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 영혼의 소생 (시 23:3a)

  • 잡초 잡초
  • 434
  • 0

첨부 1


내 영혼의 소생 (시편 23:3a)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성도는 근본적으로 안식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미’ 안식을 누리지만 그 안식은 ‘아직 아니’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때때로 그 영혼이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 빠집니다. 그래서 3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쉼을 주시는 분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분으로 전환됩니다.

영혼을 소생시킨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소생”이라는 단어는 ‘되돌아가다’ ‘회복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하나님과 관련되면, 악으로부터 돌이켜서 하나님께도 되돌아가는 것, 원래 하나님께서 뜻하신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소생’이 필요한 상태라면 죽지는 않았지만 죽은 것과 비슷한 상태이거나 죽을 것 같은 상태겠지요. 이러한 상태로부터 내 영혼의 상태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회복되는 것이 소생입니다.

영혼의 소생이 필요한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요? 히브리어 성경은 1절이 “여호와”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3절은 “이름”이라는 단어로 마감되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이 구조와 연관해보면 ‘하나님의 이름’과 무관해진 상태가 소생이 필요한 상태겠지요. 성도는 분명한 인생의 목적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행 5:41) 능욕 받는 일조차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행 15:25) 생명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항상 “그 이름을 위하여”(롬 1:5)했습니다.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며 다양한 삶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모든 성도의 삶의 목표는 동일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직장에서든지 학교에서든지 가정에서든지, “그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는 약간 표현을 달리 해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이 목표가 흐려졌다면 그 성도는 소생이 필요한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목표를 알고 있긴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 이름을 위하여” 부단히 전진하지 않고 있는 사람 역시 소생이 필요한 상태에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지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도의 기도와 찬양은 정서적인 만족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는 외로움 방지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성도가 그런 활동들을 하는 이유는 목표를 확인하면서 바르게 전진하기 위함입니다. 교회가 상황에 따라 적절한 프로그램들을 도입할지라도, 이 목표를 왜곡하지 않도록 힘써야 하고, 또한 이 목표를 향해 부단히 전진하고 있어야 합니다. 양이 각자 목자를 따르면서 동시에 한 무리를 이루어 목자를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삶의 목표가 바르고 그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있어도 성도는 때때로 소생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으며, 능력과 지혜에도 제한이 있고 인격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인간인 까닭에 시행착오도 하고 과실과 허물을 남깁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정열을 불태웠는데 알고 보니 “철학과 헛된 속임수”(골 2:8)에 속은 것이어서, 청춘이 마치 노략질 당한 것처럼 보이는 때도 있습니다. 항상 성도 주변에는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에 근신하고 깨어있지 않으면(벧전 5:8), 적극적으로 죄를 범할 마음이 없어도 한 순간에 실족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선을 행하다가도 너무나 결과가 미비하고 변화가 없어서 낙심하게 되기도 합니다(살후 3:13).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보려고 할수록, 참으로 불신 세상은 살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거룩한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좁은 길로 걷다가 깊은 외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성도가 때로는 그러한 낙심과 슬픔과 외로움에 압도당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가 죽을 것 같은 때여서 소생될 필요를 느낍니다. 

