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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루 하루 삶의 소중함(시 3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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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계절의 변화를 확연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벌써 장미의 달이라고 불리는 6월이 다가왔습니다. 교회주변에도 긴 가지가 무겁게 자라서 등불과 같은 꽃봉오리를 달고 있는 장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어제는 화창한 날씨 가운데 시원한 바람이나 한 줄기 비라도 내려서 뿌려주면 본격적인 여름의 맛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계절의 변화-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요즘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될 삶의 생각들에 대해서 같이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주에는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가려는 것과 도봉산에 올라가려는 것은 생각부터 다르다’라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삶에 어떤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삶의 목표를 정할 때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나의 주변여건, 그리고 나의 형편에 따라서 모든 것만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내 생각과 여건과 능력과 형편을 바라보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섭리하시고, 나를 운행하시고, 나를 통해서 계획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신앙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믿음의 방법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목표를 설정한 후에 그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삶의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같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루하루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과 삶의 기회들을 애틋이 여기고 소중하게 여겨서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살아 주의 역사를 이루는 날들로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정하였다면 그 목표를 이루는 과정이 되는 하루하루가 하나님 앞에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고, 하루하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날이 된다면 우리 삶은 한없는 기쁨과 감사 속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아름다운 화판을 한 번 한 번 붓질을 통해서 채워가게 될 때, 결국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작품의 완성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 인생은 참 제한된 한계 속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생각해 볼 때 손바닥넓이만한 자그마한 삶인데 하나님 앞에 비교해보면 마치 없는 것 같고 우리가 든든히 섰다고 말할 때에도 허사뿐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사람들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지만 그것조차 누가 취할지 알지 못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시편의 기자는 그 가운데서 길을 찾습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물론 오늘 시편의 기자가 본문을 쓰게 된 것은 병중에 인생의 마지막 때를 당하게 될 때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와서 문병을 하고, 위로하고, 위로도 받지만, 또 어떤 사람은 와서 조롱하고, 또 마음에 상처를 끼치는 일들도 있음을 보며, 정말 그 마음을 부여잡고 그와 같은 어려운 상태와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고 일어서려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귀의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런 삶의 면모들을 생각해보면서 우리 삶의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귀한 것들이 되어서 우리 삶의 마지막 완성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의 시작도 어렵지만 그 일을 진행하여 완성하는 것은 더욱 더 쉽지 않은 일이나 너무나 중요하고 소중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삶에 있어지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이되기 위하여 오늘의 말씀을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생각하고자 하는 첫 번째 내용은 너무나 소중한 하루하루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이라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가 엮여져 이루어지는 삶 전체의 구조를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단 한 번의 기회뿐인 삶의 순간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어제도 해 뜨고 하루가 지났고, 오늘도 해 뜨고 하루가 지나서 해가 질 것이고, 내일도 또다시 해가 뜰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새로운 해가 떠 우리에게 똑같은 하루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가면 지나지 않는 유일한 시간들이 우리 앞에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의 하루와 오늘의 하루는 전혀 다른 것이며, 그리고 내일의 하루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늘의 시간을 보내면 그것은 다시는 그것은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 유일한-단 한번뿐인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 한 번의 기회뿐인 삶의 순간들을 하나님 앞에 소중히 여기며 우리로서는 그냥 허비할 수 없는 애틋한 심정으로 우리의 시간들을 채워가야 합니다.

한번과 한 번의 기회들이 연결되어 우리 삶은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삶이라는 것은 결국 연결이며, 직조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한 부분이 부실하여 썩어져 있다면 만약에 어떤 어려운 순간에 힘이 주어질 때 그 부분이 ‘툭’ 하고 끊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긴 끈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토막토막난 이와 같은 작은 동강난 끈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벽을 쌓아갈 때도 어떤 한 부분들이 부실하다면, 우리는 그 부실한 부분들이 만약에 어려움을 당할 때 그 곳으로 힘이 쏠려서 그 벽이 무너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삶의 부실한 부분들을 진열해 놓았을 때, 결국 평상시에는 모르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 부실한 부분들이 표가 나서 그것으로 우리 삶이 온전한 완성 체로써 사용되지 못하고, 조각 조각난 조각으로 밖에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한 순간도 매우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특별히 지나간 기회는 우리에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지금 해야 될 일을 하지 않고 시간을 지나쳐 버리면 나중엔 열배의 노력을 해도 지금의 하는 수고의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마다 단 한 번의 기회라고 생각하며 정말 무엇을 어떻게 가장 잘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서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하루,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이런 한 순간들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최고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우리 삶은 절대 허비할 수 없는 제한된 길지 않은 삶입니다.
