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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신앙 인생을 재건하라 (느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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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 우리의 세대는 여러 가지가 무너져 가고 있음을 경험합니다. 아직도 무너진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무언가가 점점 무너져 가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 개인의 양심이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가정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회 정의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튼튼하던 군대의 기강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교회도 무너지고 있습니다.학원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나라도 무너지고, 세계 전체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빌리그레함 목사는 말하기를 "오늘날의 세계는 불타고 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인간의 불을 절대로 끌 수 없다. 지옥의 귀신들은 강렬하게 활개를 치고 있다. 세계는 지금 불탄다. 우리는 아마겟돈을 향하여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다. 바야흐로 세계의 지붕은 주저앉
으려 하고 있다."하고 오늘날 이 세계의 영적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 민족의 영적 상태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오늘날 해보고 싶습니다. 대답은 비관적입니다. 이 민족의 영적 상태도 침강의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그렇게 뜨겁던 우리 민족의 신앙도 생활 환경이 좋아지고 조금 살 만해지고 모든 것이 편해지자 지금은 많이 식어져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 민족의 따뜻한 인정과 후한 인심도 이제는 주저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근면, 검소하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하던 우리 민족 특유의 근면성도 이제는 완전히 주저앉아 버린 듯 합니다.

그렇다면 나와 나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나의 옛날의 준수하고 뜨겁던 믿음은 지금은 많이 식어 있지 않습니까? 나의 가정의 영적 상태는 지금 무너져 있지 않습니까? 나의 가정의 행복은 지금 무너져 있지 않습니까? 나의 가정의 기쁨도 무너져 있지 않습니까? 나의 가정의 화목과 사랑도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습니까? 나의 가정의 기름진 축복도, 재정 상태도, 이상하게 지금 무너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러한 시대에 이러한 질문을 우리는 해보고 싶습니다.

본문 성경에서 이스라엘 거룩한 성도인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완전히 무너져 버려 있고, 불타버린 상태로 등장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불탐과 훼파 됨에는영적인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거룩한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이 땅에 세우라고 지시하신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학개 서에 보면 성전 재건의 모습이 나오는데 예루살렘 성의 재건과 성전의 재건은 같은 의미, 같은 뜻을 가지고 같은 방법으로 시행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는 누차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약 시대의 예수님의 몸으로 그 의미가 변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신자의 몸으로 성전이 말씀되어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셨기에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신 것이요, 또 우리 시대에는 우리 몸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심으로 내 안에 하나님이 거하심으로 내가 곧 성전이라고, 우리 신자들이 성전이라고 이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전을 포함하고 있는 이 예루살렘 거룩한 도성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이 땅의 경건한 신자의 가정, 이 땅의 경건한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 보면 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역사적으로 수차에 걸쳐서 왜적의 침입을 받아서 무너지고, 불에 타고, 훼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때로 불타버리고, 때로 훼파 되어 무너져 버린 상태로 있었던 적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선지자들은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예루살렘 성의 무너짐을 경고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하나님의 긍휼 하심으로 인하여 이 성과 성전은 회복되고 다시 재건되고 또 다시 세워지곤 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통해서 또 신약에도 계속 되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회복, 재건되고, 무너지고, 회복, 재건되고 하는 반복되는 이 진리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이 땅의 예루살렘의 보석이라고 할 수 있는 신자의 속 사람과 신자
의 가정과 신자들의 신앙 공동체로 무너짐과 회복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무너져 있고 우리의 영적 상태가 무너져 있고 우리 예수 믿는 가정이 어려움에 처해있더라도, 이렇게 무너짐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다시 재건되어야 하고 다시 회복되어야 하고다시 일어나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또 성경이 보여주는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
니다.

