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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교자의 각오로! (행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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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순교

여러분은 '순교'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왠지 떨린다, 두렵다." 하는 분도 계시겠고, "나도 순교할 수 있어"라고 비장한 각오를 하는 분도 있겠습니다만, 대부분은 일단 실감이 안 간다고 하실 것입니다. "요즘 그런 일이 어디 있어?" "옛날에는 예수 믿는다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거나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기도 했다는데, 또 6.25 때는 공산군이 예수님 그림을 땅바닥에 놓고 밟고 지나가라고, 침을 뱉으라고, 그러면 살려주지만 안 하면 당장 죽인다고 협박했다는데 지금 그런 일은 없잖아?" 그러니까 막상 그런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할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실감이 안 가기 때문이지요. 요즘은 이런 일이 아예 없다고, 그러니까 이런 일이 나한테는 절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지금도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지난 달 터키에서 아주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4월 18일 수요일 아침, 터키의 말라티아라는 도시에서 터키어 성경출판을 준비하고 있던 독일 선교사 틸만 게스케(46세)는 여느 때처럼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려고 사무실에 나갔는데 이 성경공부에는 터키사람인 네자티 아이든 목사(35세)와 우구르 육셀이라는 성도, 그리고 그 도시에 사는 스무 살이 채 안 된 열 명의 청년들도 참석했습니다. 이 청년들 중에는 그 지방의 시장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타리캇' 즉 이슬람의 '신실한 신자'라 불리는 과격 이슬람 단체 회원들이었고, 꽤 오래 전부터 선교사들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계획적으로 이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건이 있던 날 청년들은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해 네자티 목사가 성경 한 장을 읽었을 때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 일행의 손발을 의자에 묶고, 핸드폰으로 녹화하면서, 거의 세 시간 동안 잔인한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틸만 선교사는 156번이나 칼에 찔렸고, 네자티 목사는 99번, 그리고 우구르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찔렸습니다. 세 사람이 서로 보는 앞에서 한 사람씩 손가락을 자르고 배를 가르고, 그 다음은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만행을 저지른 뒤 세 사람 모두 목을 베어 참수했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 이후 틸만 선교사의 아내인 수잔 틸만은 텔레비전 회견에 나와 남편을 죽인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했습니다. 그녀는 기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오 하나님, 저들을 용서 하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어떤 칼럼니스트는 이 장면을 보고 이렇게 썼습니다. "천명의 선교사들이 천년 동안 할 수 없었던 것을 그 한마디로 해냈다." 함께 순교를 당한 네자티 목사의 부인 쉠사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의 죽음은 참 뜻이 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나의 삶에 그가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나는 영광의 면류관을 쓴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그 영광에 합당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가슴 저미는 장면인지 모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

오늘날에도 이런 순교가 지구 상 곳곳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복음 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뿐인 가장 소중한 목숨을 잃는 일들이 진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순교자들의 원조를 오늘 본문 사도행전 7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는 살기등등하게 달려드는 유대인들 앞에서 스데반 집사가 한 설교와 그 결과인 순교 장면이 나옵니다. 이 본문을 자세히 보면 순교란 무엇인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기 전에 먼저 한 가지 전제를 가지고 시작합시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똑같이 죽기 싫어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교도관이 사형수에 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형수들은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난 뒤 곧바로 사형되는 것이 아니라 집행을 기다리는 기간이 있는데 길게는 몇 년에서 10년까지 걸리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이 기다리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피를 말리는 고통이 더해가다가 드디어 사형집행 날이 되면 간수들이 와서 사형수를 형장으로 데려가는데 어떤 사형수는 이 때 감방의 쇠창살을 붙잡고 늘어지는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세서 간수 몇 사람이 달라붙어도 떼어놓을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만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생명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 사형수들뿐이겠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생명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은 다 마찬가지고 성경에 보면 예수님조차도 그러하셨습니다.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면서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부르짖지 않았습니까? 예수님도 죽음을 두려워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스데반 집사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이라고 해서 왜 죽음이 두렵지 않고, 생명 아까운 줄 몰라서 순교 당했겠습니까? 스데반도 두려웠을 것입니다. 누구나 목숨 아까운 줄 알고 죽기는 싫기 때문에 순교와 손해는 보통 신앙으로는 감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평상시에는 혹시 "나도 그런 때가 오면 스데반처럼, 선교사들처럼 순교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조차 막상 그런 상황이 되면 생각을 바꾸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박해를 받을 때 배교한 사람들이 우리보다 믿음이 적어서 그런 것 아닙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한 번 가보십시오.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결코 그들이 우리보다 비겁해서, 믿음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순교의 조건 1

이렇게 순교가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에, 순교는 보통 신앙으로는 해내기 어려운 일이기에 순교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도행전 7장에 나온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보면 순교에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이 나옵니다. 순교는 어떻게 해야만 가능한가?