손바닥 넓이만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든든히 선 때도 허사뿐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소비하고 허비할 만큼 우리 삶이 풍부하게 시간이 그렇게 길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것저것 다 해보고 괜찮은 것 나중에 선택해서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우리 삶은 그렇게 연습해볼 기회도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저것 다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선택해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위한 우리의 삶을 구성해야 합니다.
힘도 제한되어 있고, 우리의 능력도 제한되어 있고, 시간도 제한되어 있고, 우리 삶의 형편과 여건과 재료도 제한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을 허비하기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야구는 9회밖에 기회가 없고, 축구는 전반 후반 90분밖에 기회가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기회 속에 그 일을 이루어야 할 뿐입니다.
수험생은 늘 시험의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기회에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한 실력을 발휘해야 할 뿐입니다.
나중에 그것을 회복하려면 우리 삶은 너무 고통스럽고 이루지 못하게 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나의 삶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그럼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생각해 그것을 아주 애틋하게 여기며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이 순간순간들을 이루고 채워 나갈 때, 우리 삶은 전체가 윤택하게 구성되는 것을 봅니다. 하루하루 분량만큼 이루어야 할 삶의 과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우리에게 지금 숨 쉬고 살아가게 하셨을까하는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내 호흡과 삶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흡을 주신 이유는 지금도 무엇인가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 땅에 존속할 만한 아무 이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서 내가 지금 뭔가 해야 될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호흡을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내가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든가, 외면한다든가, 아니면 듣고 잊어버렸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얼 하라고 하시는 그 사명을 우리는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루하루 내 삶의 분량을 이루지 못하면 결국 가야 할 곳에 미치지 못합니다. 내 삶이 끝까지 오긴 왔는데 내가 가야 할 곳까지 가지 못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결국 우리 삶에 가야 할 곳과 내 삶의 길이는 거의 일치하는데 그 일치하는 삶 중에 어떤 일정한 부분을 우리가 훼손했다면, 결국 우리는 마지막까지 갔을 때 목적지까지는 조금 미치지 못하는 삶으로 우리 삶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은 하루하루, 한 순간 순간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지내고, 이루느냐에 따라서 삶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화판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한번 한 번 손길이 가서 채워질 뿐입니다. 나중에 못 채웠다고 해서 우리가 물감을 가져다가 붓는다고 해도 그 그림이 완성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이 한순간을 가장 잘 지내는 것이, 지금 내가 내 앞에 있는 한사람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지금 내게 주어진 이 기회를 가장 아름답게 이루는 것이 결국 내 삶 전체를 아름다운 완성품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 삶이라는 작품의 완성을 위하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하게 하루하루를, 한 순간순간을, 한번 한 번의 기회로 여기며, 정말 애틋한 심정으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귀하게 여겨 드려야 합니다.

두 번째는 그렇다면 삶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삶의 시간을 헤아리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남은 삶의 시간들을 안다면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내 삶의 시간들을 알고, 내가 해야 될 일의 분량들을 알고, 그리고 그것과 경주하여 어떤 일을 이룬다면, 우리는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이겠습니까?
시간이 아까운 사람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시간이 아까운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집중해서 그 시간을 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집중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집중을 위해서 우리가 할 것은 무엇이지요? 주변을 정돈하고 가지치기해서 집중해야 될 길을 축약시키는 겁니다.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바른 삶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볼 수 없다면 바른 삶의 길을 선택해서 그 길을 딱 한 번 가보고 결국 그 일을 이루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마음과 여건을 아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저것 다 해볼 필요가 없습니다. 다 해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시간이 짧다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가 더욱더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슬픔에 잠겨서 슬픔 때문에 어떤 일을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화가 나서, 분노 때문에 어떤 일을 그르치는 일, 속상함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일을 못한다면 우리는 매우 어리석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험을 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침에 기분 나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럼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합니까?
