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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소명 (창 47:1~4, 행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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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학자들이 말하는 2020년의 유망직종들을 미국의 ‘US News and World Report’라는 신문이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컴퓨터 호텔고객 서비스업인 컴프시어지, 음악치료사, 결혼은 물론 이혼도 관리하는 커플 매니저, 노인병전문영양사, 휴대형 전기 배터리를 개발하는 연료전지기술자, 홈페이지를 내 얼굴처럼 만들어주는 웹마스터 등입니다. 이런 직종 외에도 애니메이터, 메이크업 아티스트, 바텐더, 여행 설계사, 작업 치료사 그리고 사회복지사가 미래에 유망하다고 합니다.

  1964년도에는 우리나라의 직업의 종류가 약 1,300개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12,400여개로 증가하였습니다. 지식의 양이 늘고 분야별로 전문화 되므로 직업의 수도 엄청나게 늘어난 것입니다. 어떤 직업은 뭘 하는지도 잘 알 수 없는 것도 있고, 어떤 직업은 이런 일도 다 직업이 될 수 있나 라고 할 것도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참 정확하게 봤습니다. 우리의 모든 직업, 하는 일은 모두가 하나님의 소명(vocation)이라는 것입니다. 소명이란 꼭 하나님이 불러 목사가 되게 하고,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모든 세속적 직업도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우리의 일 가운에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것을 느끼는 것을 부르심(calling)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명’(mission)이란 말은 라틴어에서 ‘보내다’(sending)란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명 혹은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하나님의 일터로 보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러서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인 로마서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하나님을 “부르시는 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이라면 우리는 부름 받은 이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4에서 바울은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과 더불어 사도가 되었습니다. 제자라고 불리던 이들이 승천하신 다음에는 제자란 넓은 의미가 아니라 사도란 말로 바뀝니다. 제자는 배우는 자입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배우는 자가 보내심을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선택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부르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누구에게나 소명은 있습니다. 소명 없이 사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자체가 소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소명이란 발견하는 것이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소명을 선택할 권리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소명을 발견하면 소명자가 됩니다. 발견하지 못하면 방관자가 됩니다. 투철한 소명자는 소명을 확실하게 잘 발견하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우리의 원재료를 무시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곳에는 그분이 주신 은사도 있게 마련입니다. 가라고 하실 때는 할 만한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주라고 하실 때는 줄만한 것들도 공급하십니다. 누가복음 6:38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십니다. 재물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식, 재능, 은사를 나에게 베풀면 더 많은 것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소명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그분을 위해 일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함께 그 일을 하자고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우리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소명은 이 땅에서 그분께서 하시기를 원하신 일입니다. 그 소명은 우리의 소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잘 헤아려 그리스도께서 남겨 놓으신 일을 잘 감당하는 소명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소명은 우리에게는 천직입니다.

  야곱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70명의 식구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이주합니다. 야곱이 바로의 어전에서 바로를 만났을 때 아들들이 바로에게 자신의 직업을 말하고 자신들이 직업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땅을 달라고 부탁합니다. 창세기 47:3에는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나이다 하고”라고 합니다. 야곱은 조상 대대로 이어온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직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까?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가업에 안주해서 바꾸지 않으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대를 이어 온 천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야곱은 그 직업을 이어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원시직업을 보세요. 창세기 4장에는 양치는 자가 있습니다. 농사하는 자가 있습니다. 가축 치는 자 즉 목축업이 있습니다. 수금과 퉁소 잡는 자 즉 관현악단이 있습니다. 구리와 쇠로 기구 만드는 자 즉 대장장이가 있습니다. 목축만 아니라 다양하게 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조상 대대로 이어온 목축을 소명으로 생각합니다. 천직으로 생각하고 의심치 않습니다. 당시에는 농사짓는 일은 귀한 일이라 여겼고, 목축은 천한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세상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목축을 귀하게 생각하고 하늘이 내려 준 직업이라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유태인의 비즈니스 십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계약은 생명처럼 여겨라. 우리 조상은 하나님과도 계약했다. 둘째는 서명은 신중하게 하라. 운명이 왔다 갔다 한다. 셋째는 막히면 뚫어라. 모든 길은 마음에서 나온다. 넷째는 온 세상이 장사거리이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도 쥐어짜면 비가 된다. 다섯째는 올바른 장사를 하려면 시장으로 가라. 여섯째는 평생 신용을 지켜라. 신용이 없으면 문이 열리지 않는다. 일곱째는 한 우물을 파라. 결국 맑은 물이 용솟음칠 것이다. 여덟째는 정보 수집에 거래의 성패가 좌우된다. 아홉째는 체면과 형식에 사로잡힌 자는 알맹이가 없으니 멀리하라. 열째는 유태인이 세계 경제를 좌우한다는 이방인은 경계하라. 곧 칼을 들이댄다. 유대인의 비즈니스 하는 자세를 보세요. 장사가 소명입니다. 천직으로 여겨야 이런 프로 근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고든 맥도날드는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라는 책에서 인간을 ‘쫓겨 다니는 사람’과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그들이 가진 것, 생각이나 관계, 소유물 등 지키는데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반면에 ‘부름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빌려온 것이라는 철학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떠나는 데 만족합니다. 우리의 투철한 소명의식은 스스로 만족하게 합니다.

