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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손의 실수 (삿 16: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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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삼손의 실수                 
본문 : 사사기 16장 15-22절

오늘 본문에 보면, 삼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태어날 것을 가르쳐 주고, 나실인으로 태어났던 삼손--,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여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던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삼손--, 이러했던 삼손의 일생이 평탄치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삶이, 16장 21절 이하에서 나오는데, 들릴라라는 사랑하던 여인에게 배신을 당하여, 머리가 깎이우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두 눈이 뽑힌 채로, 감옥에서 맷돌질을 하고 있는 삼손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사사가, 블레셋 사람의 신전에서 재롱을 불리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어쩌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으로 받아, 사사가 되었던 자가, 이렇게 실패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삼손의 실패를 통해서,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는 실패를 막아야 합니다. 

1. 삼손의 실수는 구별된 삶, 깨끗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삼손이 첫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여자, 여자, 여자뿐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앞서, 16장 1절을 보면,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라고 시작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삼손이 한 창녀를 보고, 그에게로 들어가서 잤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문맥의 앞 뒤 어디를 살펴보아도, 삼손이 주저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삼손이 창녀에게로 들어가는 사건은, 이 한 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삼손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정적인 원인은,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한 데 있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 이전에, 삼손은 벌써 두 명의 여자를 거쳐 온 상태였습니다. 첫 번째는 딤나의 여인이었습니다. 삼손은 이 여자 때문에 엄청난 곤욕을 치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의 여인을 찾아간 것입니다. 1절에 나오는 가사라는 곳은, 블레셋의 땅입니다. 삼손은 이스라엘 영토를 한참이나 벗어난 적진의 남단까지 들어가, 거기 있는 기생과 불륜을 행했습니다. 이것은 한번 죄를 지게 된 삼손이 양심에 가책도 없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바른지, 그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본능대로 행동할 뿐이었습니다. 이성적인 판단과 사리 분별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삶을 살았습니다. 삼손에게 있어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경건의 모양만 있었을 뿐, 경건의 내용은 없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 앞에서 평생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성결한 삶을 위해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면 안됩니다. 부정한 것을 먹어서도 안되고, 만져서도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하나님께 헌신한 상징을 유지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물론 삼손은 하나님께 구별된 상징으로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한 약속은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성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헌신한 표시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지만, 실제 그의 삶은 엉망이었습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술을 마시면서, 육신의 정욕을 따라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창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경건의 내용은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삼손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삼손이 나실인으로써의 사명을 감당치 못한 것처럼, 혹시 우리들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치 못하지는 않고 있는지요? 삼손이 사사의 사명보다는 온통 여자 생각뿐이었듯이,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보다, 예배보다, 온통 세상과 물질만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는가 말입니다. 지금 삼손은 어디 있어야 합니까? 주의 일을 해야 하며, 백성들을 돌보아야 하며, 예배드리며, 기도하는 경건한 생활을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지금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는 여인의 집에서, 그녀의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삼손이 이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들릴라의 시험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끝내 사망의 자리에 있다가,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말하기를 “악인의 꾀를 쫒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삼손의 사건을 통해, 나의 모습을 돌이켜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구별된 나실인입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 사람과 구별된 사람으로서, 정결한 삶,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죄의 길에 가지 말고, 악인의 꾀에 빠지지 말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라 생각되었다면, 곧장 회개하며,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위대한 사역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삼손이 실패한 이유는 영적으로 무감각해 졌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삼손의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보십시오. 삼손은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몰랐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처참한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임하여, 나귀 턱뼈로 천명을 죽였던 삼손이, 블레셋 사람에게 붙잡히어, 두 눈이 뽑히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영적 불감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상태가 엔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쿠스니, 오피러스니 하는 좋은 차라도, 연료가 떨어지게 되면, 차가 움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연료가 충만해야만, 차로서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할 때, 넉넉히 감당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주의 일을 하는 것도, 영적으로 민감할 때에 가능합니다. 또한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되는 것도, 영적으로 민감할 때에 가능합니다. 영적으로 둔감하고, 죄성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삼손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보십시오. 삼손은 하나님 앞에 헌신된 나실인이면서도 기도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주의 일을 할 때,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여러분도 일주일 내내 전혀 기도 없이 살다가, 주일 예배 때 겨우 형식적으로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날마다 삶을 주님께 의탁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생활하지 않는다면, 삼손처럼 될 위험이 있습니다. 삼손은 기도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과 꾀만 믿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자신의 육신의 정욕이 이끄는 대로 살았습니다. 죄가 습관이 되었습니다. 이런 인생에는 하나님께서도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삶은 결국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생 최고의 비극입니다.
집에 가셔서 사사기를 정독해서 읽어보십시오. 대부분의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에는, 그 땅이 태평했다고 했습니다. 그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그 땅이 평화로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사사로 있는 동안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한 지도자의 잘못된 인생이, 그 땅을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신앙이 그 가정에 평화를 깨뜨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돌아서야 합니다. 껍데기 같은 신앙의 형식을 벗어 던지고, 더 늦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한 생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 헌신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죄가 나를 다스리지 못하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적상태를 엥꼬상태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영적 불감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예배를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실패와 절망을 이겨내고 성공할 수 있는 삶의 비결입니다. 