첫째, 순교는 성령 충만해야만 가능합니다. 오늘이 성령강림주일입니다만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에 초대교회가 생겨나므로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성령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성령으로 시작된 교회답게 모든 성도가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데 이 성령 충만한 교회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몇 차례 발생합니다. 그 중 하나가 지난주에 살펴 본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겉으로 볼 때는 돈 문제지만 본질적으로 초대교회의 성령 충만한 분위기를 깨려는 마귀 사탄의 계략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6장에도 보면 초대교회에 제자들이 많아지면서 과부의 구제 문제 때문에 분란이 생겼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6:1에 보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네 과부가 구제에서 빠졌기 때문에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헬라파 유대인이란 유대인은 유대인인데 디아스포라 유대인, 즉 이스라엘을 떠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히브리말이 아닌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들을 뜻합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에 이민 가서 오래 살면 이민 2세, 3세들이 한국어를 잊어버리고 영어만 쓰게 되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 영어밖에 모르는 이민 2세, 3세가 한국에 와서 살면서 한국 교회를 다니게 된 셈이지요. 헌데 이런 헬라파 유대인들 마음속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불만의 내용은 "왜 교회가 가난한 과부를 구제하는데 히브리파 유대인들만 구제하고 우리 헬라파 유대인들은 빼놓았냐?"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말씀도 전하고 교회의 모든 행정업무를 다 맡아 보았는데 교회가 적을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교회가 커지다보니 나무 바빠서 이렇게 소홀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행 6:4)하고 구제하는 일을 맡을 일곱 사람을 뽑습니다. 바로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오늘날의 안수집사)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일곱 명의 집사를 아무나 뽑은 것이 아닙니다. 3절에 의하면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뽑힌 사람 일곱 중에 하나가 바로 스데반 집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스데반 집사는 이미 초대교회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박해를 받을 때에도 공회 앞에서 성령 충만해서 설교를 하니 그 설교를 듣고 모두가 분해 하기는 하지만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합니다. 성령 충만한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또한 순교 직전에도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볼 때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 됩니다(행 7:55) 이렇게 스데반은 모든 일에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하기에 그가 하는 모든 말고 행동에 권능이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기에 조금도 두려움 없이 순교의 길로 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성령 충만하기에 영안이 열려서 하늘나라를 보고 두려움 없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육신의 눈만 가지고 보면 눈앞에 있는 현실과 내가 손해 보나 이익을 보나 하는 것만 보입니다만 성령이 충만해지면 영적인 눈이 확 열립니다. 그래서 현실 뒤에 저 편에 있는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됩니다. 스데반도 성령 충만해서 영안이 열리니 55절에 나온 대로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 되어 기꺼이 순교의 길을 가게 됩니다. 스데반 같이 육적이 눈이 아닌 영적인 눈이 열려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순교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비록 나는 죽지만, 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잃지만 저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면 장차 내게 주어질 영광과 상급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롬 8:18)을 깨달아 기꺼이 순교의 길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순교의 조건 2

둘째, 순교는 절대 맨 정신으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2장 13절에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때 방언을 듣고 달려온 유대인들이 방언을 하는 120명의 성도들을 보고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성령 충만한 모습을 보고 대낮부터 새 술에 취한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술 취한 것과 성령에 취한 것은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술 취해 보셨나요? 술 취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술 취하면 용감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떨려서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프러포즈를 못 하다가 결국 술 한 잔 마시고 용감하게 프러포즈 했다는 분이 있습니다. 술 취하면 말이 전혀 없던 사람이 갑자기 말이 많아지고 달변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너무 취하면 제 정신이 아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에 취하면 기분이 아주 좋아집니다. 두려움에 떨던 자가 용감해집니다. 말씀을 담대하고 능력 있게 전하게 됩니다. 급기야 제 정신이 아니게 됩니다. 제 정신 맨 정신으로 어떻게 순교를 합니까? 어떻게 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기꺼이 바칩니까? 그러므로 술 취하듯 성령에 완전히 취해 맨 정신이 아니라 용감해지고 담대해져야만 순교가 가능합니다.

