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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사람보다 하나님 먼저 (행 5: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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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강림주일은 ‘기독교 교회의 생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본격적으로 믿음이 열매로 맺어지는 복을 경험한 날이 바로 성경강림 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보배였고, 예수님의 인격과 삶이 보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추앙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 옆에서 그의 말씀을 들으며 삶의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정말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자신들을 구원하실 메시아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그들이 40일 동안 예수님이 함께 있는 것을 경험한 후, 마지막 10일 동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순절’은 50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이후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것은 자신들의 죄악을 위한 고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최고의 존재, 용서받은 존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존재인 것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함께 찬양하며 신앙고백을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것이 바로 교회의 시작이고, 온 천하와 선교현장에 나가게 된 교회의 모체였습니다. 이들이 달라진 것은 그들의 생각이 바뀌고 인생의 목표가 다시 설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걸만한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화 속에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생명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은 진리,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지성인으로 살아갈 때 종종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정말 기독교 신앙이란 참된 생명이고 진리의 말씀인가? 아니면 인간을 억압하는 지성을 조롱하는 암적인 존재, 쓰레기 같은 종교에 불과한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종종 기독교를 ‘겁쟁이를 만드는 공장’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과 교회를 향해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의 인권을 조롱하며 파괴하는 종교가 기독교가 아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지와 편견을 조장하는 반지성주의적 모임이 기독교 교회가 아닌가? 성도들에게 강제적인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고 종교의 노예로 삼는 것이 기독교가 아닌가? 멀쩡한 사람을 죄인취급하고 억지로 두려움을 조성하며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것이 기독교가 아닌가?”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마음속에도 이런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독교,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은 반 지성주의가 아닌가? 이것은 오히려 인간을 살리고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이런 잘못된 역사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났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부터 떠나갔을 때, 신앙을 이데올로기화하고 독선적이 되었을 때 기독교는 잘못된 길을 간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이 올바른 신앙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잘못된 신앙의 언저리에 놓여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담대해지고 용감해졌습니까?
아니면 비겁한 겁쟁이가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마음에 자유와 해방을 경험했습니까?
아니면 자아가 더 축소되고 억압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참된 자의식과 지혜를 얻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더 비지성적인 우둔한 자가 되었습니까?
 
어쩌면 우리 안에는 이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생명의 자리, 진리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몇 가지 교리에 집착하는 교리주의자, 율법주의자, 예식만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는 예식주의자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늘 성령을 생각할 때마다 이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인격을 마음속에 받게 하옵소서. 기독교 신앙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것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이데올로기화 되어가는 신앙을 파헤쳐 주시고, 이데올로기화 되고 있는 교회의 잘못된 신앙구조를 깨뜨려주옵소서.”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종종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형상화하여 교리화 시켰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든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기독교 신앙이 갖고 있는 역동성을 형식적인 모습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가 갖고 있는 축소주의적인 성격을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날카롭게 표현했습니다.

“사실 부모나 교사, 성직자와 사업가는 무의식적으로 공모하여 ‘겁쟁이의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다. 예전의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려는 행동을 못하도록 했다. 교사들은 교육시스템에 불만이 없는 학생들은 칭찬하면서, 반기를 드는 학생들은 엄하게 다루었다. 대부분의 경우 교회는 확고한 자기주장보다는 겸손과 희생의 사상을 가르친다. 많은 노동자들은 직장생활 초기부터 ‘할 말을 다하면’ 월급 인상이나 승진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심지어는 실직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직장에서 터득한 소극적 사고방식은 가정으로, 교우관계로, 사회생활로 번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소극적인 생각을 타파하고, 축소지향적인 삶의 방식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삶의 자리로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세계의 지평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나서서 자기주장을 했습니다. 사실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2천년 전 사회는 종교와 정치적인 위협에 직면한 시대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유대 종교의 율법주의를 따르지 않는다고 파문당하고, 종교적인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종교는 박제화 되어 속으로는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가 있었지만 누군가 새로운 것을 하면 끊임없이 감시하고 억압했습니다. 정치적인 위협도 똑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평화를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3년밖에 공생애를 못사셨을까요? 석가모니와 공자도 긴 세월을 살았는데, 예수님은 왜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밖에 살지 못했을까요? 그 당시 예수님의 대적자는 종교 지도자들,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믿고 있던 하나님과 예수님이 믿고 있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믿음의 방식과 사고가 달랐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하나님을 사유화했습니다. 성전과 교회를 들먹이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기득권을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때 유대 종교는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억압하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종교가 이데올로기가 되면 사람을 억압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어떤 종교도 마찬가지이고 기독교조차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 속에 오시면서 이데올로기화된 바리새적인 종교주의를 크게 비판하시고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그것을 받아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길로 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불러 감옥에 넣고 예수의 이름으로 더 이상 말씀을 선포하지 말라고 위협을 가할 때 그들은 놀라 말합니다.
“우리들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우선적인 가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런 고백을 매일매일 하지 않으면 늘 사람이 앞서게 됩니다. 내 욕심과 사람의 시선이 하나님보다 앞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염려하고 근심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목적과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 지혜가 있고 그것 때문에 열정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면 진정한 열정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내가 갖고 있는 공부의 목표, 직장의 목표, 달란트의 목표와 열정이 생깁니다. 열정이 생긴 사람은 끈기가 생기고, 끈기가 있는 사람은 용기가 생깁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슴속에 새기면서 지금까지 갖고 있던 모든 이데올로기의 고정관념에 대해서 거부하고 탈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제자들은 아주 건강한 자아인식, 건강한 자부심, 건강한 자존감, 건강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들은 건강한 자부심과 자아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심리학적으로 건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첫째, 말과 행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을 할 줄 압니다. 말과 행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아주 소중합니다.

