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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창 3:13~14, 막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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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국인 관광객이 탄 캄보디아 비행기가 추락하여 13명의 한국인이 희생이 되었습니다. 어제 희생자들의 시신이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웃으면서 여행을 떠난 가족들이 사늘한 시신으로 변하여 왔다고 생각하면 가족들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희생자들의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가족이 함께 모처럼의 여행을 떠났는데 쌍둥이 아들 하나만 떼놓고 가서 큰 아이와 쌍둥이 형이 떠나고 쌍둥이 아들 하나만 남은 가정도 있습니다. 딸이 어머니 관광을 시켜드린다고 모녀가 함께 한 첫 여행에서 모녀가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이드 박지완씨는 젊은 목회자 지망생이었고 신학교 재학 중에 관광 가이드로 일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사고를 만나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려고 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고를 만나게 하실까?” “무엇 때문 이렇게 이국에서 사고로 죽어야 하는가?” 사고로 온 가족을 함께 잃은 유족들은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대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갑작스런 병이나 우환이나 어려움을 당할 때에 “왜 나입니까?”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얼마든지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문과 불만이 그 질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지은 다음 하나님은 인간에게 물어보십니다.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였느냐?”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네가 어떻게 이렇게 까지 하느냐?”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범죄에 대하여 놀라움으로 물어보십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을 타락하게 하였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 동등 되려 하는 교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보서 2:6에 보시면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되지 않으려고 하셨는데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과 동등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시작이고 이 죄의 결과가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어찌하여”란 말은 히브리어 ‘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어떻게(how), 왜(why)라는 뜻보다 무엇 때문에(what)이라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네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였느냐?” 라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상대방에게서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감지했을 때 상대를 추궁하는 강한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믿었던 사람이 배반하였을 때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니?”하고 물어보는 그런 표현입니다. 사실은 이 물음은 물음이 아니라 “이럴 수는 없는 거야”라는 강한 표현의 방식입니다. 답을 얻고자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네가 이렇게 하였느냐?” “무엇이 부족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무엇을 원하여 네가 그 것을 따 먹었느냐?” “어떻게 네가 나와 같아지려고 하느냐?” “나의 형상을 네게 주었는데 고작 이거냐?” “내가 줄 거 다 줬는데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하시고 싶은 말씀이 너무나 많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나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는 사람이 생각할 때는 높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당연한, 결코 높지 않은 기대를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미래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을 것을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연약함을 알고 계시기에 그 이상을 기대를 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시대의 영적 지도자였던 헨리 워드 비쳐 목사님은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기준에 대한 책임을 당신 스스로 감수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의 기대감에 실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기대는 의문이나 의심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대는 폐쇄적이고 최종적이며 고정적입니다. 기대는 충족되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이 소리 안 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라는 말씀의 뜻을 생각해 보면서 이런 하나님의 질문이 들려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뱀이 하와를 꼬여서 선악과를 먹게 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하와가 대답한 것을 몰라서 물어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 질문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슬픔을 표현하신 물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으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죽게 되었으니 얼마나 슬플까요? 하나님의 슬픔과 놀라움은 인간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지고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한 슬픔을 여러 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6:6에는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하나님의 슬픔을 표현합니다. 노아 당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슬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선한 것인데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악한 것뿐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멸망당하고 있지만 자신들은 영원한 줄 알고 살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슬프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은 이중적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슬픔입니다. 이들이 죄를 짓지 않았으면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죽게 하지 않아도 되는 데 그들이 죄를 지음으로 이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 하는 슬픔이 또 한 차례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중적인 슬픔을 이미 맛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들을 죽여야 하는 하나님의 슬픔을 이해하십니까?

  죄는 단절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이 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밀월이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셨을까요? 인간의 죄는 하나님 슬프게 만듭니다. 성경에는 여러 번 “그들이 나를 떠났고”, “그들의 마음이 나를 떠났고”라고 하여 하나님의 슬픔을 담은 탄식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죄 속에 사는 것을 슬퍼하십니다.

  2세기의 로마의 문학자 스에토니우스의 ‘12황제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의 시저는 정적 폼페이우스를 쓰러뜨리고 아시아를 정복하였습니다. 황제의 자리를 탐하는 기회가 엿보이자 절대적으로 지지하던 민중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카시우스는 개인적 감정 때문에 그리고 브루터스는 공화제를 수호하겠다는 심정으로 시저를 습격합니다. 시저는 도망하려다 아들처럼 아끼던 브루터스가 있는 것을 보고 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브루터스 너 까지도!”하고 칼에 맞아 쓰러집니다. 그 후에 브루터스는 “나는 시저를 사랑한다. 그러나 로마를 더 사랑한다”고 하였답니다. 시저가 브루터스에게 “너 까지도”라고 한 것은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6:37에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라고 합니다. 겟세마네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슬퍼하십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예수님은 슬퍼하십니다. 예수님의 슬픔이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 무서워서일까요?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 이전에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슬퍼하십니다.

