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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은 용서받았습니까 (눅 7: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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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용서받았습니까
눅 7:36-50

▶ 하루를 기분 좋게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고,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자동차를 사고, 한 달을 좋으려면 집을 사고, 일년을 좋고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감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사람이 정말로 행복하게 되는 길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입니다.
롬 4:6-8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다윗은
① 이스라엘의 두 번째, 통일 왕국의 왕이었습니다.
② 시를 아주 잘 쓰는 시인(詩人)이였습니다.
③ 악기도 잘 다루는 음악가였습니다.
④ 전쟁도 잘하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문무를 골고루 갖춘 인간으로 최고의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백하는 것은 죄사함을 받았을 때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왕으로서 권력을 누릴 때/ 시인으로 음악가로 예술을 즐길 때/ 행복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쟁터에서 전군을 물리칠 때 행복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소 샀다고, 밭 샀다고, 장가들었다고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행복은 죄 용서함을 받고 그 죄 가리우심을 받을 때// 하나님이 그 죄를 인정치 않을 때 누릴 수 있습니다.

▶ 죄는 우리를 화평하게 하지 못합니다.
어떤 아이가 새총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폼을 잡아도 잡을 새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아버지가 집에서 기르는 거위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쏠까 말까 망설이다가 시험삼아 한번 쏴 봤는데 아주 정통으로 맞아 그만 거위가 죽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거위를 쏴 죽인 것이 죄입니까? 그것은 실수지 죄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귀히 여기는 거위지만 그 거위를 쏴 죽였다고 죄인으로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아버지에게 야단 맞을 것이 두려워서 죽은 거위를 마당에 파묻었습니다. 거위를 파묻은 것은 실수입니까, 죄입니까? 죄입니다.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거위를 찾았습니다. "거위 못 봤니?" "몰라요."
아이는 시침을 떼었습니다. 이것은 죄입니까? 큰 죄입니다. 이 죄가 아버지와의 화평을 깨버렸습니다.
그 아이는 죄를 지어 놓고 아버지에게 가서 "아빠!" 하면서 달려가 안길 수 없었습니다.
슬금슬금 눈치보고 아버지를 피해 다녔습니다. 가능하면 아버지하고 같이 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집에 마음씨가 아주 고약한 일하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아이를 불렀어요. "아무개야!" "왜요?" "너 우물에 가서 물 좀 길어 와."
"그것은 아주머니가 할 일인데 왜 날 시켜요?"
"너 거위 죽이고 땅에 파묻었지."
아주머니가 거위 파묻는 장면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아주머니는 그 약점을 이용해서 아이에게 추운 겨울날 우물가에 물을 길러 보냈습니다.
아이는 물을 길어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집에 부모님이 없으면 일하는 아주머니가 아이를 불러서 집안의 모든 일을 시키고 자기는 앉아서 쉬었습니다.

▶ 아이는 꼼짝없이 발목이 잡혔습니다. 죄의 약점을 잡히면 죄의 종이 됩니다.
죄를 지으면 종이 됩니다. 주인집 아들이 일하는 아주머니의 종이 된 꼴입니다.
죄는 종의 종이 되게 만듭니다. 일을 시켜야 할 종의 종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이는 너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매 맞을 각오를 하고 아버지에게 울면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아버지, 사실은 제가 거위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겁이 나서 파묻고 거짓말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야, 이놈아 다 알고 있었다. 아빠가 거위를 귀히 여기지만 거위가 중하냐, 네가 중하냐?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사람은 누구나 잘못하고 실수할 수 있는데 그것을 숨기면 그렇게 고통스럽단다. 너 아주 좋은 공부했다. 죄를 숨기니 힘들었지? 다시는 그러지 마라."

아버지는 아들 어깨를 토닥거리며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는 얼마나 신났을까요? 그것이 자유입니다.
죄 용서를 받으면 자유로와집니다.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죄 용서를 받으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됩니다.
아주 기쁘게 아버지에게 안길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모든 것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일하는 아주머니가 또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물 떠오너라!" 떠오겠어요, 안 떠오겠어요? " 너, 말 안 들으면 알지?"하고 협박해도
이제는 조금도 무섭지 않습니다.
아버지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받으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과거에 어떤 허물과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회개한 죄는 더 이상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지나간 과거의 죄에 대해서는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1.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한 시몬이라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실을 다 꼼꼼히 조사해 본 누가는 이 사람을 바리새인이라고 소개합니다.
바리새인! 누가는 한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분합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에 시몬의 사회적인 계층과 그의 분위기, 윤리적, 신학적인 입장을
잘 나타내 줍니다.

▶ 원래 바리새인은 아주 좋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히브리어 페루쉼에서 나온 말인데 분리된다라는 의미입니다.
율법에서 말하는 깨끗하지 않은 것들에서 분리되려는 태도에서 나온 말입니다.
말라기에서 마태복음 사이의 시대인 마카비 시대에 생겨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함께 신약시대에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율법을 가장 엄격하게 지키며 일반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외면적인 것에 만족하게 되었고 의식과 신조에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이름이 28번 나오는데 모두 주님께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시몬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 그는 완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히 만족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데 완전한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 정결례를 비롯한 각종 의식을 지키는데 완전한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그냥 호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존경해서 초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집에서 뭔가 트집을 잡을 일이 생기지 않을까 지켜보기 위해서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트집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하고서도 아무런 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손님을 맞이할 때 주인은 손님을 위해 세 가지의 일을 합니다.
① 사막지대의 먼지가 묻은 손님의 발을 씻어줍니다. 아니면 시원한 물을 부어 줍니다.
② 환영하는 의미로 어깨에 손을 얹고 입을 맞춥니다.
③ 향불을 피우거나 향유를 머리에 몇 방울 떨어뜨립니다. 가난한 사람은 감람유라도 뿌려줍니다. 이것은 손님을 신선하게 합니다.