‘아, 오늘 기분 나쁘다고 계속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 아니야, 나 오늘 시험 보는 날인데 기분 나쁜 일 생각하면 안 돼. 빨리 잊어버려야지, 시험 보는데 전력해야지.’ 그리고 시험보고 나서 그 기분 나쁜 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분이 나빴던 일도 다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지내다 보면 너무 속상하는 일, 슬픈 일, 화나는 일, 이런 일들이 너무 많아요. 그런 일에 감정을 처리하다보면 힘도 쇠진되고, 시간도 허비되고, 그러다보면 정작 우리가 해야 될 일을 못해요. 우리가 우리 삶에 있어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일을 못한다는 것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우리 삶에 있어서 꼭 해야 될 일에 우리 마음과 시간과 힘과 주변 여건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의외로 우리는 너무나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마음과 힘을 쏟는 것 같습니다.
가야 할 곳과 이루어야 할 일의 중요함과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알고, 우리 삶의 소소한 것들을 지나칠 수 있는 대범함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잘 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떤 일을 넘어가고 생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백 가지, 천 가지를 다 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 있어서 평가는 무엇으로 받지요? 삶에 있어서 평가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평가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장면이 얼마나 다양해요. 인간관계만 해도 가족의 관계, 친구의 관계, 교우의 관계, 또 일에서 만난 사람과의 관계, 우리 사회적인 삶의 관계, 또 우리의 모든 개인적인 ...... 모든 삶의 다양한 국면이 있는데, 그것을 다 합해서 점수 평균내서 우리의 삶을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두드러진 부분을 가지고 평가받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스쳐가고, 지나가고, 잊어버리고, 때로는 그냥 넘어가고, 정말 우리가 해야 될 일에 우리의 모든 삶을 집중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어떤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생략하는 대범함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사소한 일에 우리의 목숨을 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기분이 좋다, 기분이 나쁘다’ 이런 일 때문에 어떤 일을 잘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합니다.
‘내 기호에 맞다, 안 맞다’ 이런 일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합니다. 저는 늘 마음에 한 가지 생각하는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왜 가롯유다를 가르쳤을까?’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 해 보신 적 없습니까? 왜 예수님이 가롯유다를 가르쳤을까? 예수님은 가롯유다가 배반할 줄 몰랐을까? 가롯유다는 지적받은 적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롯유다의 모든 면을 보면 가롯유다가 이와 같은 일을 할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왜 예수님이 그 가롯유다를 택해서 제자로 삼으셨을까?

예수님은 가롯유다같은 사람까지도 품고 가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데 가롯유다가 아닌 그 누구라도 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롯유다를 예수님이 그렇게 품고 가셨기에 그나마 가롯유다가 좀 나아졌겠지요. 저는 그런 생각 합니다. 예수님 주변에도 가롯유다같은 사람이 있어서 결국 예수님은 그런 사람도 다 품고 가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어떤 사람이 있어도 우리가 그 사람을 품고 가는 것이지, 결국 그것하나 이리저리해서 깨뜨려버리면 우리 삶 전체가 깨뜨려집니다.

우리 살다보면 두 종류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어느 부족한 점이 있고 마음에 안 차는 면이 있어도 품고 가서 결국 그 일을 끝까지 가는 사람하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다 깨뜨려버려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속은 시원한 것 같은데 되는 일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삶에 있어서 때로는 내 마음에 맞지 않아도 품고 가다보면 결국 그것들이 변하여서 우리에게 돕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의 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는 기호의 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요.
사랑은 감정에서 시작되지만, 그 사랑이 유지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변하냐? 변하지요.
감정은 변합니다.