3. 삼손의 실패는 유혹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혹하면, 창세기 39장의 요셉이 생각됩니다. 젊고 잘 생긴 요셉에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합니다. “나와 동침하자”고 말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요” 하면서 그 자리를 피합니다. 처음에는 누명을 쓰고, 옥에도 갇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혹이 오늘 본문 앞에서와 본문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16장 5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몰려와서 이 들릴라에게 유혹을 합니다. “은 천 백개를 줄 터이니, 삼손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아내라” 어마어마한 얘기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먹을 때 은 20개를 받았습니다. 은 20이라는 숫자는 형제를 팔아먹을 만큼 유혹이 되는 큰돈입니다. 가롯 유다가 자기의 메시아인 예수를 팔아먹을 때, 은 30을 받았어요. 은 30이라는 숫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먹을 만큼 큰돈입니다. 그런데 오늘 들릴라는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은 일천 백개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안 넘어 갈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에 “당신이 주일만 근무해 주면, 봉급을 2배로 주겠노라” “당신이 주일날만 문을 열면, 일주일 중에서 6일 동안 번 것보다 갑절을 벌 수 있다”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은 천 백개를 줄 터이니, 삼손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 지 알아내라” 이것은 세상을 대표하는 유혹입니다. 여기서 들릴라는 세상에 쓰임 받는 그리스도를 향한 도전의 한 유혹의 도구를 말하며, 블레셋은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길로 가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돈으로, 때로는 여자로, 때로는 명예로, 때로는 많은 인간들의 마음을 끌 수 있는 것들로 우리에게 유혹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이런 유혹을 넉넉히 이겨야 할 것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유혹하는 들릴라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삼손의 모습도 볼 수가 있습니다. 4절을 보면,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고 하는 여인을 사랑하매”라는 말이 나옵니다. 멍청한 인간이지요. 들릴라는 삼손을 사랑하지 않아요. 오히려 돈을 갖기로 하고, 삼손을 팔아먹으려고 하는데, 이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한답니다. 세상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우리들은 그 세상이 주는 유혹, 돈을 사랑하고, 명예를 사랑하고, 지위를 사랑해서 끌려 다니느냐? 그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성경을 보면, 삼손이 한심하고 답답하잖아요. 더 답답한 것은, 계속 들릴라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오히려 이용하려는 들릴라의 품에, 삼손은 사랑하는 줄 알고 자꾸만 품에 안깁니다. 그리고 속삭입니다. “당신의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한번, 두 번, 세 번 삼손을 유혹합니다. 그때마다 재치로 속이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어린아이라도 이것을 보면, 삼손을 팔아넘기려는 것을 알 수 있는데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기껏 16절에 하는 말이,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들릴라의 관심은 다른 데 있지 않아요. “어떻게 하면 삼손을 망가뜨릴 수 있을까?” 세상의 관심은 한가지입니다. 사탄 마귀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떠날 수 있을까?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하면, 기도의 자리에서 떠날 수 있을까? 헌신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던 사람을 어떻게 하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할 수 있을까? 그게 관심이예요. 다른 것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들릴라의 품에 안겨서 “평안하다” 그리고 거기에 누워있어요. 잠까지 잡니다. 결국 “네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리라” 답을 알려주고 말았습니다. 우리 속담에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데, 삼손 두고 하는 말 같아요. 들릴라의 유혹에 결국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국 삼손이 멍청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혹이라는 것을 몰랐으면 몰라도, 알고 난 이싱은 그 자리를 벗어났어야 했습니다. 그 유혹에 자리, 죄악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서, “번민하여 죽겠다”고 한다면, 멍청한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세상의 유혹의 자리에, 죄의 자리에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을 넘어지게 하고, 죄를 짓게 하고, 우리를 사망의 길로 가게 하는 유혹의 자리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삼손이 블레셋 사람에게 잡혀, 두 분이 뽑히고, 묶여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고 있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위대한 하나님의 사자, 삼손이 무력하게 넘어지고 말았습니까? 사사로서의 구별된 삶을 살기 않았기 때문이요, 영적으로 무감각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 같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삼손은 하지 못했기에,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할 수 있는 것을, 왜 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만용이었습니다. 교만인 것입니다. 삼손은 자기 힘을 과시 했습니다. “너희가 아무리 한번 해봐라. 나는 끄떡없다”는 것입니다. 구태여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알아서 할 수 잇다는 교만인 것입니다. 머리가 힘의 상징이 아닙니다. 힘의 상징인 하나님이 삼손에게서 떠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이 머리 깎인 삼손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교회가 세상 속에서 머리 깎여져서 비참해진 힘없는 삼손 꼴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엄청난 권세를 주셨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구하는 사명이자, 권세입니다. 이 권세와 사명을 넉넉히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삼손의 실패를 교훈삼아, 결코 실패하거나, 넘어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과 상급을 받게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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