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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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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 세상을 떠난 프란시스 쉐퍼 박사를 기억합니다. 쉐퍼 박사는 말년에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합니다. 그는 암과 혹독하게 싸우면서도 아픈 몸을 이끌고 캠퍼스 사역에 나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사랑했던 젊은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최후의 메시지를 피를 토하듯 외쳤습니다. 그가 외친 내용은 이상스런 것이었습니다.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누구에게나 의아한 제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이러했습니다.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행복은 구하지만 거룩함은 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의 메시지는 미국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이 시대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축복과 행복은 구했지만, 거룩함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은 꿈과 비전은 구하지만 거룩함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꿈과 비전이 우선이 아닙니다. 행복과 축복이 우선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애통하고 슬퍼하는 마음을 갖고 거룩한 삶을 추구할 때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부족과 허물투성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온전해지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할 뿐입니다. 온전하다고 착각하여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또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자포자기 하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노력할 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오늘은 6.25 상기주일입니다. 국가와 민족에게 아픔과 상처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개인과 가정에 고난과 고통이 많습니다. 민족의 50%정도가 눈물과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어디에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아픔과 눈물이 있습니다. 겸손과 회개와 기도의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축복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욱 온전해 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사랑하라

  본문 43-44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에 근거한 실천적 윤리를 강조하신 예수님의 교훈 중에 최절정의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오직 사랑할 의무만 있고 미워할 권리가 전혀 없습니다. 미워하고 저주하는 자격증을 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탄의 속임수이며 장난입니다. ‘사랑하라’의 헬라어 ‘아가파오’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가리키는 동시에 인간과 인간 상호간의 다함없는 헌신과 봉사를 전제합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안기는 자들에게 오히려 선을 베풀고 타인의 유익을 위하여 희생도 불사하는 자세를 뜻합니다. 자신의 원수에 궁극적으로 승리하며 평화를 되찾는 가장 탁월한 무기는 미움에 대한 더 큰 증오가 아니라 무한대하고 무계산적인 뜨거운 감정과 부지런한 행위로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닮게 되고 더욱 온전해 집니다. 미워하는 것은 마귀를 닮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함으로 더욱 폐허가 됩니다.

  위대한 설교자들 가운데도 침체의 골짜기를 통과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중 한 분이 찰스 스펄전 목사입니다.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의 아내 수잔나는 33세 때부터 환자였습니다. 남편이 수천 명의 성도들에게 설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항상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스펀전도 설교를 마치고 집에 올 때면 거의 예외 없이 지쳐 있었고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통풍이라는 지병이 그를 늘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침체의 늪에 빠질 때마다 수잔나는 리처드 백스터가 쓴「참된 목자」라는 책을 읽어 주곤 했습니다. 수잔나는 고백했습니다.
  “남편은 내가 책을 읽어 주면 곧잘 눈물을 흘렸지요. 나도 같이 울곤 했어요.”

  그녀는 자신이 일생 동안 환자였기에 남편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벽난로 속에 타고 있는 참나무 장작을 바라보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저 벽난로 속의 늙은 참나무 같았지요. 불이 아니면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니까요.”

  성령님은 낙심하고 침체된 스펄전 목사와 그의 아내를 찾아오셔서 불을 붙여 주셨습니다. 위로해 주셨습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두 사람을 찾아오셨고 그들의 위로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눈물의 골짜기, 어두움의 골짜기, 침체의 골짜기에 임했습니다. 침체 중에 흘리는 눈물은 하나님의 값진 선물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는 영혼의 창이 깨끗해지는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이런(Byron) 경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망원경을 통해서보다 눈물을 통해 더 잘 볼 수 있다.”

  여러분의 ‘원수’는 누구이며 얼마나 됩니까? 미워하면 ‘원수’는 더 많아집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원수는 없어집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존재이며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반항하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사랑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은사와 능력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사랑할 때 하나님을 닮게 되고 온전해 집니다. 미움은 불행이고 후회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행복이고 후회없는 완전한 것입니다. 원수(웬수)까지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온전해 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기도하라
  본문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핍박하다’의 헬라어 ‘에페레아제인’은 ‘협박하다-공갈하다-학대하다-천대하다-욕하다’의 다양한 의미가 내포된 말로서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박해 행위는 모두 포함한 말입니다. 이처럼 적극적인 미움의 행위로 접근해오는 자들에 대한 대처법으로 예수께서는 ‘기도’를 역설하셨습니다. 가스총이나 쇠파이프나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정녕 자신의 눈앞에서 현실적인 피해를 안기는 핍박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과 기도는 상호보완적 역할을 합니다. 더 사랑하면 더 많이 기도하게 되고, 더 기도하면 더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와 사랑은 정비례합니다. 보이지 않는 사랑이 기도이고 보이는 기도가 사랑입니다. 사랑과 기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통로입니다.

