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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삶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마 19: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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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습니까?
말씀을 들은 대로 의젓한 성도로서의 삶을 사셨습니까? 아니면 또 갈등 속에 마음 볶다 한주일이 지나셨습니까?
지난 3주간 동안 특별히 우리는 분명한 삶의 목표를 설정해야 할 것과 그리고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애틋한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할 것,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는 의젓하고 의연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내용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길과는 다른 집착의 문제에 빠지게 되었을 때 어떻게 그 집착과 우리를 매고 있는 모든 삶의 고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어찌하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같이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삶의 과정을 거치다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를 수가 있습니다.
‘사람 사는 게 참 귀찮다. 그저 되는대로 편하게 살아보자. 괜히 어렵게 살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껏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작은 은혜의 기회라도 주셨다면 이제 이것을 통하여서 하나님 앞에 내 삶의 아름다운 작품을 통해서 영광을 돌려야 되겠다. 지금까지 수고한 모든 것들이 합하여져 하나님 앞에 나를 통해서 이루실 영광의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다.’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저러한 삶의 과정과 생각을 거쳐서 마지막 결론에 이르게 되니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신 푯대를 바라보고 달려갈 길을 허락해주셨으니 나는 그 가운데 아름다운 삶의 길을 이루어야지!’ 라는 것이 결국은 우리가 이루게 되는 마지막 성도의 생각의 종점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삶을 정리정돈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가기위한 분명한 기준과 그리고 원리와 원칙을 정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그의 삶의 정리와 정돈을 요구받았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가슴아파하며 되돌아갔던 한 청년의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청년은 자기 삶의 근거가 이제까지 하나님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중요한 결단의 순간에 내가 근거를 두고 있었던 내 삶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내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물질이라는 것에 대하여 그는 좌절하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풀지 못하고 두려워 근심하는 마음으로 슬픈 기색을 가지고 되돌아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이 청년은 나름대로 자기 자신이 괜찮게 살았다고 생각했던 청년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 어떻게 내가 선한 일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구 선한분이 있겠느냐! 그러나 네가 십계명을 지켰으면 네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하며 구체적인 십계명의 내용을 하나씩 거명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이 청년은 왠지 모르게 자신이 넘쳐서 얘기합니다.
“예수님, 내가 그 십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네가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이 청년은 정말 마음에 큰 충격이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이 청년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근심하며 되돌아갔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 <마가복음>을 보게 되면 ‘그는 슬픈 기색을 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다’라고 부연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청년에게 재물이 없었다면 근심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재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서 그렇게 집착하지 않으면 그는 예수님을 좇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예수님보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그와 같은 결과로 선택의 요구 속에서 결국 그는 포기하고, 그러나 그 마음 편치 않게 슬픈 기색으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심히 어렵도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제자들이 다시 놀랍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예수님, 그러면 도대체 천국은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게 하시느니라.”
즉 우리 인간의 힘과 의지만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정리 정돈케 하시고, 삶의 원칙을 정하게 하시고, 또 하나님의 은혜 속에 우리 삶의 컴퍼스 축을 하나님께 찍고 우리 삶이 움직여 가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 삶의 근거-중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삶의 컴퍼스축의 중심이 어디에 찍혀 있는가, 내가 하나님께 내 삶의 중심축을 찍고 내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가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곳에 컴퍼스의 중심을 찍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이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도구나 방편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중심으로 우리가 움직이지 못하고 우리를 중심으로 하나님이 움직여줘야 한다고 기대하고 소망하고 생각하는 우리인생의 이와 같은 안타까운 모습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힘과 은혜와 지혜만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그렇게 만드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내용 속에서 과연 내 삶의 근거가 어디 있는가, 내 삶의 기준과 원칙은 무엇인가, 나는 삶의 원칙이나 기준은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안타까운 청년의 모습을 봅니다.
