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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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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고전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의 12번째 속성은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입니다. 이 7절의 첫 번째 문장은 한글 개역 성경에는 “모든 것을 참으며”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 문장 번역상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할 때 ‘참으며’ 라는 동사는 원어로 ‘스테고(στεγω)’입니다. 그런데 이 스테고라는 단어의 원래의 뜻은 ‘덮다, 막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집의 지붕처럼 햇볕과 눈비의 침입을 막기 위해 덮는 행위를 말하거나 물이 새지 않도록 막는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입니다. 이 원래 의미에서 ‘참다’, ‘지탱하다’라는 뜻이 파생되었습니다. 부정적인 것들의 침입을 막음으로써 참고 견딘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모든 성경 번역은 이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하나로 나뉩니다. 우리 한글개역판이나 KJV, RSV는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번역합니다. 반면에 표준새번역이나 공동번역, NIV는 원래의 의미를 살려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또는 “막다, 보호하다(protect)”로 번역합니다. 저는 이중 표준새번역 등에 나타난 “모든 것을 덮어 주며”가 더 정확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원래 단어 뜻이 그럴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본 사랑장 첫 번째 사랑의 속성으로 이미 “오래 참고”라고 말한바 있으며, 또 마지막 15번째 사랑 정의도 “모든 것을 견디며”로 끝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속성들을 정의하고 있는 15개의 단어들은 원어로 보면 모두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일곱 빛깔 무지개로 분산되듯이 프리즘을 통과한 사랑의 빛이 15개의 빛깔로 빛나고 있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번역하면 단어가 중복이 되고, 그 의미가 분명해지지 않습니다. 바른 의미는 “모든 것을 덮어주며”입니다. 이 사랑은 상대방이 가진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사실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가 서로 완벽한 존재가 되어 사랑을 나눈다면 그 사랑은 별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세상에 태어나고, 그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는 누구나 그 안에 상처나 부족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시가 되어 사랑하는 상대방을 찌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서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 사랑은 마치 고슴도치 사랑과 같다 할 것입니다. 어느 두 고슴도치가 사랑을 했습니다. 서로 사랑해서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들의 몸에 난 가시 때문에 서로를 찌릅니다. 그 가시가 힘들어 서로 떨어지려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멀리하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 과정에서 고슴도치들은 사랑은 하되 서로에게 찔리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이 게 사랑일까요?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적당히 거리를 두는, 굉장히 이기적인 사랑은 아닙니까? 사랑은 상처받을 각오를 하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의 운명에 함께 엮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운명에 엮였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허리에 굵은 창자국이 생기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렇듯 자신이 상처를 받을 것을 각오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달려들었을 때 비로소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곳은 바로 이 십자가 밑에서였습니다. 주님이 가시에 찔림으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모든 인간 관계가 그렇습니다.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 서로 편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엔 사랑은 없습니다. 서로의 변화나 발전도 없습니다. 서로 부딪혀야 소리가 나고 모서리 진 곳이 깎이는 법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정이 들 때는 함께 사건에 연루될 때입니다. 그 사건을 두고 서로 의견 대립을 하거나, 어느 때는 함께 맞장구를 치다가 정이 듭니다. 사건이나 일이 없으면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은 바로 이 만남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부족한 사람들끼리 만난 부딪치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갑니다. 잠언서에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27:17)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관계가 그렇습니다. 철과 철이 부딪쳐 열을 내고 서로 깨어지면서 나의 부족한 모습들이 깎이고 내 안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들이 이루어져 갑니다.

현대인의 문제는 피상성입니다. 자기를 드러 내려 하지 않습니다. 아닌 척, 깨끗한 척, 강한 척하고 살아갑니다. 서로 엮이는 것을 싫어하고 남의 불행이 있으면 멀리 돌아가려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교회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 중 하나는 익명성 때문입니다. 자기를 노출시키는 것을 싫어합니다. 잘 보이지 않는 기둥 뒤에서 예배들 드리다 축도가 끝나기도 전에 빠져나갑니다. 자신의 문제가 있어도 드러내려하지 않고 중보기도 요청을 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혼자 해결하거나 조용히 다른 곳으로 옮기고 맙니다. 사람 앞에서 드러내려 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을 감추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내 안에서 끓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마저 드러내지 않는다면 우리 속은 다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사랑은 만남이며 부딪힘입니다. 부딪히는 것을 두려워 마십시오.

만남을 두려워 말되 하얀 보자기를 하나 준비하십시오. 상대방의 허물이 보일 때마다 그 위에 덮는 것입니다. 허물을 허물대로 보고 드러내면 자기나 상대방이나 견딜 수가 없습니다. 상대방의 가시가 보일 때마다 날카롭지 않도록 돌돌 마십시오. 가시를 무디게 만들어야 서로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사랑은 상대방의 좋지 못한 점은 덮고 좋은 점만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만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싫어하는 것도 함께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그의 허물은 덮고 외면하십시오.