순교의 조건 3

셋째, 순교하려면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예수님과 참 비슷한 모습이 많습니다. 스데반도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 말씀 전하다, 설교하다 순교 당합니다. 스데반도 예수님처럼 매수당한 자들이 거짓으로 증언하고(마 26:59~61), 유대교의 장로와 서기관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스데반을 죽이라고 백성들을 충동합니다(행 6:11~12). 예수님이 참람죄(신성모독죄)로 몰려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마 26:65) 스데반도 참람죄로 몰려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비슷한 것은 마지막 죽는 순간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 스데반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크게 외칩니다."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그리고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했습니다(행 7:59~60). 예수님처럼 죽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스데반은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살다가, 예수님처럼 죽은 것입니다. 순교를 하려면 내 안에 예수가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찌르면 예수가 나와야 합니다. 실제로 일제시대 "예수 천당"과 최권능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최봉석 목사님은 자나 깨나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전도를 했는데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붙잡혀 일본 경찰의 끔찍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예수 천당"을 외쳤습니다. 그를 고문하던 경찰이 하도 기가 막혀 "당신은 어떻게 때리면 때릴수록 더 크게 '예수 천당'을 외치냐?"고 묻자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수로 가득 차 있어서 예수 밖에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이 움직일 때마다 예수가 내 입에서 튀어 나온다,"고 대답한 일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실제로 최권능 목사님은 6년간의 투옥생활을 하다가 영광스럽게 순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처럼, 최권능 목사님처럼 내 안에 예수님이 가득 차서 예수님처럼 말하고 생각하며 살다가,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어야 순교가 가능합니다.

현대의 순교

지금까지 스데반의 순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러면 이 순교가 도대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도 언급했듯이 순교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도 생소하고, 따라서 너무 피상적이고 나와는 관계없는 일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님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자꾸 순교, 순교 하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심지어 거북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순교를 해야 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순교의 각오를 하고 신앙생활 을 해야 합니다. 물론 현대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복음 전하다 죽는 순교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에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버려야 할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순교가 오늘 우리와 상관이 없는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어야 할 '오늘날의 순교'는 복음을 위해 이익을 포기하는 일, 손해 보는 일, 따돌림 당하는 일, 불편해 지는 일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일들이 더 어려운 순교일지도 모릅니다. 왜냐? 정말 죽을 일도 없는데 막연히 내 마음속으로만 "나는 얼마든지 순교할 수 있어." 하고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쉽습니다. 누구나 그런 생각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내 삶 속에서 믿음 때문에 손해 보고 힘들어지는 일이 닥쳐올 때 기꺼이 그 길을 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오늘날의 순교가 옛날에 목숨 바치는 순교보다 더 어려운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 전하다가 목숨 잃고 순교하라는 요구는 잘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 전하다가, 성경대로 살다가, 예수장이답게 살다가 손해 보고 따돌림 당하고 불편해지는 일이 있더라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쉽게 편하게 믿으려는 '신앙편리주의'의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쉽게 쉽게 믿다가 복음을 위해 손해 보거나 힘들어지는 일조차 싫어하고 피한다면 우리 신앙이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설교의 제목을 보십시오.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순교자의 각오로!'입니다. 순교자의 자세로 믿고, 순교자의 각오로 살아야 오늘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오늘 주를 위해, 신앙을 위해 기꺼이 나 자신을 죽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내 안에 성령이 충만해서, 성령에 취해서, 내 안에 예수가 가득 차서 기꺼이 내 가장 귀한 것을 내놓을 수도, 잃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짜 신앙인입니다.

요즈음 우리 권사님 안수집사님들이 국내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계신데 참 잘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좀 멀어서 그렇지 꼭 한번 가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외국인 묘지입니다. 여기 가보면 그냥 묘지와 비석들만 죽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묘지에는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하다 돌아가신 선교사님들을 비롯해 480여 명의 외국인이 안장되어 있고 10세 미만의 아이들도 50명이나 묻혀 있습니다. 바로 의술도 변변치 못한 조선에서 태어나 일찍 죽은 선교사님들의 자녀입니다. 그곳에는 1885년 제물포에 입국한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도 묻혀 있습니다. 26살과 27살이라는 꽃다운 청춘에 모두가 중국이나 일본은 몰라도 조선만은 가지 말라고 말리던 아 땅에 들어와 선교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입니다. 왜 이들이 편안한 삶이 보장된 자기네 나라를 떠나 동양의 저 한 구석 조선에 와서 죽었으며 그 자녀들은 왜 이 척박한 이 땅에서 그렇게 죽은 것일까요? 바로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내 생명을 주를 위해, 복음을 위해 내놓지 못할지언정 주를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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