마음에 선에 대한 바른 삶, 그리고 선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하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관심이 없었으면 예수님께 찾아올 리도 없습니다. 적어도 관심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청년은 안타깝게 슬픈 기색을 하고 근심하며 돌아가야만 했을까요?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재물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팔아서 나에게 가지고 오라고 하지도 않았고, 청년이 가지고 있는 것 팔아서 나누어주고 오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물질에 대해서 무슨 원수가 졌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 청년에게 과연 네가 가장 집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의 집착에서 풀려나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은 열심히 수고해서 어떤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룬 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사역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또 한 단계 올라가면 ‘내가 소유하고 이룬 모든 것들이 어느 날 문득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집착에서 풀려날 수 있는 자유로움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럼 현실적으로 우리는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능력을 소지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능력을 소지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니 나는 거기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질이 죄가 아닙니다. 배운 것이 죄가 아닙니다. 내가 높은 위치에 오른 것이 죄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이룬 과업이 죄가 아닙니다. 그것을 지나치게 신봉하며 집착하는 것이 죄입니다. 결국 우리들은 어리석은 것에 집착하고 왜곡되게 신봉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그릇된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집착이 우리의 두 눈을 찌르고 우리의 마음을 찔러 바른 판단과 바른 식별을 못하게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영원히 우리 곁에 있지 못합니다. 거기에 매여 있으면 어느 날 우리는 큰 좌절을 겪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벌써 이 재물들로부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가 매여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우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정돈되지 않고 한가지로 분명히 정렬되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갈등합니다.

사람의 불행이 갈등에서 시작되는데, 이 갈등은 무엇이냐면 내 마음에 원칙과 원리가 없을 때, 기준이 없을 때, 갈등이 생깁니다. 나의 외부적인 여건이 어떠해서가 아니라 외부적인 여건을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내 마음의 평안이 없을 때 갈등이 생깁니다.
‘참 갈등이 많아’ 그것은 상황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내부적으로 원칙과 원리가 없이, 기준 없이, 내 마음이 늘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바로 산다면 어려운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고 고통스러운 일도 있겠으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모든 상황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흘러갈 것이고 나는 주님의 원하심을 기뻐하는 것이지 내가 어떤 상황과 여건 속에 있는가가 결국 내 마음의 결정요소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분명한 기준과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고 그 장난감에 취해서 지내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우리는 장난감을 준 그 주인-우리에게 장난감을 준 사람을 고마워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과연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물질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물질 아닌 다른 것을 주었더라면 때로는 고통도 주고, 때로는 어려움도 주고, 때로는 훈련받을 연단의 기간도 허락하신다면 그럼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까?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흡을 주셨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것입니다. 호흡을 주셨기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고, 호흡을 주셨기에 우리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아름다운 손으로 바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내 삶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원칙과 원리와 기준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했습니다. 출애굽의 과정가운데 수많은 고초와 광야에 40년 동안 ‘하나님 차라리 내 목숨을 취해가십시오.’ 하고 좌절하고 절규하는 그 아픔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모세에게는 가나안의 민족을 인도해내고자 하는 마음의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의 목전에서 가나안의 장대한 경관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너는 가나안을 보기는 하지만 들어가지는 못해’ 그런데 그 뒤의 말이 더 모세의 가슴을 후볐죠. ‘왜냐하면 네가 전에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너는 들어가지 못해’ 모세로서는 너무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 백성이 잘못한 것이 모세보다 적어서 모세가 못 들어가고 그 백성은 들어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마음에 충격적인 말씀을 들었을 때 너무 충격을 받아 하나님 앞에 항거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는 그 백성을 위하여 손들어 축복하고 그의 후계자로 세우는 여호수아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도대체 모세가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내 마음의 소원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가 나의 길이다.’라고 하셨으면 여기가지 이룬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모세가 훌륭하지 않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분량을 감당하면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인 것을 그는 깨달아 알고 있었습니다.
주변여건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그의 삶의 기쁨이었습니다.
모세의 원칙이고, 기준이고, 삶의 근거가 바로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내 소원대로 안 되면 슬프고 내 소원이 이루어지면 기쁘다면 하나님이 설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믿음이 설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믿음은 때때로 내 마음대로 안 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셔서 결국 그 과정을 통해 주의 뜻을 이룰 것이 있으니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지 않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택했을 때 나는 슬프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더 큰 일을 이루신다고 하면 내가 택해지는 대신에 하나님의 더 큰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기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를 기뻐하는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속에 분명히 우리는 기준과 근거와 원칙이 있어야 하고 기준과 근거와 원칙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 같은 열정은 있었으나 그 마음의 근본에는 하나님이 자리 잡지 못하고 그는 안타깝게도 세상에 가지고 있는 물질이 그의 삶에 모든 근거요 기준이요 원칙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실 평가 절하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말고의 길을 칼을 휘둘러서 쳤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 “다른 사람은 다 어떨지 몰라도 나는 예수님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고 큰 소리쳤지만 예수님의 면전에서 가혹하게 예수님을 욕하고 세 번이나 목숨을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와 같은 면도 있었지만, 베드로는 충분히 초대교회의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풍랑이 이는 바다에 예수님이 걸어오실 때 다른 사람이 놀라죠.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예수님이에요.
