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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악의 상황을 이기는 기도 (막 14: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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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상황을 이기는 기도 (막 14:32-42)

이 시간에 “최악의 상황을 이기는 기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누구에게나 일생에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이 올 밖에 없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두려워하거나 절망하거나 울며불며 고통스러워합니다. 혹시 이런 상황에 계시다면 오늘 말씀으로 큰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상황을 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산도 큰 산입니다. 이 산이 옮겨진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에게도 그런 상황이 왔습니다. 본문의 우리 예수님께서도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시고 가장 처절하고 간절하고 긴박하고 긴장된 상황을 맞이하셨습니다.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고 죽으심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어디 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것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그럼 그런 상황에서 드리는 기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그것을 우리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기도여야 합니다.

36절에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그랬습니다. 여기 주님이 부르신 아바는 아람어로서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 되던 대단히 친근한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아빠와 비슷한 용어입니다. 이 친근한 부름 속에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우리 주님의 믿음이 배어 있음을 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나의 모든 것을 다 사랑해 주시는 감사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어떤 문제든지 도움 받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더 나를 아시고 사랑하시기에 내가 방심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미리 보여주시고 지시하시는 것을 봅니다.

새가 알에서 깨어나면 제 소리를 내듯이 친근하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영적인 본능입니다. 그래서 롬8:15에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했고, 갈4:6에도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를 넉넉히 이기도록 사랑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가지고 기도하면 최악의 상황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2. 전능의 하나님을 믿는 기도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하나님으로 믿고 기도하셨을까요? 다시 6절에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그랬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육신의 부모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한계가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한 달간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고기를 먹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혹은 남자를 알지 못한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아들을 낳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자주 유산하여 자녀를 낳지 못한 가정인데 하나님께서 기도해 주라 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었는데 하나님께서 출산에 성공하게 해주셨습니다. 수넴 여인이 그런 사람이 아닙니까? 엘리야는 기도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가뭄도 내리고 비도 내렸습니다. 엘리사는 죽은 자도 살렸습니다. 여호수아는 해와 달도 멈추게 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전능의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만이 최악의 상황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도 믿음 위축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시121편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했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있는 것을 없게 하시며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이라면 불가능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최악의 상황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3. 나의 상황을 솔직히 쏟아놓는 기도여야 합니다.

주님의 솔직한 기도의 고백을 본문에서 봅니다. 33-34절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35-36절에 기도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어떻게 주님이 이렇게 기도하실 수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여기에 아주 귀한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상황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자만이 그 상황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기도란 지극히 이기적인 것입니다. 이기적이란 자기를 위한 기도라는 말입니다. 기도란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 고상하고 수준 높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재로 기도는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란 각자 고통에 빠져있는 그 현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극형을 앞에 두시고 얼마나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하셨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시면서도 한 편으로 인간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그 상황을 조금도 숨기지 않으시고 아버지 앞에 내놓으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이든 아버지 앞에 조금도 가감하지 말고 다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무슨 문제가 됐든 한나의 기도처럼 아버지께 그 상황 그대로 울며불며 다 내어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상황을 만났으면서도 너무나 냉담하여 그대로 내놓지 못하기 때문에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4. 몸과 마음을 다하는 최선의 기도여야 합니다.

눅22:44에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하셨으면 천사가 하늘로서 나타나 도왔겠습니까? 그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도 “큰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하셨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하실 때도 크게 소리 지르셨습니다.

극복하기 어려운 태산 같은 문제가 있다면 몸과 마음을 다하여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개인의 영성 수련을 위해 침묵 기도를 하였습니다. 나스파르의 아브라함은 ①혀의 침묵 ②몸의 침묵 ③혼의 침묵 ④지성의 침묵 ⑤영의 침묵으로 나아가는 기도를 말했습니다. 이런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에서는 부르짖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거대한 핍박과 고난 앞에 부르짖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어떻게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18세기 부흥사 요나단 에드워드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는 너무도 애써 기도한 나머지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마루바닥이 움푹 파여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몸 드리고 마음 드려 기도하는 최선의 기도여야 합니다.

5.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36절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셨습니다. 기도의 성격은 지극히 자기를 위한 것이지만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이루는데 있습니다. 기도의 열정은 자기를 위한 기도에서 타오릅니다. 그러나 그 열정이 점점 쌓이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 따라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발전해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마음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우리 주님도 기도를 통해 생각이 바뀌어 가지 않았습니까? 죽음의 두렴을 이기고 대속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귀중한 기도의 모범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는 회개의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내가 변화 되고 회개할 때 우리의 상황은 변하게 됩니다. 그러나 변화는 없고 내 뜻만 관철하려는 강력한 의지는 완고한 자아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응답이 없습니다. 도리어 더 혹독한 고난의 연속일 뿐입니다. 처음 동기는 어떠했든지 부르짖고 기도하다가 내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만이 우리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욜2:13에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변하지 않는 상황변화는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나를 순복시키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를 마치신 주님은 기쁨으로 고난을 맞이할 만큼 강하고 담대해지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어나라 함께 가자”(42절)고 제자들을 깨웁니다.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기도의 광장으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일단 기도로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일단 만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는 시작되고 또 깊어지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내가 변화 되면서 더 큰 축복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을 본받아 기도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성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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