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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러분의 브니엘은 어디입니까? (창 32: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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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브니엘은 어디입니까?

여러분! 혹시 야곱이 말한 것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야곱에 관한 일화는 많은 것 같은데, 야곱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를 것입니다. 야곱이 한 말 중에 가장 유명한 말은 창 47:9에 나오는데, 야곱이 말년에 애굽왕 바로 앞에서 한 말입니다. 한번 찾아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 앞에 섰을 때의 나이가 130세였는데, 야곱은 그 동안 자기가 험악한 인생을 보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험악한 세월”이란 말을, 다른 번역본에서는 “고달픈 세월” 또는 “고통의 세월”이라 번역했습니다. 정말이지 야곱의 인생을 돌아보면, 고달픈 인생 그 자체였습니다.
아마 나름대로는 여러분들도 고달픈 인생을 사셨다고 하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보내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정말이지 왜 이리도 인생이 안 풀릴까 할 정도로,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으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러분이 겪은 것들이 야곱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부터 제가 야곱이 보낸 험악한 세월들을 간단하게 말씀드릴 것인데, 그 말씀을 듣고, 여러분 중에 야곱보다 더 고달픈 인생을 산 사람 있으면, 한번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자기를 두 번씩이나 속였다는 사실을 안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을 피하여 외삼촌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으로 갔는데, 우리 아이들이 명절 때 외가를 찾아가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야곱은 살면서 한 번도 외삼촌 집을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기분 좋게 가는 것이 아니라, 쫓겨가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야곱의 나그네 인생길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외삼촌 집에 도착한 야곱은, 외삼촌에게 속아서 무려 20년 동안을 생활합니다. 외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에 도착하여 우물가에서 잠시 쉬는데, 그곳에서 아리따운 여인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그 여인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외삼촌 라반의 둘째딸 라헬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헬과 결혼을 약속으로 7년을 하루같이 외삼촌을 위하여 헌신봉사했습니다.
그런데 외삼촌은 자기를 위해서 7년을 일하면 라헬을 주겠다고 해 놓고선, 7년을 채우자 큰 딸 레아를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큰 딸을 두고서, 작은 딸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칠일 후에 다시 라헬도 줄 것이니, 다시 7년을 더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다시 7년을 외삼촌 집에서 종처럼 일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자기 소유를 위해서 6년을 더 일합니다. 무려 20년을 외삼촌 집에서 종살이를 한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야곱의 큰아들 르우벤이 야곱의 첩인 빌하와 통간했습니다. 아무리 종이었다가 자기 아내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자기 아내인데, 아들이 첩을 통간했으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그만 죽고 맙니다. 하나 밖에 없는 딸 디나가 이방인에게 강간당했습니다.
나중에는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는 아픔을 당했습니다. 극한 가뭄 때문에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냈는데, 이번에는 시므온이 애굽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 다음으로 사랑했던 베냐민을 보내라고 해서, 살아 올 수 있을지 모르는 곳에, 애통하는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이런 고통을 다 보내고 나서, 그 때서야 애굽왕 바로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달픈 인생을 살았습니까? 그래서 야곱이 바로에게 말하기를, 자기가 130년을 살았는데, 아주 험악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이러한 고달픈 인생은, 바로 장자의 권한을 빼앗고, 자기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빼앗은 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장자권을 얻었고, 하나님의 축복권까지 얻었으니 그야말로 탄탄대로가 되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쪽박 차고, 도망가고, 속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쪽박 차는 경우가 있습니다. 빚 때문에 쫓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럴까요? 그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른 모습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먼저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한 뒤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엄청난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20년 종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도 20년을 살다 보니, 나름대로 얻은 것도 많았습니다. 네 명의 아내와 나중에 베냐민이 태어나서 12명의 아들이 되었지만, 이때까지는 11명의 아들들과 디나라고 하는 딸을 얻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짐승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어찌 보면 성공한 것 같습니다. 많은 자식들과 많은 소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상처뿐인 영광이라고, 특별히 내세울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20년 전에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 에서가 지금 400명을 이끌고 자기를 죽이려고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두려울 때 어떻게 하십니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맙니까? 아니면 만반의 준비를 하시는 편이십니까?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에게 한번 물어봤습니다. “희옥이 너는 어떠하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어쩌면 제가 야곱과 같은지 모릅니다. 저 역시 두려움이 몰려올 때는 잠을 청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철저하게 준비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은 모든 것을 만반에 준비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형 에서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자신을 죽이려 할지라도, 그냥 앉아서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짜냅니다. 가장 먼저 자기에게 있는 짐승들을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형 에서가 한 떼를 치면, 한 떼라도 남기겠다는 계산을 합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형 마음을 누그러뜨린 예물을 준비하는데, 그것도 한번에 다 주지 않고, 그것을 여러 떼로 나누어 보냈습니다. 한마디로 조금씩 조금씩 보내서, 형의 마음을 조금씩 누그러뜨려 보겠다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자기에게 있는 식구들도 나누었습니다. 자기가 별로 사랑하지 않았던 두 몸종에게서 낳은 자식들을 가장 먼저 보냈고, 그리고 덜 사랑했던 레아와 그 자식들을 보냈으며,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라헬과 요셉을 가장 나중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가장 뒤에 남았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철저합니까? 정말이지 자기가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우리들도 이렇게 살아갑니다. 정말이지 내가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어딘가 모르게 답답합니다. 두렵습니다. 그래서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저는 요즘 아주 두렵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개척을 한 지 벌써 7년이 다 되어갑니다. 해년마다 뭔가 좀 되는가 싶더니, 지나고 나면 다시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이대로 머물러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2-30명에서, 이렇게 상가 교회의 모습으로 굳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두렵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님들은 별로 거기에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두렵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야곱이 자신의 인생 중에서 가장 큰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야곱의 일화 중에 가장 유명한 일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마디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씨름을 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은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던 야곱도 뭔가 모르게 두려웠던가 봅니다. 그래서 얍복강가에 홀로 남아 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은 옳거니 하고 그 사람을 붙들고 씨름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한 것입니다. 날이 새도록 하나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서 위기라고 느껴질 때, 여러분의 잔꾀만 의지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이 얼마나 간절히 매달렸기에, 하나님께서 졌다고 손드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필요합니다. 