“나니 두려워 말라.”
예수님께 그는 담대히 요청하여 말합니다.
“만일 주님이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를 걷게 하소서”
“오라”
베드로는 잔잔해진 바다가 아니라 풍랑이 이는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이게 베드로의 믿음의 위대성입니다. 모든 것이 평정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그는 그의 삶을 던졌던 것입니다. 이게 베드로의 위대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는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니까 또 빠져들어 갔습니다. 말하자면 복선이 생기니까 그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구조요청을 하니까 주님께서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만 바라보고 가면 우리는 언제든지 갈 수 있는데 문제는 우리의 주변 여건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돈되지 않은 삶, 원칙과 근거가 없는 삶, 기준이 없는 삶, 언제든지 흔들린단 말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알고도 용기가 없어 실행하지 못하는 심약하고 유약한 삶의 비극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세워졌을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내종 모세에게 한 것같이 너에게도 함께 하리라.”
그래서 뭐라고 얘기하시죠?
“강하고 담대하라.”
우리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의 덕목이 바로 <강하고 담대함> 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수아의 앞길에 놓인 것이 너무 험난하다는 뜻입니다. 강하고 담대하지 않으면 그 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청년은 너무나도 마음에 갈등이 많았지요. 갈등의 원인은 그의 삶에 원칙과 원리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원칙과 원리가 하나님 앞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청년을 보면 너무나 가엾어요.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했으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영적으로 의지하든지, 아니면 그의 원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세상에 있으면 그 가운데로 나름대로 살든지 하면 좋은데 영원한 생명을 얻고는 싶었는데 물질에 대한 욕망은 그를 놔주지 않으니까 근심하며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단 말입니다.
‘우리말로 따지면 죽자니 청춘이요, 살자니 고생이라’ 우리 그런 얘기 가끔 하잖아요.
‘죽자니 청춘이고, 살자니 고생이라.’
그러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늘 슬플 수밖에 없어요. 이러니 저게 더 아깝고 저러니 이게 아깝고, 믿음대로 살려니 세상이 아깝고 세상대로 살려니 내가 믿음의 길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이럼으로 말미암아 늘 마음속에 찌든 삶을 사는 겁니다.
언제든지 기쁘게 사는 사람이 있는데 언제든지 불만족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이 청년을 보면 우리는 마음의 분명한 삶의 근거가 어디 있는지 결정해야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우리는 결심하고 사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 마음을 부추기는 갈등의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 마음의 갈등을 부추기는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지식의 부족함이 갈등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알고 바로 믿고 신뢰하면 우리는 갈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통탄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도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 하나님께 대한 앎이 없으니까 망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린 늘 이렇게 기도하지요.
“하나님 내 마음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이 왜 이렇게 흔들리고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쏠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방향을 분명히 잡아주시고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결정지어 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드리는 정직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보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더욱더 알 수 있게 되지요.
믿음은 짐이 아니고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 번 다시 따라서 합시다.
“믿음은 짐이 아니고 힘입니다.”
믿음은 짐이 아니에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종교적 과세나 부과되는 의무입니까?
여러분 일주일동안 살면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어? 벌써 주일이네. 얼른 예배가야지”라고 생각하고 오셨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번 한 주일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제가 이렇게 의연한 믿음 가지고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제가 내일 주의 날 가서 열심히 기쁨으로 예배드리고 또 힘을 얻어 내가 한 주일동안 세상에서 살겠습니다.”하고 오셨습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예배,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생활, 이것은 종교적인 과세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기쁨이고, 은혜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 가운데 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알고 깨달으면 우리 삶에 하나님께 대한 관심과 하나님께 대한 기쁨이 더 커지며 이와 같은 마음의 신뢰가 생기는 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충만하면 괴롭고 갈등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아가고 있죠?