  “웃을 수 있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그리고 웃음거리가 될 수 있는 동물도 인간밖에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슬퍼할 수 있는 피조물은 사람밖에 없다. 그리고 슬픔의 대상이 되는 피조물도 사람밖에 없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 외에 누가 슬퍼합니까? 그리고 사람 외에 누가 슬픔의 대상이 됩니까? 우리는 우리 가족의, 우리 이웃의, 우리 국민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불신앙과 불순종이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이 말을 안 듣게 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하신 물음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이 말은 하나님의 분노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십니다. 하나님은 배은망덕한 사람을 보고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적반하장격인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 분노를 나타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중에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를 주셨고, 선택권을 주셨고, 이성적 판단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걸로 배반하고 거절하고 불순종하다니 하나님이 분노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배반에 대해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분노를 보세요. “주께서 모세에게 노하여 이르시되”(출 4:14),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출 15:7), “주께서 노를 발하시고”(합 3:12) 등 성경에는 하나님의 노하심이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22장에는 혼인잔치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 임금이 잔치를 마련하고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 왕의 종들은 나가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잔치 날이 되자 사람들은 싫어했습니다. 성경은 “혼인잔치에 오라고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밭에, 어떤 사람은 자기 사업 때문에 오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극적 반대자들입니다. 6절에는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라고 합니다. 왕이 보낸 종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은 적극적 반대자들입니다. 7절에는 “임금이 노하여”라고 합니다. 임금은 살인자를 진멸하고, 동네를 불 지르고, 네거리에 가서 아무나 데리고 오라고 하여 잔치 자리를 가득히 메웠습니다. 왜 왕이 분노했습니까? 왕의 사랑과 청함과 인도를 거절하기에 왕은 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을 위한 일입니다.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인간을 살게 하려고 하신 일입니다. 다른 신을 만들어 섬기는 우상숭배도 그렇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을 위한 일인데 인간이 듣지 않으면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에게는 공포입니다. 찬송가 가사에 보세요. “우리 주 목소리 한번 발하시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하나님이 목소리를 한 번 높이시면 모든 것이 망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에게는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결국 인간의 실낙원이 되었습니다.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이 사람 지음을 한탄하시고 후회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실망과 분노를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난 삶을 말합니다.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홍수는 또 올 것입니다. 첫 번째는 물의 홍수였고 이번에 올 것은 분노의 홍수입니다”. 분노의 홍수가 또 오겠지만 분노가 홍수처럼 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분노의 홍수를 맞지 말아야 합니다.

  장덕이란 가수의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니?’란 가요가 있습디다. 가사를 보세요. “넌 말했지 나를 사랑한다고, 나를 보면 세상이 아름답다고, 그렇게 말했잖아, 비 내리는 차창에 기대어 앉아서 얼굴을 보면서 속삭인 그 말 벌써 잊었니? 정말 알 수가 없어, 너의 진실은 뭐야, 그토록 다짐을 해놓고 이제 와서 어떻게 하라고, 난 정말 믿을 수 없어,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니”. 이 가사에도 슬픔과 분노가 있지요?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얼마든지 이럴 수 있어요.

  오래 전 제가 전도사 시절에 있었던 얘기입니다. 제가 돌보던 교구의 어느 부인 집사님이 급히 전화가 와서 제가 어느 파출소에 갔습니다. 집사님의 아들이 친구들과 어울려 나쁜 일을 하다 잡혔는데 경미한 사건이라 누군가 와서 앞으로 잘 지도하겠다고 약속하고 날인하면 풀어주겠다고 하여 저보고 좀 오라고 한 것입니다. 제가 가 보니까 아들이 파출소 한 쪽 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들어와서 다짜고짜 아들을 마구 때리는 겁니다. 어머니가 화가 많이 난 것입니다. 어머니는 최선을 다해 아들에게 해 줬는데 아들이 배은망덕 했다는 것입니다. 한참 화가 나서 때리던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놈 자식아,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내가 네게 안 해준 게 뭐있어?”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은 실컷 맞고 있다가 어머니가 한 마디 하니까 대꾸를 합니다. “엄마가 내게 해준 게 뭐 있어?” 아들이 이럴 수 없지요. 그런데 아들이 생각할 때는 엄마가 자기에게 이럴 수 없다는 겁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이 말은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듣는 말입니다.

  시편 85:3-4을 보세요.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 하나님이 분노를 거두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분노를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그래야 우리가 다시 희망이 있고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실망과 분노를 느끼실 것입니다. “아무개야, 너 까지냐? 너 또 이러냐? 너 또 거기 가 있냐? 너 또 그 일하고 있냐? 무엇이 부족하여 그렇게 살고 있냐?” 여러분은 하나님의 분노를 느끼십니까? 시편 90:11에서 시편의 기자가 말한 대로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하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

  이 질문에 대한 하와의 답변을 보세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뱀에게는 심문이 필요 없습니다. 칼빈이 말한 대로 “짐승에게는 죄의 감각이 없고 사단에게는 사유의 소망이 없습니다”. 이 대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답이 아닙니다. 하와는 엉뚱한 대답을 하므로 하나님의 분노를 가중시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분노를 가중하게 하는 일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도구입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딸에게 분노에 찼던 기억들을 얘기합니다. 딸은 아버지가 분노에 차 있었다는 느낌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뒷마당 정원에 있던 나무를 기억하지? 그 나무가 밑 둥만 남고 다 잘라진 것을 아니?” 딸은 그 나무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분노가 찰 때마다 나무를 잘랐습니다. 우리의 분노를 갈보리의 나무 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순종의 분노를 나무 위에서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분노를 해결하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분노를 해결합니다. 하나님이 슬프지 않게, 노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할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라는 말 대신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아들아, 딸아”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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