둘째, 낯선 사람, 친구, 가족 등 모든 부류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방적이고 솔직하고 정직한 대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과는 수다를 떠는데 어떤 사람과는 전혀 이야기를 못한다면 자아가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친구를 만나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낯선 사람에게는 쉽게 접근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이 모든 삶에 잘 적응하는 것은 그만큼 어린 아이들이 건전한 자아, 건강한 자존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나라와 피부 색깔이 다를지라도 금방 친해집니다. 그들은 피부색깔이나 경제상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같은 어린아이기 때문에 금방 친해집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서로를 비교하며 따져봅니다. 저 사람과 나의 수준이 비슷한지, 저 사람의 출신이 어디인지, 저 사람이 무엇을 갖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만남을 단절시킵니다.

세 번째, 삶에 적극적으로 대응합니다. 소극적인 사람이 갖고 있는 문제점은 스스로 자존감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먼저 주도적이지 않고 뭔가 일이 일어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늘 우리 인생을 수동적으로 살게 하고 인생의 창조적인 결과를 방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품이 조용하고 내성적이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자존감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기 삶에 대해서 계획을 세우고 한걸음, 한걸음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남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조종당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자존감은 적극적으로 삶에 도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네 번째,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항상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한계점도 받아드립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결과가 어떻든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유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건강한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건강한 자존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인생을 사는 핵심적인 가치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겁쟁이였습니다. 하루를 살기에도 벅찬 인물들이었습니다. 의심하고 편협하며 시기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기적이고 나약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지 못한 인물들이었습니다. 누군가 수군거리면 자신을 비난한다고 먼저 걱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남의 비판과 조롱 때문에 밤잠을 잘 수 없었던 우리와 똑같은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이 임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들을 협박하던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행전 5:29)
 
제자들은 인생의 핵심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올바른 길을 가는 열정의 사람, 도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세속적인 말로 표현하면 승부근성을 갖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내 인생의 우선적인 가치입니까? 하나님만으로 인생의 우선권을 삼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면 내가 갖고 있는 자존감이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면 정말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갈까요? 하나님께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다 가져가고 종으로 삼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면 하나님은 오히려 기뻐하며 말씀해 주십니다. “너는 내 아들, 내 딸이다. 내가 이 온 우주에 가득 찬 것을 다 너에게 주겠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리겠다고 하면 아버지, 어머니는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내 것은 다 네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너를 위해서 소모하고 싶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꾸 의심합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존재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나님께 다 내놓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결단하고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우선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이때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먼저”라는 핵심가치는 독선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을 용납하고 허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늘 수난의 종교, 고난의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숫자가 많아질 때 조심해야 합니다. 기독교가 가진 것이 많아질 때 조심해야 합니다. 기독교가 권력과 가까이 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는 썩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이웃을 위해서 나누어야 할 축복으로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알고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 쓰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데 삶을 사용하겠다고 주님 앞에 고백했을 때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위대한 초대교회 역사를 이루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자발성을 지닌 자유로운 결단을 요청하십니다.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을!”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사실 비겁한 겁쟁이요, 이기적인 욕심만을 채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쓰임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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