내 모든 삶의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대해 자꾸 갈등하는 경우가 있단 말입니다. 왜 갈등하죠?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나를 책임져 주시고, 내 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제가 한 번 여쭤 볼게요.
“하나님이 물질을 주셨는데 하나님이 감사해요, 그 물질이 감사해요.” 아니 양심적으로.
“하나님이 물질을 주셨다면 하나님이 감사해요, 물질이 감사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도대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감사하는가?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면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이 있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물질이나 선물 때문에 감사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주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의 청지기요, 내 삶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린 마음에 갈등할 필요가 없어요.
가끔가다 이런 얘기 자주 드리잖아요.
어떤 사람이 은행에 가서 자기 청구서를 내면 은행직원은 아무런 갈등 없이 줘요.
“죄송합니다. 제가 3일만 생각해보고 결정해서 드리겠습니다.” 이런 은행원은 없습니다. “제가 금식하고 제가 기도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이런 은행원도 없어요.
왜죠?

첫째, 자기 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소유주가 분명하니까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헌신을 요청하시거나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어떤 믿음의 길을 요청하실 때에 우리는 기도해봐야 됩니까?
봉사하십시다. 헌신하십시다. 하면 제가 기도도 해보구요, 그거 믿음 있는 소리 같지만 믿음이 없는 소리입니다. 그걸 뭐 하러 기도 해봐요. 그냥 “예”하면 되는 거지. 그것은 기도해보고 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간단하잖아요. 은행원에게 청구서 내보세요. 통장에 들어있으면 “내가 기도해보고 결정해서 드리겠습니다.” 이런 사람 아무도 없어요. 당연한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뭐냐면 아직까지도 내 소유권이 내게 있고 내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빌려주셨어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내가 도로 찾아갈게 하면 우리는 뭐라고 얘기해야 하죠?
감사합니다. 그동안 참 잘 썼습니다. 사용료도 한 푼 안내고 참 잘 썼습니다. 그래야 되죠? 그런데 우리는 가지려고 해요. 안 돼 내건데요. 막 그래요. 하나님 왜 빼앗아 가십니까? 그럽니다.
왜죠? 우리는 뭔가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면 우리는 “예”하고 감사하며 사용하게 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동안 쓸 수 있었음에 대해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먹고 입고 쓰고 사용했습니까? 그러는 내가 있어도 감사하고 없어도 감사하고 이제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자꾸 왠지 모르게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는 것이죠. 선을 행함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바른 삶에 대한 축복과 기쁨의 경험이 있다면 우리는 마음에 갈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수고하시는 분들을 보면 참 감사한 것 같아요.
저희 교회에서는 특별히 모든 성도님들이 그렇게 많은 수고를 하시면서도 누가 수고하는지 모를 정도로 모든 분들이 정말 진심으로 수고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교회에서 특별히 누가 수고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잘 모르죠?
그 말은 모두가 수고하되 자기 모습에 티를 내지 않고, 자기를 자랑하고 드러내지 않고 봉사하기 때문에 누가 수고한지 모르는데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도 파워선교학교 수료식을 해서 제가 가서 기도도 드리고 격려도 해 드렸는데 정말 그렇게 매주 토요일에 나와서 공부하고 선교 준비하면서도 모두가 기뻐하고 희희낙락하는 것 같아요. 일이 아니라 유희, 놀이 같아요.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똑같은 일을 해도 운동으로 하는 것과 노동으로 하는 것은 틀리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모든 삶이 언제나 노동이 돼서는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전에 마음속으로 ‘믿음대로 사는 것이 이렇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설날 연휴가 있었는데 주일이 그 설날 연휴에 끼어있어요. 토요일이면서 설날 연휴중인데 주일날 설교준비를 하러 오는데 설날 중에도 교회에서 예배는 드리잖습니까?
그런데 그 저녁에 성도들 몇 분이 오시더니 교회 청소를 하시더라고요. 아마 이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설날 연휴라 다 어디가고 청소할 사람도 없으니까 내가 가서라도 꼭 해야지’ 하는 이런 마음가지고 청소하러 오신 것 같아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아마 본인들이 나누어 하니까 대부분 맡은 부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와서 그것을 하고 가시더라고요.
제가 분명히 압니다. 그분 집은 그렇게 안 치울 거예요.
