 볼 때 아버지는 어머니도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일단 결혼하면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 되기 때문에 자녀에 대한 의무 역시 아버지 어머니 모두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옳습니다.

부모의 첫째 의무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권위는 제한적인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앞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부모는 순종하라는 말을 무기처럼 휘두르면 안 됩니다. 이는 바울 당시 로마의 강력한 가부장적 문화를 비추어 볼 때 가히 혁명적인 권면입니다. 당시 로마 문화권에서의 부모의 자녀에 대한 권리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윌리엄 버클리에 의하면 아버지는 자식을 노예로 팔 수도, 쇠사슬에 묶어서 일시킬 수도, 자기 마음대로 벌주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모가 권위를 함부로 휘두르는 권위주의자가 되면 안 됨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언제 아이들이 부모 때문에 노엽게 됩니까? 부당하게 야단칠 때, 감정적 분노를 폭발할 때, 아이의 인격을 모독할 때 등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책망할 때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감정을 잘 절제하여 온유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절대 아이의 인격을 비하하는 말을 쓰거나 다른 사람 앞에서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연약하고 실수가 많으면서도 교만한 제자들을 참으로 온유하게 다루셨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면서도 그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시고 자신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주장해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부모의 두 번째 의무는 자녀를 기르는 것입니다. 기른다는 말은 사랑스럽고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자녀들을 품에 안아 키운다는 뜻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런 양육을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가 그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이 점에서 오늘 많은 부모들이 자녀교육과 양육의 책임을 포기하고 학교나 주일학교에 일임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학교와 주일학교 교육 역시 매우 중요하지만 부모의 자녀교육을 대체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유산은 교육입니다. 돈이나 땅이 아닙니다. 만일 물질적인 풍요를 자식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자식을 애완동물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죠. 물론 오늘처럼 맘몬이 막강한 신(神) 노릇을 하는 사회에서 가난한 부모는 자녀에 대하여 정말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사회의 제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부당한 사회에서라도 부모가 자신감을 가지고 자녀를 교육시키면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훌륭한 존재로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담대하게 물질적 재산이 없더라도 영적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중요합니다(행 3:6).

먼저 주님의 훈련으로 길러야 합니다. 이는 자녀가 잘못했을 때 야단치고 혼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관련해 잠언에 아주 소중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매를 아끼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훈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잠 13:24).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으나, 훈계의 매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잠 22:15). '매와 꾸지람은 지혜를 얻게 만들어 주지만, 내버려 둔 자식은 그 어머니를 욕되게 한다'(잠 29:15). 이 말씀들은 모두 자녀를 매를 때려서라도 강하게 훈련시키는 것이 진정한 자녀사랑임을 강조합니다. 강한 훈련을 통해 아이들의 마음에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각인 됩니다. 이와 아울러 강한 정체성도 갖게 되는 것이죠. 야단을 안 친다고 아이들의 기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틀린 것인지를 제대로 모르는 희미한 존재가 되 버리고 맙니다. 물론 부모가 도덕적으로 항상 옳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부모로부터 선과 악을 배워둬야 나중에 다른 기준들을 만나게 될 때 깊이 고민하면서 자신의 도덕적 감각과 덕성을 성숙시켜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엘리 가문의 비극을 돌아보면 자녀교육의 의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물로 받친 고기를 삶는 중 임의로 취하기도 하고 기름을 태우기 전의 고기를 강제로 취해서 구어 먹기도 하고 심지어는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까지 했습니다. 본분을 망각하고 본능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엘리가 아들들을 불러서 야단을 치기는 했지만 변죽을 울리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사자가 엘리에게 나타나 강하게 책망합니다(삼상 2:29); '... 어찌하여 너는 나보다 네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나에게 바친 모든 제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다가, 스스로 살찌도록 하느냐?' 엘리의 가문은 망했습니다.

둘째로 주님의 훈계로 길러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 지, 사람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 지를 잘 가르쳐야 합니다. 현대의 잘못된 관행은 옳고 그름에 대하여 자녀가 스스로 선택하도록 해야지 부모가 주입하면 안 된다는 착각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진공 속에서 무언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주입 당한 전통 속에서 생각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아무 것도 안 가르친다는 것은 자녀를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신이 확신하는 바를 용감하면서도 자녀의 생각과 선택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잘 가르쳐야 합니다.

맺음말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가정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새롭게 마음에 새깁시다. 자녀는 부모의 권위를 존중하고 주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길러야 합니다. 그럴 때 가정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름답게 흘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여러분 가정에 넘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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