사랑은 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감정이라고 말하면 사랑은 변하는 거지요.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감정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변한 감정을 우리는 의지로 유지해가고, 우리 마음이라는 희생과 헌신의 심정으로 아름답게 꽃피우고 승화시켜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변한다는 것은 사랑의 감정이 변하는 것이지만, 사랑의 의지와 사랑의 희생과 헌신은 오히려 변한 감정을 극복하여 더 아름답게 승화시켜가고 완성시켜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감정에 의해서 좌우된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 고급하지 못한-저급한 수준에서 헤매다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속에 어떠한 감정적인 정서가 일어나든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능가하는 우리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정의 수준을 능가하셨어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나드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을 때도 가롯유다는 어떻게 했습니까? 마리아를 비난하면서 왜 저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느냐고 비난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가롯유다는 돈궤에서 돈을 훔치고 있었거든요. 그런 말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가롯유다를 끝까지 품고 가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보면 예수님은 그 마음의 감정의 수준을 능가했던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호산나, 호산나’ 환호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았지만, 그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꿈을 이뤄주지 못할 때 곧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얼마나 섭섭함과 상처와 분노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감정의 선을 극복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가야할 길이 있었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고, 그것 때문에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감정에 따라서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박차고 ‘내가 저것들을 가만둬?’ 하고 일어나실 수 없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나 할 수 있죠.’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물론 우리는 예수님처럼 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이 하는 일을 따라가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 주의 성도들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로 그 일을 하시게 하시겠죠.

결국 우리의 삶에는 삶의 설렘이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내 삶의 감정의 수준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설렘이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날마다 이루어야 할 삶의 과제와 더불어 경주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의성=적시성>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입니다. 어떤 일이 언제 이르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 이루어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 밥 한 그릇 주면 너무 감사하고 기쁘고 맛있습니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나 밥을 주면 그것은 너무 괴로운 겁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어떤 일을 하는데 그 일이 언제 이루어지느냐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일인가도 중요하지만 그 일이 언제 이루어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좋은 때를 활용하기 위해서 보다 더 한 걸음 먼저 달려가 길목에서 그 일을 지키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즉 우리들에게 있어서 삶의 경주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능력과 속도와 지구력이 어떤 일을 이루는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되고, 어떤 일이 그 시대를 능가하는 속도가 있어야 되고, 또 그 일을 지구력으로 끝까지 유지해서 완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능력만 있어도 안 되고 속도가 있어야 되고, 속도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이루는 지구력이 있어야 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 삶의 경주를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여건과 은혜와 능력을 가지고 우리 삶의 모든 어려운 장벽들을 극복해내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삶의 과제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 삶의 경주를 이루는 믿음의 백성들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 세 번째 생각해 봅시다. 우리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소망을 두는 삶, 이런 축복된 삶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비로소 삶의 길을 찾음으로 이제까지 부딪히고, 갈등하며, 이기지 못해서 몸부림치던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길 곧 사명의 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축복받은 인생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까지는 내 길을 찾지를 못했어요. 그때는 마음의 부딪힘도 많고 갈등도 많았는데, 내 자신의 문제 하나 이기지 못해서 정말 몸부림쳤는데, 내 삶의 분명한 삶의 길이 보이니 이제 그 길을 향하여 달려가다 보니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받은 인생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길과 제자들의 삶의 길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왜 그랬냐하면 예수님은 탄생과 준비의 과정과 사역을 통해서 결국 십자가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목표가 정확했어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는 따라다녔는데 내 길이 어디 있는지 몰랐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권세를 잡으면 이렇게 따라다니다 고생하면 한자리쯤 하겠지.’ 그게 그들이 생각하는 길이였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늘 어긋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 충만의 역사를 체험하고 나서 그들도 그들의 길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그들은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갈등이 없어졌어요.
자신의 삶에 대해 몸부림치는 이와 같은 마음 아픔이 없어졌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삶에 있어서 행복한 삶이라는 것은 주님께 소망을 둔 삶이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길을 보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일을 기쁨과 은혜로 지낸다는 것은 뭡니까?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전에는 내 길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갈등도 하고 방황도 많이 했는데 이제는 내 길이 분명히 보이는 것입니다. 길이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안가겠습니까?

여러분 다른 사람들은 ‘길이 어디 있냐? 길이 어디 있지? 무엇을 하지? 나 아무것도 안보여. 모르겠어.’ 하는데, 어떤 사람은 ‘여기잖아.’ 하며 가듯이 그냥 갑니다.
모든 사람이 헤매고 있는데 ‘이거야’ 하고 단번에 택합니다. 그게 뭡니까?