설날이니까 바쁘니까 집은 그렇게 안 치울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 성도들이 와서 예배드리는데 설날 연휴라 어디 다 갈 텐데 그래도 어디 안가고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와서 해야지!’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함, 바른 은혜에 대한 기쁨의 경험과 축복의 기쁨이 있다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기뻐하는 거죠.
저희 교회 모든 각종 봉사하시는 분들, 어느 것 하나 열거할 수가 없어요. 모든 분들이 하나님 앞에 수고하고 애쓰시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봉사하고 수고하다가 조그만 손톱만큼의 불만이라도 있던가, 아주 조그만 부분의 불평이라도 생기면 그 즉시로 그 일을 그만 두셔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은혜에 아무 도움도 안돼요. 그리고 여러분 기도하고 성경보고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고 찬송하고 은혜 받고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회복되시면 그때 다시 일을 하세요. 영적으로 좋지 않은 상태에서 그 주의 일을 하면 나도 어렵고 다른 이도 어렵고 하나님의 일도 어려워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좋은 일을 하면 늘 기쁠 수밖에 없어요. 기쁜 일을 슬프게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행함의 경험이 있음을 통해 우리는 더 큰 은혜와 기쁨을 이루게 되는 거지요.

선을 행하는 기쁨, 그건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와 같은 기쁨들이 우리들에게 늘 있어지면 우리는 마음에 갈등하지 않을 수 있어요. 여러분 삶의 갈등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들에게 있어서 집착에서 생기고, 집착이라는 것은 마음의 평안을 깨뜨리고 마음의 평안이 깨지면 결국 우리는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과는 항상 우리들에게 어려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기쁨과 은혜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가혹하게 마지막 끝까지 요구하실까?
“십계명 지켰습니다.” 하면 “응, 그 정도면 괜찮아!”
아니 세상에 자기 모든 것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 좇아올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시느냐 말입니다.
너무 야속한 것 같죠? 십계명 지키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것을 지켰다는 사람에게 뭐 이렇게 야속하게 말씀하시느냐 말입니다.
주님이 그 사람을 쫒아내 버리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그를 도와주시려고 그랬을까요?
주님은 그 사람을 도와주려고 했던 겁니다. 돈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니, 눈이 멀어지니, 바로 그에게 그와 같은 물질에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도와주신 겁니다.
여러분, 세상에 부자는 천국에 못가는 것 아니에요.
아리마드 요셉은 예수님의 묘실을 미리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자기 개인적인 묘실에 여유가 있으니까 예수님의 시신을 거기에 모셨어요. 부자에요. 그런데 그는 주를 위해 아름답게 일했습니다.
나사로요. 예수님의 열두 명의 제자를 데리고 그 집에 머물러서 먹고 마시고 쉬셨던 넓은 집과 풍부한 양식을 가지고 있었던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그들은 매우 긍정적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결국 돈이 많으냐, 적으냐 그것이 기준이 아니라 우리가 그 물질에 집착하느냐, 집착하지 않느냐 이말 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이 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은혜를 주셔서 그 역사를 이루게 하느냐, 아니냐 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죄가 아니라 가진 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집착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점점 식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정리하라’는 말은 우선순위를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주셔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지 물질 때문에 감사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마지막까지 요구하시는 것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새로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의 역사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머니를 비워야 빈 주머니에 무엇인가를 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을 비워야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지 않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사람이 되고자 했는데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사람이 되면 여러분 뭔가 이루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이룬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 때 우리는 한 명이 천명을 도와줄 수 있겠죠?
한 명이 천명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되고,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이와 같은 영적인 모든 소유에서부터 풀려나는 마음도 있어야 우리는 기도한대로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하시기 위하여 마음을 비우고 우리가 매였던 모든 종노릇하던 우리를 매고 있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애쓰되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 앞에 자유로워지는 믿음의 백성들의 축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삶에 방해가 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데 그것에 집착하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셨어요.
그 물질을 잘 사용하면 축복이지만 잘못 사용하고 집착하면 그게 재앙입니다.
내가 어떤 위치에 올랐습니까? 위치에서 휘두르면 재앙입니다. 그 위치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요셉처럼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많은 사람들을 세워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이고 은혜요 섭리라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룬다면 그것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높은 위치에 올라간 것이 무슨 잘못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 위치에 올라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을 하나님의 법칙에 맞게 한다면 축복이겠지요.