그런데 시몬은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모신다고 모셔 놓기는 했지만 마음으로는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정성을 다해 대접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끼고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형식적으로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2. 두 번째 사람은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여인입니다.

동네에서 죄인인 한 여자 - 이 표현은 이 여인이 창녀라는 것을 알려주는 단어입니다.
대부분의 성서 학자들은 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다고 추측합니다.
▶당시 율법 사회에서 죄인으로 낙인이 찍히면 성전 예배는 물론이고 회당에도 나올 수 없다.
▶랍비들은 이런 죄인에게는 1.8m 이상 가까이 가면 안됩니다.
▶죽어도 아무도 울어 주지도 않습니다. 무덤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죄인은 철저히 소외되고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바리새인의 집에 자기 발로 찾아왔습니다. 시몬도 놀랐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이 곳에 온 이유가 나옵니다.
37-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이 여인은 자신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알았습니다.
남자들은 음탕한 눈빛으로 이 여인을 바라봅니다. 그러면서도 깨끗한 척합니다.
여자들은 무시하는 눈빛으로 봅니다. 자기 남편으로 타락시키는 나쁜 여자로 봅니다.
그러나 그런 눈빛을 다 무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계신 것만 보고 그 집으로 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만났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죄 용서를 경험했습니다.

◈ 여인의 행동
38 -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유대인들은 식사를 할 때 왼쪽 팔꿈치를 턱에 고이고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서 식사를 합니다.
▶ 주님은 벗은 발로 문쪽을 향한 채 비스듬히 기대어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가서 발 곁에 설 수 있었습니다.

▶ 그녀는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 우는 눈물이 예수님의 발등에 뚝뚝 떨어져 흘러 내렸습니다.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그러자 앉아 엎드려 자기의 머리털로 눈물로 젖은 예수님의 발등과 발바닥, 온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 머리카락을 풀어헤쳐 그것을 가지고 주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머리카락은 여자에게 중요한 상징입니다. 면류관입니다. 함부로 풀지 않습니다. 머리를 푸는 것은 수치입니다. 그런데 이 머리털로 하나님의 아들의 가장 보잘것없는 한 부분을 닦고 있습니다. 여인은 눈을 물병으로 삼고 자기 머리털을 수건으로 삼았습니다.

▶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간음으로 가득 찼던 눈이 이제는 회개의 샘이 되었습니다.
음탕한 말을 쏟아 내던 입술이 이제는 거룩한 입이 되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입맞추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하였지만 원어적 의미로 보면 숨이 막히도록 입을 맞춘 것 해석될 수 있습니다.

▶ 향유를 부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처럼 값비싼 것은 드리지 못하고, 일반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드렸습니다.

▶ 이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사죄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많은 자기를 영접해 주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믿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사람취급 받지 못했던 그녀를 예우해 주신 그 예수님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과 물질을 다 바쳐 주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3. 그런데 시몬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시몬은 아주 이상하고 놀라운 일을 보았습니다. 시몬의 입장에서 본 것은 한 타락한 여인이 예수님을 애무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 알터인데...”
그것을 묵인하고 모르고 있으니까 시몬의 마음으로는
“예수님이 선지자가 아니고 엉터리다! 가짜 선지자로구나!” 하는 판단을 속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비유 한가지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빚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500데나리온 졌고, 하나는 50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길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예수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했습니까?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 받은 자니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옳다고 하셨습니다.
더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더 많이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일단은 대답을 받아 두시고 구체적으로 깨달아 회개하도록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이 여인의 봉사를 말씀하시면서 시몬의 잘못된 눈을 교정하여 주셨습니다.

▶ 시몬에게는 율법에서 시작된 비교의식이 있었습니다.
속으로 이 여인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아주 만족해하고 있었습니다.
저 여자는 죄인이야.. 나는 저 여자에 비하면... 의인이지.
기도할 때도 주여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것을, 특히 저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을 인하여 당신께 감사합니다. 나는 금식도 하고 십일조도 바칩니다.

우리는 비교의식의 피해자입니다.
어릴 때부터 항상 누구와 비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공부 이야기를 할 때는 공부 잘하는 친구와, 예의를 이야기 할 때는 예의 바른 친구와 비교되었습니다.
야~! 000좀 봐라. 네 사촌 형은 이번에 1등 했다더라...반만 좀 닮아 봐라.
우리들의 마음 속에 비교로 인한 상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항상 열등감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
다른 사람이 나보다 앞서가면 그것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저에게도 열등감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외모 때문에/ 도시락 반찬 때문에/ 부자 집 아이들을 보면서 열등감을 느낌...
학교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더 잘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나는 왜 저렇게 못할까?
목회를 나오니까 설교 잘하시는 목사님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요즘은 우리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왜 나는 저런 설교를 하지 못할까? 고민을 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습니다.
너는 너다. 너는 그 자체로 나에게 소중하다.
다른 사람처럼 되지 말고 너 다운 너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의 모든 목회자가 조용기 목사님처럼, 이동원목사님처럼 되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생긴대로/ 있는 그대로 /가진 재능대로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 주님은 우리가 열등감을 가지고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남과 비하면서 교만해지는 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항상 주님을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행동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발 곁에 서서 그 발을 적시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그 발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은/ 행동은/ 전적 그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많은 죄를 완전히 용서받은 사람은 주님을 진심으로 뜨겁게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음성을 다시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셨습니다.
누가 뭐라고 그래도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여인에게 임한 죄 용서의 감격을 여러분에게도 허락해 주시기 원합니다.
이 여인이 자발적으로 행한 주님을 향한 헌신과 봉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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