이런 말씀은 비단 오늘 본문에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눅 18장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과부 한 명이 자주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와서 애원을 했습니다. 악한 재판관이 처음에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다가 나중에는 들어주었습니다. 왜 들어주었습니까?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기를 너무나 괴롭게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재판관은, 물론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지만, 이렇게 악한 재판관도 들어주는데,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서 손드실 때까지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도저히 들어주시지 않고서는 못 배기실 정도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게임 오버입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야곱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야곱이 도둑놈처럼 자기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나쁜 놈이지만, 그래도 야곱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갈 때도 그랬었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하나님의 약속을 얻어낸 야곱입니다.
우리가 양심없는 것처럼 보여도 좋습니다. 아주 나쁜 짓만 골라하는 파렴치한이어도 좋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저는 야곱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마치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를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수영할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어떻게 합니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곧바로 붙잡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둘이 같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왜요? 자기가 살려고 그만큼 간절히 붙잡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실 때, 그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야곱이 얼마나 간절히 붙들었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저녁 무렵에 시작한 씨름이 새벽이 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젠 다급해진 쪽은 천사였습니다. 아니 하나님이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당황케 하는 기도, 진정 여러분이 그런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니까, 당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위골시키고 계십니다. 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그런데 여러분! 환도뼈가 무엇입니까? 엉덩이 아래쪽 넓적다리 상단에 있는 뼈로써, 힘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사람은 환도뼈가 있어야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환도뼈 때문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환도뼈가 위골된 것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환도뼈를 치신 것일까요? 그것은 “야곱 너! 이제부터는 너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오늘 이 시간, 그것을 부러뜨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만일 그러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쳐서 부러뜨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고통만 있을 뿐입니다. 야곱처럼 절뚝발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고생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모든 것을 부러뜨리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의 환도뼈를 부러뜨리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여러분!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으셨겠습니까? 오늘날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몰라서,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죄를 낱낱이 고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가 골방에서 지은 죄라 할지라도 모르겠습니까?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물으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묻고 계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네가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숨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때 아담이 말합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숨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아담이 스스로 고백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에 대해서 물으실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담처럼 그저 핑계만 대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데, 자꾸 딴 말만 하실 것입니까?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큰일납니다. 여러분! 아담은 그것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죄를 곧이곧대로 하나님 앞에 회개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하나님이 아니어서 모릅니다만, 성경을 통하여 보면, 아마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핑계만 대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것입니다.
행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대답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죽음을 당했습니다.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남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의 잘못이 무엇이냐고 물으실 때, 주저하지 말고 곧이곧대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종종 살면서 너무나 고지식해서 손해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고지식하면 고지식할수록 좋습니다. 곧이곧대로,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솔직할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용서함 받습니다. 그래야 천국 갈 수 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야곱은 곧이곧대로 대답합니다. “예,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여러분!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야곱이 야곱이라고 해야지, 그럼 라헬이라고 말합니까?”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면서도 죄인이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마치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한 것처럼, 떳떳하게 말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죄인이면 죄인답게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야곱이 야곱이라고 대답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고쳐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무슨 이름으로 고쳐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로 고쳐주셨습니다. 이때부터 도둑놈 야곱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세요. 자꾸 감추지 마세요. 있는 그대로 다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예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존재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름만 바뀌고, 모습은 그대로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름과 함께 우리들의 모습도 바뀌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는 성도님들이십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지금 어떻습니까? 정말로 거룩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정말로 다른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자 이제 29~30절 말씀을 다같이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마음껏 축복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31절을 보면, 바로 그 때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 기가 막힌 장면입니다. 황홀경 그 자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교회를 떠나갈 때, 우리 앞에 이런 장면이 펼쳐지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귀한 축복으로 여러분의 얼굴이 빛이 나고, 여러분 앞에 광명한 영광의 길이 열려지길 축복합니다.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을 만난 장소를 브니엘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의 주제를 여러분의 브니엘은 어디입니까?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가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난 곳이 어디냐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만난 그곳이 축복의 장소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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