이 본문에 나와 있는 무너짐의 상태와 그리고 그것을 다시 재건하려고 노력하는 느헤미야의 방법을 이 시간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 인생, 우리 가정의 재건의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본문의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어느 날 수산궁에 살고 있던 느헤미야에게 자기 고향 예루살렘의 소식이 들려왔는데, 3절에 보니까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 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예루살렘 성이 무너져 있었던 것입니다. 성문들은 불타버린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성을 한 번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신앙은 지금 무너 내려 있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 가정,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님이 주관하셔서 이루어진 우리 가정은 지금 무너진 상태로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인생의 성은 재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까? 이 땅에 거하는 하나님의 택하신 그리스도인 우리들이 우리들의인생이 지금 무너진 상태로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의 인생은 재건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우리 인생에 손을 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첫 째로 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첫째로 느헤미야는 물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어떠한 형편에 있는 가를 물었습니다. 인생의 재건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한 정직한 질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현대인의 영적인 커다란 위기는 자기 상황에 대한 질문, 자기 성찰에 대한 질문을 상실한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떠한 형편에 있는가? 내 영혼의 모습은 어떠한가? 내 속 사람은 지금 어떠한 형편에 있는가? 내 신앙은 지금 어떠한 상태 속에 놓여 있는가? 내 가정은 지금 어떠한 형편 속에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와 같은 자기 자신의 형편에 관한 정직한 질문을 먼저 던져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부패와 어려움과 곤고한 자기 자신의 모습이 지적되는 것을 기피한 나머지 우리는 누구나 사실 이러한 질문을 내심 꺼리고 있습니다. 계시록 3장에 보면 계시록의 기자 요한은 사데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는데, 그 교회 속에 있는 영적 형편을 가리켜서 이렇게 진단합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그 다음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너의 형편을 보게 하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하지만 네 곤고한 것과 네 가련한 것과 네 눈 먼 것과 네 벌거벗은 것과 네가 네 수치를 알지 못하는 도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 영적 성찰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형편을 물어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현대 철학은 인간의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 때로 눈을 감아 버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잘 드러내는 책이 얼마 전 미국에서 출판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I am o. k. Your o. k." "나는 괜찮아. 당신도 괜찮아. 너무 골치 아프게 문제성을 가지고 문제삼지 말자." 이것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서 미국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철학에게서 때로 우리는 기만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조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너진 모습을 진단하기에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무너진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절대로 내 인생이 재건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유명한 R. A. 토레이 목사님에게 어떤 부인이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부인은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아무래도 진리가 깨달아지지 않아요. 어떻게 하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진리를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유명한 토레이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당신이 진리를 보기 원합니까? 진실을 원합니까? 그렇다면 이런 기도를 해보십시오. '하나님 나를 보여 주십시오. 하나님 나를 보여 주십시오. 먼저 나 자신의 적나라한 인생의 모습을 한 번 보기를 원하나이다. 내 영혼의 모습을, 내 신앙의 모습을, 나의 가정의 영적인 모습을 한 번 보여 주옵소서.'"

시편 139편 23절, 시편 기자의 기도가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그리고 이것으로 나를 깨우쳐 주옵소서.'

아무도 자기 자신의 찢겨진 참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회복을 열망하지는 않습니다. 인생의 재건은 이처럼 정확한 자기 진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자기 진단을 정확히 한 사람은 그 때부터 자기 인생에 대한 재건의 열망이 시작됩니다. 바울에게 그런 열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진단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진리 앞에 나왔고, 자기의 모든 것을 말씀 앞에 내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깜짝 놀랄 만한 자기 진단 앞에 도달했습니다. 로마서 8장 24절 에 바울은 이렇게 자기를 진단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그리고 같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거하지 않는 줄을 나는 아노라』 그런데 여러분, 바울이 이와 같은 예수의 말씀 아래서 자기를 정확하게 진단하기 전에 어떠한 이야기를 했었습니까? 참 진단의 눈을 뜨기 전에 바울이 고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던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자면 흠이 없는 사람이로다. 나는 도덕적으로 사람들에게 약점을 잡힐 만한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다." 옛날에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이렇게 큰 소리 치던 도덕적인 인간 바울이 하나님 앞에 영적인 자기 진단을 시작했을 때, 그는 말하기를 "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줄 아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했습니다.

