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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창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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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 가운데 아벨, 에녹, 노아, 욥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일 뿐 아니라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아브라함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선진들이 가졌던 믿음이나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이나 본질상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받은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로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이는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메시야를 믿는 사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 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4장 11절에 보면 아브라함을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하였으며, 갈라디아서 3장 7절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인류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성도님들과 함께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내용을 살펴봄으로 그를 본받고 배우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즉각적으로 그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성경에 보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고 증언합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행선지를 미리 알려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1절에 보면,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갈 곳을 지시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지자 곧 바로 그의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가야 좋을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떠났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증언합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75세로서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요즘도 노인들이 자녀들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이민 가는 경우를 봅니다 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생을 편안히 보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75세의 나이에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이민을 간다면 아마 그를 아는 사람들이 다 만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시도가 너무나 무모하게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아브라함은 미리 이민 간 친지의 초청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고, 한 번 가본 적도 없는 미지의 땅을 향해서 떠난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일을 실행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이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기만 하면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실 것이며,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해 주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내용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약속이 실현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은 허황된 꿈에 불과하니 그 계획을 취소해야 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이나 상식에 근거해서 생각해 보면 그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패가망신을 자초하는 무모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으므로 무모한 일처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므로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오직 “예” 하고 “아니요” 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결코 자기의 경험이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순종하지 않는 것은 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기는 믿는데 완전히 믿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의심합니다. 반신반의(半信半疑)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반신반의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반신반의했다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는 모험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단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예배드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데 힘쓰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 든든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주님의 이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예배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분주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는 것을 보고 열심히 산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신 대로, 그리스도인은 의식주의 문제조차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해결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고통스러운 결단을 요구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려면 지금까지 의지하고 살아왔던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세상과 하나님, 둘 중 한 편을 선택할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신앙은 우상과 하나님, 둘 중 한 편을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7)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므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같이 옛 생활을 청산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복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듯이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도 복을 내려주십니다.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3장에 보니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아브라함 말고도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아벨, 에녹, 노아, 욥과 같은 분들도 의인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도리 곧 이신득의(以信得義)를 설명할 때는 주로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에 들어온 지 10년쯤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그에게는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렵니까 나는 아직 자식이 없습니다.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가 기른 다메섹의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을까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한 창세기 15장 6절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도리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때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지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85세가 되었고 사라는 75세가 되었습니다. 자식을 주시려면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주셔야지, 이제는 다 늙어서 생리적으로 볼 때 자식을 잉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상식이나 경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대로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었던 근거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습니다.

전능하시다 함은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명하시니 곧 빛이 생겨났습니다. 하늘에 무수한 천체들도, 땅과 바다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각종 동식물과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지으신 세계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능하심은 하나님과 우상을 분별하는 근거입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거짓된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손으로 돌이나 나무나 철로써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하며 섬깁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뿐 아니라, 해와 달과 별들과 온갖 동식물을 신으로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은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므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신과 아내 사라가 이미 늙어서 생리적으로 볼 때는 자식을 잉태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약속의 성취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4장 17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7)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나이 85세에 있었던 일과 백세에 있었던 일을 다 같이 칭의의 근거로 언급하는데, 그것은 두 사건이 다 후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생산하는 차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은 자신과 아내 사라를 죽은 자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믿었던 근거가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근거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미쁘심을 믿었습니다.

미쁘다 함은 믿을만하다, 신뢰할만하다는 뜻입니다. 약속은 이행할 것을 전제로 합니다. 만일 지키지 못할 것을 약속하거나, 또는 지키지 않을 것이면서 약속한다면 그것은 속이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사건들은 대부분 사기 사건입니다. 사람들에게 큰 수익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해서 투자하게 한 다음, 그 돈을 착복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약속을 하고서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미쁘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을 비교해서 이 같이 말씀합니다.

“8)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9)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시 118:)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롬 3:4)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우리는 남을 의심하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믿어도 안 됩니다. 고의적으로 남을 속이려는 사람도 있지만,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인해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든지 믿어도 좋습니다. 아니 철저하게 믿을수록 더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주신 것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게 될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듯이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함은, 우리의 행실이 깨끗하기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세 번째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후에, 아브라함의 나이 백 살 되었을 때 독자 이삭을 낳음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그 때 사라의 나이는 아흔 살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더딘 것 같을지라도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이삭을 바라보면서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삭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아들일 뿐 아니라,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보증물과 같은 아들입니다. 이삭이 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성경에 그 당시 이삭이 몇 살이었는지 언급이 없지만 아마도 이십 세 전후였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백세에 낳은 독자입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의 대를 이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계승할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더구나 아버지로서 어찌 아들을 죽여 번제로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의 신처럼 인신제사를 요구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그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이번 하나님의 지시는 하나부터 열까지 아브라함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저 같았으면 하나님께 나아가 명령의 부당함을 고하고 선처를 부탁 드렸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삼일 길을 걸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산 아래 도착한 아브라함은 사환더러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올 것이니 여기서 기다리라” 하고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산을 올라갔습니다.

도중에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이에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17절로 19절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으니 이삭을 번제로 바칠지라도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이삭을 살려내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정말로 위대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자주 시험에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시험에 드는 사람들은 저마다 그럴만한 이유를 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시험에 드는 것은 결국 믿음이 부족한 것이 그 원인인 것입니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받는 것과 시험에 드는 것은 다릅니다.

태풍이 불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우리는 시험이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비에 따라서 태풍의 피해를 줄일 수 있듯이, 우리의 믿음의 상태에 따라서 시험에 들 수도 있고 시험을 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에 들거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자기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을 알아서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 바친 사건은 과연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시험을 통과함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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