말하자면 탁월함이고, 개안-눈을 뜬 겁니다.
다른 사람은 눈이 안보이니까 어디냐고 헤매고 있는데 “여기잖아, 이거잖아.”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삶의 탁월함이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헤매는데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 오면 ‘이거야’ 하고 단호하게 얘기하고 그길 가면 그대로 돼요.
바로 우리들이 그렇게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여야 됩니다. 느끼지 못한 것들이 느껴져야 합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것이 자신감이 생기고 내게 능력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사람이 되자고 기도하고 있는데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또 하는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손에 조그만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오병이어가 쥐어졌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고 축복하여 기도하시고 떼실 때에 오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병이어를 주시지 않았을까?
내게 주어진 작은 재능, 내게 주어진 작은 여건, 내게 주어진 작은 교육적 배경, 내게 주어진 작은 힘, 작은 형편들, 이게 내 손에 쥐어졌을 때 우린 예수님이 축복하여 기도했듯이 우리는 우리 삶속에 주님께서 이루신 각종 아름다움과 은혜와 능력을 가지고 그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열두 광주리를 거둘 수 있는-이와 같은 축복을 이 세상에 실행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볼 때 ‘나도 오병이어의 축복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이 기도가 ‘내가 주님이 주신 오병이어를 가지고 떼 논 떡을 먹게 해 주십시오’ 뿐 아니라, 우리가 그 오병이어를 가지고 이 떡을 떼어주는 일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오병이어는 우리가 먹어야 할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오병이어를 베풀어야 되는 기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러분 내게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가 있는데, 그것을 꿀꺽 꿀꺽 삼키고 내가 배부르면 그것으로 끝날 겁니다. 그런데 내게 오병이어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기 위해 애쓰고 나누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더 큰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볼 때 ‘나도 그 기적을 체험해야지’ 하고 우리는 머리를 숙이고 달려가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가지고 ‘나도 그 기적을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베풀어 줘야지’ 하고 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우리는 또 다른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저는 이 자리에 있는 저희 교회의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 체험하여 그 오병이어를 먹는 사람뿐이 아니라, 그 오병이어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했으니 이제는 우리 손에 들려진 작은 오병이어와 같은 것들이 바로 우리 손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풀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성도의 삶을 회고하고 반추할 때, ‘내가 정말 그렇게 기도했는데, 내가 정말 이렇게 천명을 돕고 살았구나!’ 하고 감격하며, 우리의 삶을 그윽이 바라보고 주님께 감사하며 우리의 호흡을 거두는 이와 같은 삶이 돼야 될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 소망을 두사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야말로 내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나누어주려는 소망을 가질 때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더욱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주님께 소망을 두고 달려가는 삶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소망과 꿈이 보여 그것을 쫓아가느라 눈이 시고, 앉으면 졸리지만 일어나면 힘이 생기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무지개를 좇는 삶을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눈에 목표가 어른거려야 합니다.
정말 사람끼리 지지고 볶고 할 시간이 없습니다.
전력질주해서 마라톤 하는 사람들을 보면 길에서 모든 사람들이 박수도 치고 환호도 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가다보면 ‘왜 저렇게 잘 못 뛰어가’ 하는 소리도 들릴 수 있겠죠. 그런데 그런 소리에 마음 상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것 이기고 가는 거야.’ 하고 우리는 마음속에 무장을 하면서 다시 마음을 다지면서 가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용기를 주며 가야 합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세상에 혼자서 어떤 일 못합니다. 모든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나도 그 사람을 도와서 그 사람이 어떤 일을 잘 하게 될 때 그것이 나에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 가만히 따지면 세상은 이분법으로 따지면 우군과 적군이 있습니다. 아군과 적군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군을 적군처럼 여기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옆의 사람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당신은 내 아군입니까? 적군입니까?”
그런데 아군끼리 싸워요. 아군끼리 총질하고 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정에 있는 사람은 다 아군입니다. 교회에 있는 사람도 다 아군이고, 주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아군이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다 나를 돕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돕고 내가 그 사람을 돕는 것이 서로를 돕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군끼리 머리 터지게 싸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당신은 내 아군이요, 적군이요?”