  토머스 칼라일은 “직업이 나를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면 내가 나의 직업을 영화롭게 하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더구나 요즘에는 직업의 귀천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간의 관념에서 천한 직업이라고 하더라고 내가 영화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며 소명의식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맡기신 삶의 터전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소명의 메시지입니다. 이 세상에는 소명 없이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회에서의 청지기라는 소명자의 삶을 사세요. 직장에서의 청지기라는 소명의식으로 일하세요. 직장이 단지 밥을 먹고 사는 보수 때문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천직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입니다. 이 세상은 신성한 노동의 장소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소명을 수행하는 곳입니다.

  일과 취미가 일치되는 직업을 찾았을 때에 말 그대로 천직을 구한 셈입니다. 미국 근로자의 80% 이상이 자신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도 이와 비슷하리라고 봅니다. 여러분의 일이 천직이기를 바랍니다. 일과 취미가 일치되어 일에 보람을 느끼고 날마다 하시는 일 때문에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소명은 생명을 바쳐 지켜야 합니다.

  창세기 47:4에는 야곱과 아들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자신들의 소명을 바꾸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목자는 천한 직업이고 농사는 고상한 직업이니 새로운 곳에 와서 분위기도 바꿀 겸 고상하게 농사짓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농지를 달라고 하지 않고 초지를 달라고 합니다. 고센은 애굽인들과 멀리 떨어진 초지가 많은 목축하기 좋은 땅입니다.

  인생에 역경이 부딪힐 때 보통사람은 세 종류로 나뉩니다. 첫째는 포기하고 도망가 버리는 사람 즉 ‘퀴터’(quitter)입니다. 둘째는 포기하거나 도망하지 않지만 역동적으로 문제를 넘어갈 생각도 못하고 주저앉아 현상을 유지하는 즉 캠프를 치고 안주하는 ‘캠퍼’(Camper)입니다. 60-70%의 절대 다수가 이에 속합니다. 셋째는 모든 힘을 다해 올라가 정복해 버리는 ‘클라이머’(climber)입니다. 우리에게도 인생의 역경은 비켜가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고통도 역경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역경을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소명도 그렇습니다. 소명을 수행하려면 어려움과 아픔이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포기하지 말고, 안주하지 말고, 넘어가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은 ‘대 제안’(the Great Suggestion)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명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명이란 발견하고 반드시 시행해야하는 것입니다. 소명이란 목숨을 다해 지킬 때에 비로소 소명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우리의 소명은 취미활동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해야 할 일입니다. 내 목숨을 걸어야 남의 목숨도 구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담겨야 소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업을 통하여 생명이 창조되고, 감동을 주고, 가치가 살아납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도예가를 보세요. 도자기에 자신의 혼을 담습니다. 우리 눈으로 보기엔 괜찮아 보이지만 혼이 없으면 여지없이 깨어버리고 맙니다. 혼은 생명입니다. 이걸 담아야 걸작품이 나옵니다.
  모든 소명인 직업은 혼을 담지 않고, 생명을 쏟지 않고 되는 것이 무엇 하나 있습니까? 혼을 담아보세요, 생명을 쏟아보세요. 안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보람 없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소명이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직업이 천하고 귀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혼이 담겨야 하고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직업이고 투철한 소명감입니다.