바른 판단을 하고, 자기 회복에 열망을 간구하며, 예수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발견 앞에 도달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면 나를 구원할 구세주를 찾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영영 그 사람은 재건의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재건은 먼저 정확한 자기 진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둘째로, 4절에 보시면 느헤미야의 반응이 나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느헤미야의 반응은 고민과 울음과 슬픔이 이제 시작됩니다. 인생의 재건은 이 창조적 고민과 창조적 슬픔을 통해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계기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이 땅에서 하는 근심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 그것은 하지 말라.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영적 근심은 하라. 이것을 하면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많은 고민을 하고 삽니다. 세상 고민과 세상 근심을 많이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신앙 재건에 대한 고민, 내 가정의 영적 거룩한 회복에 대한 고민, 느헤미야처럼 수일을 울고, 슬퍼하며 하는 고민을 혹시 여러분들은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모든 식음을 전폐하고 내 가정의 신앙 부흥을 위해서 거룩한 도성,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거룩한 예루살렘 도성인 우리 가정과 내 신앙의 재건을 위해서 느헤미야처럼 울면서 내 형편을 보고 울면서 고민하며 괴로워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는 슬퍼했습니다. 예루살렘 무너진 성을 생각할 때마다 잿더미로 변해 버린 예루살렘 성을 생각할 때마다 '이 성은 다시 재건되어야 한다. 반드시 재건되어야 한다. 나는 예루살렘 성 재건을 위해서 내 자신을 헌신해야만 한다'라는 행동의 결단을 유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은 그래서 창조적인 고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또 하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현대인의 문제는 현대인들이 이런 영적 고민을 전혀 안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첫 째는 영적인 자기 진단을 안 한다는 데에 있고, 둘 째는 회복에 대한 영적인 갈망과 고민을 안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내 영혼의 타락을 알면서 내 인격의 부패를 보았으면서도, 내가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신앙의 퇴락을 보았으면서도, 진단했으면서도, 죽음이 다가 오고있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내 인생과 가정은 결산되어야 한다는 이 엄숙한 사실을 알면서도 이것에 대한 애통과 이것에 대한 고민과 이것에 대한 근심이 없는 현대인, 그것이 바로 오늘 날 수많은 현대인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현대인들의 상태를 마크 트웨인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학생 하나가 유명한 해학적 소설가인 마크 트웨인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세계의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선생님은 걱정이 안되십니까? 나는 걱정이 되는데" " 이 사람아 그게 걱정이 되면 걱정을 하지 않으면 되지 않을 것 아닌가?" 그래서 의도적으로 우리의 걱정과 염려를 회피하려는 현대인의 문제를 우리는 쉽사리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 지옥에 대한 설교를 하면 대체로 싫어하는 것도 그러한 현대인의 풍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7장 3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의 사람을 내가 무엇으로 비유할꼬 오늘 이 역사를, 오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지구상의 사람들을 우리가 무엇으로 비유할꼬"하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이 서로 앉아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도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따라서 울지 아니하였도다." 울어야 할 시간에 울지 않고 있는 사람들, 춤추어야 할 시간에 춤추지 않는 사람들, 이 반응 없는 이 삐뚤어진 세대에 대해서 말합니다. 당연히 울어야 할 자기 자신을 보면서 울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대를 우리 주님은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훼파 된 자기의 성읍을 바라보면서 울고, 금식하며 탄식했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는 요엘 12장 22절에 말하기를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 오라. 옷을 찢지 말고 네 마음을 찢으라. 그리고는 내게로 돌아 오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울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이 창조적 고민, 창조적 근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이러한 근심으로 마음속에 눈물을 흘리며,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내 영혼은 정말로 구원받았는가? ' 이런 마음의 근심과 고민을 깊이 해 보신 적 없습니까? 지금 현재 내 신앙은 성장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리막길로 가고 있는가? 여기에 대한 철저한 애통과 고민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거룩한 그리스도를 얼마나 닮아가고 있는가? 이런 아픔과 이런 고민이 없이는 아무도 영혼의 재건을 기대 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상 3장에 엘리 제사장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제사장의 아들들이 아주 형편없었습
니다. 자녀 교육에 실패한 이 엘리 제사장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집을 심판하겠다. 네가 알고 있는데 죄악을 인하여 네 집안을 심판하겠다. 그것은 네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였다. 네가 알고도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자녀가 또는 가정의 영적 형편이 아주 무너져 있는데도 이것을 알고 있는데도 더 이상의 영적인 고민을 하지 않는 그 제사장의 경우가 오늘 우리의 시대에 반복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창조적 고민과 이 창조적 애통과 이 창조적 아픔이 없이는 아무도 자기 인생을 재건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애통을 시작해야 합니다. 고민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여도 좋다는 이 고민, 하나님