그런데 왜 싸워요, 싸우긴. 우리는 싸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서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용기를 주고, 서로 세워주는 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달려가는 중에도 어른거리는 목표 속에 달려가야 하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달려가며 힘이 쇠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 점점 솟아나야 합니다. 우리는 수고함으로 힘을 얻고, 오히려 능력이 생성되고 늘어나는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운동함으로 힘이 쇠진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가속도가 붙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정말 믿음 안에서 달려갈 때 힘이 점점 소진되는 것이 아니라, 달려감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점점 가속도가 붙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운데 점점 가속도가 붙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사명 속에 기쁨과 감사함이 있어 내 삶이 그렇게 감격스럽고, 기쁘고, 감사하고, 어떤 삶의 역경과 어려움도 감사할 만큼 삶에 자신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겸손한 사람은 탁월한 사람입니다. 탁월하지 않은 사람은 겸손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내가 누구에게도 비굴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 내가 자신이 있고, 누구에게도 베풀 수 있는 자신이 있을 때, 그 때 사람이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마음속에 어떤 비겁함을 느끼지 않을 때는 겸손해질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 있어서 정말 수고하고 애씀으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나눌 것이 있을 때 우리는 더욱 더 겸손함으로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보통은 감사가 생깁니다. 감사를 분석해 보니까 세 가지에 대한 감사가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하죠?
두 번째는 사람에 대한 감사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서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섭리해서 내 앞에 두셨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고 찬송하며 기도할 뿐 아니라, 내 옆에, 앞에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감사하는데, 내 앞에 있는 사람만 보면 신경질 나요. 이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사람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뭐에 감사하죠? 내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내게 이런 환경을 주셨겠지.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애들이 속 썩일 때 애들에게 감사하죠? 그렇잖아요. 애들 때문에 우리가 철들잖아요. 또 속 썩이는 사람 때문에 인내 받고 연단 받죠?
그래요. 속 썩이는 사람 때문에 인내를 받고 연단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감사한 것입니다. 당신이 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 옆의 사람과 인사합시다.
당신이 내 마음에 안 들어서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안 드는 당신하고 지내면서 얼마나 내 자신이 얼마나 연단이 되는지 너무 감사합니다. 내가 당신 때문에 연단 받지 못했으면 이 세상에 나가서 다른 어떤 일도 못했을 텐데 당신 때문에 연단 받아서 내가 강해져서 다른 일을 하니 당신이 얼마나 내 은인입니까?

‘당신이 내 은인이다.’ 이 말은 꼭 칭찬만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감사한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은혜 가운데 정말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내가 정말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 여건 속에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정말 좋지 않은 여러 가지 형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지 못한 형편이 결국 우리를 이렇게 강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얼마나 감격스러운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감격스럽게 사는가 하는 것은 가장 단적으로 따지면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귀가 순해지고, 두 번째는 혀가 순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떤 얘기를 들어도 귀가 순해져서 마음이 기뻐져요. 어떤 일을 말해도 내 마음이 순해져서 다른 이들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고,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뭡니까?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런 겁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았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는 기분 나쁜 것이 없어.’ 이 말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한 번 여쭤볼게요.
“여러분 하나님께 은혜 받으셨습니까?”
우리 교회는 두 번 물어봐야 그때 대답을 해요. 제가 다시 물어볼게요.
“여러분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그럼 제가 또 다른 말로 똑같이 질문을 드릴게요.
“여러분 세상에 기분 나쁜 일 없죠?”
“이상하네. 이게 똑같은 문제라고 드렸는데......”

은혜 받고나면 기분 나쁜 일이 없는 겁니다. 모든 게 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은혜는 받았는데 아직까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은 뭔가 좀 이상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기분 나쁜 일이 없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감사해요.
하나님께도 감사하고, 사람에게도 감사하고, 주어진 여건 속에도 감사하고,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고, 이제는 누구와도 감사할 수 있고......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다 어려서 그래. 너무 힘들어서 그래.” 그렇게 이해하면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직 어려서 그래. 너무 힘드니까 그렇겠지. 또 뭐라고 얘기합니까? 아직 믿음이 없어서 그래. 그러면 이해하겠지요?