오늘 이 청년은 가지고 있는 물질을 다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삶에 분명한 우선순위를 결정하라는 것에서 그는 마음에 낙심하고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했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 말씀을 드리고 맺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꼭 들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가끔가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교회에 오면 저희 교회에는 초신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초신자들이 참 많은데 저희 교회는 세례 안 받은 분들만 한 6~7천명 됩니다.
세례 받은 분 반, 세례 안 받은 분 반 해서 매년 천 명씩 세례를 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며 진행을 하고 있는데 교회오시다 보면 처음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요. 말씀을 들어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어떻게든 앉아있는 것이 대단한 일입니다. 앉아있는 것도 못하면 참 어렵잖아요. 다 경험해봐서 아시죠?
제가 말씀드렸지만 교회주보가 4페이지 인데 이걸 한 시간 동안 읽고 계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4페이지를 한 시간 동안 읽으려면 외우지 않으면 도저히 읽을 수가 없어요.

제가 아주 기막힌 장면을 보고 제가 설교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번에 보니까 주보를 읽는 것이 아니라 헌금자 명단을 읽는 분이 있더라고요. 거기는 이름도 없고 순전히 숫자만 있어요.
11100, 11250......순전히 숫자만 있거든요. 그거는 읽을 것도 없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계속 읽고 있더라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읽고 있다기 보다는 뭔가 주문이라도 외워서 시간이 가야 되니까...... 제가 그 생각을 하고 설교를 잘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회개한 적이 있는데 우리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관심이 달라지는 겁니다.
내 관심과 기호가 달라지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모든 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의 대상이 달라지는 겁니다.
오늘 이 청년은 관심이 분명히 어디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이 청년이 예수님께 왔어요.
“예수님 내가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십계명을 지키라”
“예, 지켰습니다.”
너무너무 기뻤어요. 자신 있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네 물질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그런데 거기서 넘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 청년의 “예, 자신 있게 십계명을 지켰습니다.”라고 하는 내용과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좇으라”는 이와 같은 내용 두 사이에 어떤 연관이 이루어질까요?

여러분, 정말 그 청년이 십계명을 지켰을까요? 정말 그 청년이 자신 있게 “예, 다 지켰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십계명을 다 지켰을까요?
만약에 그 십계명을 지켰다면 예수님의 그 다음 요청에 대해서도 그 청년은 과감하게 기쁨으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계명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정신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선대할 때 바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두 가지의 밸런스가 잘 안 맞습니다.
그 말은 뭐죠?
이 청년의 “예, 십계명을 지켰습니다.” 라는 말은 거짓말까지는 아니지만 자기 수준에서 지켰던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수준이 아니라 자기 수준에서 지켰던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 계명을 지켰다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한 번 여쭤 볼게요.
“여러분, 믿음 가지고 계십니까?”
“여러분 구원받으셨어요?”
“믿음 가지고 계세요?”
“예, 감사합니다.” 이 청년같이 씩씩하게 대답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사는 것은 믿음과 동일하게 사십니까?”
갑자기 왜 그러세요?
“......”
이 청년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계명을 다 지켰다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어려운 장면에 봉착해보니까 계명을 지켰다라고 생각하던 내 자신이 여지없이 무너진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을 지켰다라고 생각하면 대체 그 믿음을 지켰다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내 자신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수준에서.
이 청년은 십계명을 잘 못 지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잘 지켰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왜죠? 기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본인이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오늘 성도님들께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절대 거짓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믿어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수준의 문제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셨으니 우리의 삶도 그 고백의 수준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분명한 것은 이제 내가 말하는 것, 살아가는 것, 행동하는 것, 모든 것이 믿음에 근거를 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근거를 둔 것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 삶을 하나님 앞에 컴퍼스 축을 찍고 내가 하나님의 원함대로 움직여야 됩니다. 내게 컴퍼스 축을 찍고 내 필요에 따라 주님이 움직여주셔야 되고 그것을 위해 내가 주님 앞에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이고 주의 뜻을 이루는 백성들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분명한 삶의 원칙이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삶의 기준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준과 원칙 속에 살아갈 때 삶의 상황이 어땠건 관계없이 우리는 마음의 기쁨과 감격 속에 주의 뜻을 이루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주의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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