이 해도 좋다는 이 구원을 이루는 근심, 창조적 아픔과 영혼의 고통과 내 영혼의 모습을 끌어안고, 주님 앞에 이제 애통하면서 시작하는 이 창조적 근심과 고민이 여러분에게도 있어 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 울라고 하는데 울지 않습니까? 애통하라고 하는데 왜 우리는 애통하지 않습니까? 애통할 줄 알아야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세 번째로 4절 하반부에 보면 그가 첫 째, 영적 형편을 깨달은 후에 둘 째, 울고 앉아서 슬퍼한 후에 세 번째로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5절 처음 부분에 보면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그는 기도를 시작합니다. 인생의 재건의 위대한 출발은 기도에 있습니다. 그는 고민하며 울고 슬퍼하다가 마침내 그것이 기도로 변합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울고 고민하며 슬퍼하다가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는데 느헤미야의 경우는 울고 슬퍼하며 고민하며 근심하다가 그것이 드디어 기도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그는 그 문제를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입술을 엽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드디어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그는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 도성에 훼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금식하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기도를 하면 됐지 왜 금식하며 기도합니까? 그만큼 사람의 마음이 답답한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그는 견딜 수 없는 고민스러운 심정인 것입니다. 그는 전심을 쏟는 기도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식도 전폐해 가면서 전 심령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기도의 사람, 그리고 복음의 용장이었던 윌리엄 부스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부스 선생님, 선생님의 그 위대한 기도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윌리엄 부스는 대답하기를 "기도할 때 나는 이 기도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합니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이 지금 이 기도에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십시오. 사활을 걸고 기도하십시오." 느헤미야는 이 사활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술 맡은 관원입니다. 왕의 앞에서 술에 독이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먼저 맛을 보면서 그리고 술과 음식을 배설하는 술 관원장 이었습니다. 참 높은 직책입니다. 왕 앞에 늘 술자리가 배설되면 늘 그곳에 같이 앉아서 술을 먼저 맛보고 좋은 술을 냅니다. 음식도 같이 먹어야 합니다. 왕의 대화에 상대가 되어야 합니다. 왕이 매일처럼 술을 마셨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음식을 전폐하고 수일동안 기도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금식하며 기도한 것입니까? 우리는 때로 기도 생활 할 때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느헤미야는 도무지 자기 직책 상 금식하며 기도할 수 없는 술 맡은 관원인데도 하나님을 더 의뢰하면서 그는 수 일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기로에는 인생의 회복에는 이런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이 세 가지 첫 째, 예루살렘의 형편을 물어보았고, 둘 째, 고민하며, 슬퍼하며, 앉아서 통곡했고, 그러나 세 번째로 다시 결심을 하고 간절히 기도한 느헤미야, 드디어 이제 4개월이 지난 다음에 느헤미야가 바라는 인생의 재건인 예루살렘의 재건이 시작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1장 1절을 보십시오.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 년 기슬르월에』기슬르월은 1월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2장 『아닥사스다왕 이십 년 니산월에』니산월이라는 것은 4월 내지 5월을 가리킵니다.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이 없었더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드디어 왕이 느헤미야에게 "네가 마음에 무슨 고민이 없느냐?" 물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말씀을 드렸더니 드디어 왕이 허락을 해서 그 해 고향 예루살렘 재건에 첫 날 첫 시작이 출발되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회복의 시작, 재건의 시작이 드디어 온 것입니다. 기도하고 4개월을 기다린 다음에 드디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을 보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그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최후로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것은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죽기 전에 최후로 부탁하는 말씀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간곡히 하룻밤에 7번씩이나 간곡히 부탁한 것이 요한 복음 16, 17장에 나오는데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라.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다." 7번이나 반복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 자신도 마지막으로 제자들 앞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말씀으로도 최후로 기도하라는 것을 말씀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기도하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잡혀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40일 동안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그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기다려라"는 것이지요.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자 예수님의 최후의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기도하고, 기다려라"입니다. 느헤미야도 1장에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 4개월을 기다렸더니 드디어 때가 온 것이요, 하나님의 손이 그 인생 속에, 그 땅에 임하여서 재건의 시작의 날이 도래한 것입니다. 기도하고, 기다려라. 우리 인간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다 주관하시는데요. 내가 내 가정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많이 우리는 경험해 보지 않습니까? 내 손으로 안 되는 것을 경험해 보지 않습니까? 그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합니까? 하늘의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드디어 느헤미야가 바라던 예루살렘 성의 재건이 이제 시작됩니다. 허물어져 있는 곳에 재건이 시작되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가정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내 가정이 지금 허물어져 있고, 내 신앙이 지금 허물어져 있고, 나의 영적 상태가 허물어져 있고, 나의 점점 고귀한 것이 무너지고 있다가 계속 내리막길이요, 무너져 있는 상태로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내 가정이 회복되어지기 시작하고 재건되어지기 시작하고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이 되겠습니까? 우리 가정이 오늘부터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오늘부터 우리 가정과 나의 삶의 인생의 재건이 시작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 거룩한 하나님이 지정하신 예루살렘의 성들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때로 어려움 속에서 훼파 되고 무너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말씀처럼 자기 형편을 살피는 자기 진단과 거룩한 고민과 애통, 그리고 간절한 기도로 드디어 예루살렘을 재건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시대 우리 백성들에게도 임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재건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회복의 계절이 재건의 계절이 거룩한 도성이신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에 이제 다시 시작되어지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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