자 다시 한 번.

“다 어려서 그래. 너무 힘들어서 그렇겠지. 아직 믿음이 없어서 그래.” 정 이것도 안 되면 ‘환자니까 그래.’ 이렇게 생각하세요. 그러면 우리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어리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너무 힘드니까 짜증내는 것 아니에요? 믿음이 없으니까 그렇게 밖에 못하겠지요. 그래도 안 되면 환자니까 그렇게 짜증 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처음에 이해가 안 되다가도 또 이렇게 삶의 원칙을 대입해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삶이고, 우리 삶의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자신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섭섭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있다는 것은 섭섭함이 없는 겁니다. 사람이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면 자꾸 섭섭한 일이 생깁니다. 내가 섭섭함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왜 이렇게 자신감을 상실했지’ 이 말하고 똑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섭섭한 일이 없어지는 겁니다. 내가 자신이 있는데 뭐 섭섭할 게 있겠습니까?

무슨 말을 해도 나를 인정하고 이렇게 하겠지요. 내게 섭섭한 말을 해도 무슨 말로 들리지요?
‘이런 정도의 말은 소화할 수 있다고 나에게 하는구나. 나를 상당히 믿어주네.’ 그렇죠? 그런 것 아닙니까? ‘이런 정도의 얘길 해도 상처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오히려 그렇게 나를 믿어준 그 사람에 대해서 감사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늘 우리는 부족함을 느끼며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가 되신다는 생각을 하면 감사할 뿐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바라볼 때, 정말 애틋하고 소중한 심정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봐야 됩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를 바라볼 때 너무 소중한 날이다. 내게는 내 손에 쥐어진 소중한 보물과 같은 이 하루를 어떻게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살까 생각하면, 우리는 어느 날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돌멩이인줄 알았는데 손을 펴보니 그게 보석으로 우리 눈에 발견되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돌멩이를 가지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게 보석이더란 말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다른 사람도 애틋하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진정한 삶의 꿈이 있어야 합니다. 그 꿈은 나하나 잘되고자 하는 꿈이 아니라,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꿈을 따라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이 시공간을 역사라고 생각하고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우리의 모든 삶의 활동무대를 역사와 사회라고 우리는 설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삶의 무대인 이 역사와 사회 속에 무엇인가 기여하고 공헌하고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밥 먹고 살다 끝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 삶이 밥 먹고 살다 끝난 것이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초라합니까?
정말 내게 기회를 준 이 사회에, 이 기회를 준 역사에,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과 공간위에 무엇인가 기여하고 공헌함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여함과 공헌함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우리가 뭔가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누구에게든지 가서 우리 때문에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위로받을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위로해주고,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우리의 작은 도움 때문에 그들이 무엇인가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위해 달려가 우리의 것을 나눌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삶의 한 순간순간들은 너무나 소중하고, 아깝고, 아무렇게나 살수는 없는 겁니다. 잘 누리다가는 삶도 중요하지만 내가 누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다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꿈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내 손에 쥐어진 작은 오병이어와 같은 삶의 작은 것이라도 내가 이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떼어주고 나누어주어 정말 오천 명이 먹고도 남는 축복이 있듯이 나는 내게 주어진 오병이어를 그냥 내가 꿀꺽 먹고 삼키고 끝날 것이 아니라,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데 사용 돼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우리 삶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에게-우리를 도우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가야하며, 마침내 우리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을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곳에 헌신하는 것이 역사의 한 모퉁이에 기여하고, 헌신하고, 공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삶의 무대 속에 우리가 할 일을 하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얼마가 되었건, 내 능력이 얼마건, 아니면 내 형편이 얼마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가 별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무슨 기여고 공헌이고 할 수 있는가, 내게 별로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기여고 공헌이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씨앗을 뿌리며 그 씨앗을 거두게 될 때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뿌리라고 했으면, 그 씨앗을 거두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섭리하고 역사하실 것입니다. 마음에 소원을 주셨다면, 그 소원을 이루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내 앞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내게 주어진 작은 여건 하나하나를,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능력 하나 하나를 아주 소중하게 여겨서 그것을 가지고 큰 역사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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