  이무석 교수의「30년 만의 휴식」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 최초의 정신 분석학자였던 김성희 교수는 평양대학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던 시절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공산당원 한 명이 병원에서 씩씩거리며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막 크리스천 간호사들을 끌어다가 총살하고 돌아온 길이었습니다. 증오하던 크리스천들을 죽여 버렸으니 시원할 법도 한데, 그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총살 장소로 실려 가는 트럭 속에서 간호사들이 기도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을 들어보니 자신들을 총살하려고 하는 공산당원인 자기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크리스천 간호사들이 살려 달라 애원하며 그의 발목을 붙들고 매달렸으면 강자로서의 쾌감이 있었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녀들은 죽음 앞에서도 태연했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녀들이 강자이고 그가 철없는 짓을 하는 약자 같았습니다. 그래서 공산당원은 간호사들을 총살시키고도 패배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평양의 크리스천 간호사들은 예수님이 원하던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숙한 삶’을 보여 준 사람이었습니다. 철든 어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절대적 존재에 대한 신뢰가 그들을 성숙시킨 것입니다.

  누가 인생의 승자요, 누가 패자입니까? 손에 총을 들고 아무도 겁날 것 같지 않는 공산당원입니까 아니면 손이 묶인 채 저항조차 못하고 끌려가는 예수 믿는 간호사들입니까? 우리 모두는 인생을 승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인생에서 강자가 되고 승자가 되기 위해서 분투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땅에서 무엇이 되고,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을 누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소유할수록, 세상을 즐길수록 오히려 세상이 나를 소유하고 나를 부리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진정한 승자론에 눈 뜨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시대가 요구한다면 기꺼이 평양의 간호사들이 가졌던, 예수에 중독된 심장을 가슴에 품고 묵묵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걸음을 걷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핍박자는 누구입니까? 싸우거나 저주하지 말고 그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합시다.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합니까? 언젠가는 반드시 회개하고 변화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동안에 믿음이 성장하고 온전한 성도로 자신이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은혜이며 사명입니다. 은사이며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시대와 교회의 ‘기도꾼’이 됩시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절대로 아무것도 안 됩니다. 기도로 온전해 지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문안하라

  본문 47-48절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프루머(Plummer)는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성도들은 주위 사람들의 행동 양식보다 뛰어나게 살고 온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선교하고 구원해야 합니다. 사람이 적절하게 인사하는 것은 예의와 존경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같은 생각과 목표를 가지고 있는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그들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방인은 이교도이므로 인종적 의미 이상의 영적인 조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넓게는 모두가 형제이고 선교의 대상입니다. 이방인에게 문안하지 않는다면 결코 누구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기도할 때 문안하게 됩니다. 인사와 예의를 지킴으로 마음 문을 열게 되며 복음이 그들 마음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성도가 온전한 성도가 됩니다. 사랑과 기도가 없거나 부족하면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가장 값진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명을 위해 생명을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한 생명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예의를 갖추게 된다면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복음의 문을 엽시다. 그리고 벽을 헙시다. 문턱을 낮춥시다. 입을 열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합시다. 모든 ‘이방인’을 우리의 ‘형제’로 만듭시다. ‘형제’를 ‘이방인’으로 ‘원수’로 만드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를 반대하고 오랫동안 추격해오던 사울 왕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친구이자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도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후 오랫동안 왕권을 안전하게 지켜온 다윗은 이상한 요청을 했습니다. 사울의 가문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지 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다리를 저는 사울의 손자, 즉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냈습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을 데려오라고 사람을 보냈을 때 므비보셋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다윗 왕의 원수의 가문인 옛 왕조의 한 사람이다. 그는 나를 죽일 거야.’ 그러나 다윗이 그에게 한 자비로운 말에 주목합시다. “무서워 말라…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삼하9:7) 다윗의 친절에 대해 므비보셋이 보인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이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8절) 그는 분명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은 자신이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도 다윗처럼 이방인과 원수를 찾아 형제로 만드는 온전한 성도가 됩시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한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대로 사랑하고 기도하고 문안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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