  오래 전에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느 핸가 지역 텔레비전에서 그 지역 한인 사업장의 광고 가운데 뽑아 광고대상을 준 적이 있습니다. LA지역 한인 타운에 ‘이태리안경’이란 안경점이 있었습니다. 그 안경점의 광고가 대상을 받았습니다. 인기 있는 모델도 아닌 사장님이 직접 나와 별로 유창하지 않은 말로 “내가 아는 것은 안경밖에 없습니다”라고 한 마디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습니다. 안경사는 안경밖에 아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게 전문가입니다. 아무 것도 몰라도 됩니다. 그래야 그 안경에 혼이 담깁니다.

  바울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천막쟁이는 당시에 그리 좋은 직업이 아닙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천막 만드는 일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로마에 큰 공을 세워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유산을 받아 부유한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천한 일이지만 일을 열심히 하므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0:33에는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얼마나 목회자로서 정당한 발언입니까? 데살로니가전서 2:9에는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고 고백합니다. 열심히 일하면 폐를 안 끼칩니다. 일을 만들지 않습니다.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이 일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누구에겐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내게 맡겨 두셨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전부 내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소명감이 투철한 사람은 내가 가진 것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을 소명감으로 남에게 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24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소명감 때문에 그는 생명을 바쳤습니다. 소명감과 생명을 바꾸었습니다. 모세는 소명 때문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소명이 남아 있으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합니다. 소명이 끝나면 살고 싶어도 더 살지 못합니다.

  이런 소명자에게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라는 이 소리가 들립니다. 이런 소명자에게 “나를 보내소서”라는 이런 응답이 가능합니다. 응답(response)의 능력(ability)을 책임(responsibility)라고 합니다. 소명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책임입니다.

  그레고리 보이드는 ‘십자가와 칼’이라는 그의 최근의 저서에서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이다. 그 소명은 백만 가지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직업이 다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성직만이 소명이 아닙니다. 모든 직업이 소명입니다. 모든 직업은 소명이며 소명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소명은 목숨을 바쳐야 완수되는 것입니다.

결론

  중국 고사에는 탕왕이 7년 동안의 한발로 기우제를 드리면서 이렇게 제문을 외웁니다. “임금이 부덕하여 정치에 과오가 있습니까? 백성들이 직업을 등한히 여깁니까? 궁궐이 너무 높습니까? 여인이 정치에 가담합니까? 관리들이 뇌물을 받습니까? 백성들이 모략하고 중상합니까?”. 백성들이 직업을 등한히 여기는 것은 하늘이 노하는 한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직업을 등한히 여기고 소명을 하지 않으면 하늘은 여전히 노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직업에 충실해야 하며 동시에 좋은 직업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직업 선택의 방법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고 그리스도를 풍겨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가? 직장 일을 통하여 성결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직장 일을 통하여 선교의 목적을 이루는가? 직장의 일을 통하여 신앙의 향상을 가져오는가? 직장 일을 통하여 죽을 때 투자한 보람을 느끼는가? 직장 일이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고 즐거운가? 직장의 일을 모든 가족이 자랑스러워하는가? 이런 기준에서 직업을 선택해야 그리스도인의 직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에 나쁜 직업이란 간단합니다. 직장에만 가면 까마득히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직업입니다. 이런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얼른 과감하게 바꾸세요.

  우리 시대는 백만 백수의 시대입니다. 직업이 없어 고통도 당합니다. 우리의 시대적 아픔을 지도자에게 탓하지 말고 직업을 소중히 여깁시다. 소명을 천직으로 받읍시다. 소명을 생명을 바쳐 지킵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직업을 영화롭게 하고, 직업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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