잠언서에는 또한 이렇게 말씀합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10:12) 이 말은 허물을 덮어주면 사랑이 이루어지지만 허물을 드러내면 다툼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 전래 동화에 “꼬마 신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처녀가 이제 여덟 살밖에 안 된 꼬마신랑하고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어리다 보니 워낙 철이 없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배 달라 감 내 놓아라 하질 않나, 말놀이 하자며 업어달라기 일쑤였습니다. 어느 날은 밥을 짓고 있는데 누룽지를 달라고 야단입니다. 참다못한 새색시가 꼬마신랑을 덥석 들어 지붕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꼬마신랑이 내려달라고 울고불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가 집으로 들어서다가 이 광경을 보고 말았습니다. 신부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있는데 그 꼬마신랑이 울음을 뚝 그치더니 “색시야, 큰 호박 딸까, 작은 호박 딸까?” 합니다.

자기의 허물을 덮어준 꼬마신랑이 너무 고마워 그 이후로 새색시는 그 신랑을 예의와 정성을 다하여 섬겼다는 동화입니다. 아무리 어린 꼬마 신랑일지라도 자기 색시의 허물을 덮어줄 줄 알았습니다. 사랑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허물을 자꾸 보거나 자꾸 드러내는 것은 사랑을 지속되기 어렵게 만듭니다.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17:9) 아무리 그것이 사실이고 정확한 판단일지라도 자기의 허물이 드러나는 것을 기뻐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연약한 인간인 이상 자기도 모르게 허물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한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 스스로 후회합니다. ‘내가 조금만 참을 걸’, ‘아 또 실수 했구나’ 합니다. 그런데 이 때 누가 그 실수를 지적하며 잘못했다고 말하면 화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 잘못된 행동이 아닌 이상 허물은 덮어주고 일부러 외면하는 것이 관계를 온전하게 합니다.

상사의 허물을 항상 꼬치꼬치 따지는 어떤 부하 직원이 있었습니다. 그 부하직원을 향하여 그 상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네 명석함과 지혜로움의 차이를 아는가? 상사의 잘못을 찾아내는 것은 명석함이네. 그러나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지혜로움이네.” 누구든 지적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더구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지적할 때는 더더욱 자존심이 상합니다. 직장 상사나 윗사람도 외롭습니다. 인정받는 것을 원하지 항상 따지고 드는 사람은 싫어합니다. 어느 미국 사람이 쓴 책을 보니 미국 사회에서도 직장에서 오래 남아 있기 위해서는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결코 상사에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단순히 처세술을 넘어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사람들은 잘 들으려하지 않고 특히 아래 사람이 지적할 땐 더욱 그렇습니다. 저도 부목사 시절에 그때 담임목사님에게 이런 식으로 직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그것이 별효과도 없었고 나중에는 섭섭함으로 저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젊을 때의 치기였다 생각합니다. 윗사람도 연약한 인간입니다. 지금은 좀 더 감싸고, 좀 더 그분을 세워드리는 것이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른 또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어른으로 대우해주고 존경하며, 그분의 존재가 높아지도록 도와주면 진짜 존경받는 어른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 허물을 지적하면 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런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은 마음 먹으면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천하기 어려운 사랑도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이 나에게 행하는 모욕이나 무례함에 대해서도 참고 덮어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5:39)고 말씀하실 때가 바로 그 경우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뺨을 맞는 경우는 정말 모욕적이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이 경우 먼저 오른편 뺨을 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오른손을 사용하는데 오른손으로 치면 상대방의 왼편 뺨이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른편 뺨을 맞았다는 것은 손등으로 쳤다할 것이며 이는 더 모욕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심한 모욕적인 행위도 그대로 받을 뿐만 아니라 나머지 왼쪽 뺨도 돌려대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향한 모독과 불의를 참고 덮어주라는 말씀입니다.

보통 인간의 마음으로 어떻게 이런 행동이 가능할까요? 정말 실천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밀양” 이 용서의 어려움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배우 전도연씨가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영화인데 그 중심 테마가 기독교의 ‘구원과 용서’입니다.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만 데리고 밀양에 정착한 신애(전도연분)는 그곳에서 새 인생을 시작하려 합니다. 그러나 불행은 혼자 오지 않듯 자기 아들이 유괴를 당해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이 엄청난 슬픔을 신애는 신을 믿음으로 극복하려 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함으로써 그 상처를 다 털어버리려 합니다. 그래서 교도소를 찾았지만 신애는 그곳에서 반대로 더 큰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그 살인자가 이미 예수를 믿고 자신은 신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았다고 하며 평화로운 얼굴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애는 이 장면에서 멍한 표정으로 나오다 그만 쓰러지고 맙니다. 나중에 심방을 온 목사를 향하여 신애는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용서할 수 있나요? 그 인간 이미 용서받았다는데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나요?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그는 평화롭습니다.”

