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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 (엡 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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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
에베소서 4:11-16

옛날 평안도에서 교회 나온 지는 꽤 오래됐는데 성경을 읽지 않고 설교도 듣는 둥 마는 둥 항상 졸다가 마태복음을 찾으라면 구약에서 뒤적거리고 창세기를 찾으라면 신약에서 뒤적거리는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냥 교회도 별 재미없이 왔다갔다만 했는데 목사님이 하도 말씀을 읽어야 된다고 강조를 하자 하루는 큰맘을 먹고 성경을 펼쳐놓고 읽다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는지 주일날 목사님에게 성경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느닷없는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예수님께서 개고기를 참 좋아 하셨나본데 목사님은 그걸 알고 계셨나요?"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성도들이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킥킥거리면서 그 사람을 흉을 봅니다. 화가 난 그 사람이 성난 표정으로 성경을 뒤적거리더니 마16장 13절을 펼쳐 보이는 것입니다."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라는 구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구절을 자기가 알고 있는 평안도 사투리로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평안도 사투리로<개>를<가이>라고 불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사랴>는<사려고>의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예수께서 개 사려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라고 이해를 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혼자 곰곰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개고기를 얼마나 좋아하셨으면 온 유태나라의 개를 다 잡수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바다를 건너서 개를 사려고 빌립보 지방에까지 가셨을까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인도의 교육학자[케일리]여사는"현대인에게는 세 가지의 정신적 죄악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정말로 배워야 할 것은 배우러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알면서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귀한 진리가 있을 때는 이것을 남에게 가르쳐야하는데 더 많은 사람이 알도록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할 수 있으면서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도 많지 않지만 그 아는 것마저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현대인의 정신적 죄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배운다는 것도 항상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울 수 있는 때가 있는데 그 때를 놓치면 배울 길이 없습니다. 물론 평생 배운다고는 합니다만 반드시 그 때에 배워야 할 것은 그때에 배워야한단 말입니다.

그 다음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르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이 시간을 놓치면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거든요. 행한다는 것은 또 어떻습니까? 내가 언제까지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행해야합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그만 놓쳐버리고 마는 어리석음, 이것이 곧 죄악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교회학교에서 여름성경학교다 수련회다 바쁩니다. 그래서 협력교사로 봉사하실 분들을 모집한다고 광고하는데 얼마나 지원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물론 직접 교사로 봉사하지 않더라도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일하고 봉사해야 할 때에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가서 하고 싶어도 못 할 때에는 후회해도 늦습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배우고 가르치고 행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사람입니다. 언제까지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때를 놓쳐 버리고 맙니다. 봉사 할 일이 있으면 지금 하시기 바랍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속에서는 항상 두 마음이 싸우고 있습니다. 한 마음은 동쪽으로 가자하고, 한 마음은 서쪽으로 가자합니다. 한 마음은 사이좋은 두 사람을 갈라놓자 하고, 한 마음은 사이 나쁜 두 사람을 화해시키자 합니다. 한 마음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 하고, 한 마음은 친구가 잘 되는 게 좋다 합니다. 한 마음은 사람들에게 얼굴을 알리자 하고, 한 마음은 그저 일하는 손만 보이자합니다. 한 마음은 가질 것 다 갖고도 욕심을 내고, 한 마음은 오늘 먹을 것으로 족하다 합니다. 한 마음은 아직도 죄 성을 가진 육신적인 사람이고, 한 마음은 거듭난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 유명한 사도 바울도 이로 인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그 흔적이 롬7장 18절 이하에 나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언제나 두 마음이 싸움을 하는데 하루는 이 마음이 이기고 또 하루는 저 마음이 이깁니다.  자, 순간순간 어느 마음을 이기게 할 것입니까? 그 결과에 따라 성숙한 사람이냐 미성숙한 사람이냐가 결정됩니다.

여름은 과일의 계절입니다만 과일 중에 설익은 풋과일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배탈을 일으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가운데는 잘 익은 과일 같이 성숙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덜 익은 풋과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풋과일 같이 설익은 사람이 문제입니다. 온전치 못한 사람이 문제를 만듭니다. 성숙에 대한 열망도 없이 되는대로 살자는 미성숙한 사람이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도 이런 성숙되지 못한 자의 모습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을 한마디로 정리하고 있는데 유혹에 빠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스스로 하나도 극복할 수 없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환경이 다 위험합니다. 쉽게 유혹에 빠지고, 세상풍조에 밀려서 넘어지고 맙니다. 유혹에는 한 번 빠지기 시작하면 나오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인이란 결국 유혹에 강한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여러분은 유혹 앞에 얼마나 성숙한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아메리카 밀림 속에는<부쉬마스터>라는 독사가 있습니다. 이 뱀은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몸집이 크고 공격적이어서 한 번 물리면 20분 안에 해독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이 독사는 빛깔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기어가는 모습이 마치 무지개의 영롱함처럼 황홀하기 때문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게 순간적으로 달려들어 물어서 생명을 잃게 합니다. 아름다운 빛깔의 유혹에 빠져서 순간에 목숨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유혹은 아차 하는 순간에 정신을 놓아버리고 그럴 때에 넘어지고 맙니다.