이 영화는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줍니다. 나를 괴롭힌 사람을 용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껏 용서하러 갔는데 상대방이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뻔뻔스럽게 서 있을 때 우리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사실 신애는 그를 용서한다고 했지만 진실로 용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살인자마저도 용서하는 지극히 관대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위선이 실패하자 비로소 그 안에 꼭꼭 눌러 놓았던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이후 분노하고 신을 향해 저항하는 신애의 모습은 오히려 삶의 불행 앞에 선 인간의 자연스런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오른 뺨을 맞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미 당한 모욕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한 모욕도 각오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왜 우리에게 이토록 심한 요구를 하고 계실까요? 첫째는 용서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워하고 분노하면 오히려 자신을 더 죽이게 됩니다. 영화의 신애처럼 자신을 망치게 하고 급기야 자살을 시도하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마음껏 미워하고 복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정의는 세웠을는지 모르지만 변화된 것은 없고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둘째 용서만이 자기와 상대방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끝없는 보복의 악순환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진정으로 용서하고 용납할 때 우리에게는 평화가 주어지고 상대방은 변화의 힘을 얻게 됩니다. 용서가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영화 “밀양”의 경우처럼 그렇게 심한 원수 된 관계는 심도 있는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다가오는 문제들은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 비해서는 작은 것들입니다. 더더구나 남도 아닌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욱 더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쉽지 않지만 이것이 주님의 명령인 이상 우리가 주님의 자녀라면 최소한 그 모양이라도 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아예 무시하는 사람하고, 비록 자주 넘어지더라도 주님의 말씀이니까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또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사람하고는 천양지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을 완벽히 이루어서 자녀가 아니요,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우리 가 얼마나 그분을 모욕했었던지 묵상하면 도움이 됩니다. 주님이 당하셨던 모욕에 대해서는 이사야서 말씀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0장 6절입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람들은 주님을 때리며, 수염을 뽑고, 뺨을 때리며, 욕하며, 침 뱉었지만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이어지는 53장 3절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며 벌레만도 못한 우리 인간들이 주님을 모욕하고 존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이런 인간들의 허물에 대해 눈을 감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하고 모든 허물을 덮고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까닭은 주님께서 우리 모든 허물을 덮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럽고 죄 투성이 입니다. 빛 중의 빛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도저히 설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허물을 덮으셨습니다. 우리는 새하얀 의의 세마포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덮으심으로 허물이 보이지 않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끌면서 선포했던 기독교 핵심 진리입니다. 루터는 구원받은 우리 신앙인의 모습을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 표현합니다. 우리는 평생 죄인으로 삽니다. 내 안에 있는 죄와 세상의 유혹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가? 바로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의로운 옷을 벗어 우리에게 입혀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허물을 덮으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이 긴장감을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죄인이지만 그 사실이 우리를 절망케 하지 못합니다. 왜? 우리 주님께서 우리 허물을 완벽하게 덮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매일 매순간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한시라도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어느 신문 신앙 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얼굴도, 몸매도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머리숱이 너무 적었고 언젠가부터 눈썹이 빠지더니 아예 눈썹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눈썹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항상 눈썹을 짙게 그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그 여자에게도 애인이 생겼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습니다. 그녀의 눈썹 콤플렉스는 대단해서 남편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고, 머리를 감거나 샤워한 후에는 혹시 들킬까봐 매번 눈썹을 다시 그려 넣고는 했습니다.

이렇게 삼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만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먹고 살기 위해 연탄배달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리어카 한 대를 사서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며 열심히 연탄을 날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어카를 몰고 가는데 바람이 확 불어 뒤에서 밀던 아내의 얼굴에 연탄 가루가 덮이고 말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남편이 수건을 꺼내어 아내의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남편은 아내의 눈썹 부분은 건드리지 않고 나머지 얼굴만 깨끗이 닦아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편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내가 마음 상해할까봐 모른 채 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허물을 덮으시며 보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간음한 여인이 주님 앞에 끌려왔지만 주님은 그 죄를 허물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고 말씀하시고 돌려보내셨습니다. 모든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를 보면 아버지는 “그 많은 재산을 다 어떻게 했니?”라고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좋은 옷을 입혀주고 잔치를 벌이셨을 뿐입니다. 아버지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아들이 그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며 모욕을 받으시던 현장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이후 주님은 이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베드로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심으로서 세 번 부인한 것을 갚도록 하셨을 뿐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이와 같이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허물을 덮는 이 사랑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 우리가 받았던 사랑을 그대로 세상에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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