[헤르만 헤세]는 유혹은 인간의 마음에 뿌려진 무서운 병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에게는 세 가지의 유혹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친 육체의 욕망인<향락>과 저 잘 났다고 거들먹거리는<교만>, 그리고 졸렬하고 불손한<이기심>이라고 말하면서 이 세 가지만 없었다면 이 지상에는 완전한 질서가 이루어 졌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유혹이라는 병에 걸려서 살아가고 있음이 문제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언제나 누구나 유혹 앞에 노출 된 삶을 삽니다. 그러나 성숙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유혹 앞에 선 자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어떻게든 유혹을 벗어나지만 성숙되지 못한 사람은 유혹 앞에 언제나 자기 스스로를 합리화합니다. 그래서 더욱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깊이 빠져 삽니다. 그런데 그 밑바닥에는 유혹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얽어맨 생각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성숙한 신앙인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유혹에 얼마나 약한가를 이 생각 속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유혹의 생각이 뭐냐 하면 첫째는"누구나 다 하는 일이니까"라는 생각입니다. 여기에 걸려들면 이제까지 성실하고 정직한 나, 헌신하고 충성했던 나라는 자아가 사라져버리고 맙니다.'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나만 바보야 다른 사람들이 하는 짓인데 난들 못할게 뭐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대중 속에 몰입되어 살아갑니다.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고, 술집을 천국으로 삼아 휘청거리며 큰소리치는, 정말 누구나 다 하는 대로 따라하는 광대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하는 생각입니다. '이 정도쯤은 괜찮지 뭐'하는 마음입니다. 주일을 범하면서도 52주 중에 겨우 몇 번인데 뭐 하는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별것 아니니까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신경 쓸 것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호리천리(毫釐千里)]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의 작은 차이가 나중에는 큰 차이가 된다."는 뜻의 말입니다. 설마 했던 일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을 때는 이미 늦은 법입니다.

셋째로 유혹하는 생각은"이번 한 번 뿐이니까"하는 생각입니다. "단 한 번의 거짓말인데 뭘 그리 괴로워하느냐, 딱 한 번이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데 뭘 고민하느냐"하면서 양심의 부패를 부채질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한 번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옛말에"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무엇이든지 한꺼번에 이루려고 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시작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공도 그렇습니다만 사람이 실패하는데도 첫 걸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한 번이라는 것이 결코 우스운 것이 아니라 일생을 좌우 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실감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종 오해하는 한 가지 사실은 예수를 믿으면 금방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그리고 되어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 더 이상의 노력과 훈련이 없이도 모든 성숙이 이루어지고 온전한 사람이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또 교회서 직분이 중해 질수록 저절로 성숙해지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성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끊임없이 기도하고 훈련하는 가운데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도"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를"원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는 많은 유혹들이 찾아오는데 그 순간마다 유혹에 넘어지지 말고 이겨내어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라는 말입니다. 목표를 위하여 달음질하고, 거기에 합당한 인내를 가지고 여러 가지 사람의 궤술과 세상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을 수 있는 유혹의 날들을 이기고 통과해야 성숙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성숙한 신앙을 가진 승리가 우리의 목표이며 그것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유혹에 빠지지 않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 최종 목표를 이루기까지 우리의 신앙을 유혹 앞에서 지켜나가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봉사와 헌신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봉사는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헌신은 즐거움입니다.

오늘 본문11,12절을 보게 되면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얼마나 응답하며 살아가십니까? 정말 부끄럽지 아니하는 자기의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이 있습니까? 행복입니다.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혹은 성도로 다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요?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잘 감당하고 있다면 온전하여 성숙에 이르기를 힘쓰는 자요, 그렇지 못하여 부끄러운 삶을 산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나아가 교만이요, 불순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이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힘쓰는 과정이시기를 바랍니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유혹들 앞에서 자유하고 이겨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바람에 응답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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