그러면 누가 내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습니까?스스로는 소생하지 못합니다. 양은 스스로는 잃어버린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올가미에 걸렸다면 발버둥 칠수록 상처는 깊어지고 상황은 악화됩니다. 실패와 허물을 스스로 만회해 보려고 하다가 더 큰 궁지에 몰리게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스스로는 소생시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젊은 날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방황하면서 살았다면,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아서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고 스스로 돌이킬 재간도 없습니다. 하지만 또 한 가지 동시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양이 목자를 잃어버려도 목자가 양을 다시 찾아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딴 길로 향하면 그냥 두시지 않고 반드시 돌이키게 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사람들은 위로해야 할 때에 야단치고, 매를 때려야 할 때에 격려함으로 상처를 주거나 망쳐놓는 수가 많습니다. 사랑을 표현하려다가 상처를 주게 되기도 합니다. 관절염을 치료하려다가 위장이 상하기도 합니다. 능력과 지혜가 부족한 까닭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양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정확하게 아시며, 각각 어떻게 회복시켜야 할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아십니다. 매를 때려야 할 때는 매를 때리시고, 위로할 자는 위로 하시고, 격려할 자는 격려하십니다. 온전한 능력과 지혜로써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회복시키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괴로운 상황과 악조건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것을 믿고 그 소망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영혼을 소생시키실까요? 첫째로 목자의 음성을 다시 듣게 하십니다. 양은 항상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날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있는 양이라면 참으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비록 험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을지라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반면에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조차도 두렵고 외롭고 곳이 되어버립니다.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없으며 불만족스럽고 방황하는 심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목자는 양을 버려두지 않고 찾아오십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영혼의 상태에서도 주님의 말씀은 샛별처럼 떠오릅니다. 그 순간 낙심과 슬픔과 외로움에 압도당해있다가도 그 영혼은 소생하게 됩니다. 단 한마디 목자의 말씀만으로도 소생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둘째로 삶의 목표를 다시금 깨닫게 하십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보면 자칫 목표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끔씩 성도의 인생에 브레이크를 거십니다. 그때는 뭔가 일이 막히고 진행이 잘 안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단지 먹기 위해서 살거나 살기 위해서 먹는 존재도 아님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세상이 인정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삶은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썩는 양식대신 썩지 않는 양식에 소망을 두게 하십니다. 점차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돌이켜 주님 나라를 사랑하게 하십니다. 주님을 통해서조차 얻을 수 있는 그 무엇보다 추구하는 삶에서 돌이켜 주님 자체를 사랑하게 하십니다. 세상의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삶에서 돌이켜 주님과의 거룩한 교통 속에서 참된 위로와 행복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셋째로 목표를 향해 전진하게 도우십니다. 방황하는 삶이란 바른 목표를 향해서 전진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목자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했는데도 계속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이 길 잃은 상태이며 방황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양떼들 각자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를 통해 이루시려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사람의 분량을 샘내면서 다른 사람의 은사를 부러워하고만 있으면 틀림없이 괴로움을 겪습니다. 즉, 자기 은사를 발휘하며 자기 분깃에 충성하고 있지 못하면 틀림없이 방황하는 심정이 되고 우울함과 슬픔이 그 영혼을 채우게 됩니다. 그 기간이 길면 영혼이 죽을 지경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때에 이러한 영적 허영심을 깨뜨리심으로 자기 분수에 만족하게 하십니다. 내게 주시지 않은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신 은사로 감사하며 그것으로 주님께 헌신하고 충성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하게 하십니다(요 21:22).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더 큰 일을 위해 준비를 하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분수를 알고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가장 풍요로운 사람이며 행복한 사람입니다.

넷째로 인생의 한계로 인한 문제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해주십니다. 바퀴가 작은 유모차는 작은 돌멩이에도 걸립니다. 돌멩이를 치우는 방법도 있지만 바퀴 자체를 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당면한 문제 자체를 해결해주실 때가 있지만, 그 사람자체를 성숙하게 하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거나, 감당치 못할 문제를 피할 지혜를 주십니다(고전 10:13). 숨겨진 죄는 회개하기까지 촉구하시며, 욕심 부리며 집착하던 일에 대해서는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릇된 철학과 속임수에 빠졌던 자는 바른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사단의 가시로만 여겼던 문제가, 겸손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임을 깨우쳐주시기도 하십니다(고후 12:9). 염려를 주께 맡기고 겸손히 의지케 하십니다(벧전 5:7, 시 55:22).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때가 되면 거두게도 하십니다(갈 6:9). 사명인 으로서 인격적 미성숙함과 능력 부족으로 탄식할 때, 환난 날에 부르면 건져주시고 다시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게 하십니다(시 50:15). 그래서 원망을 감사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영혼이 곤고할 때에 스스로 소생하려고 발버둥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실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굳건히 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든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유지되도록 힘쓰며, 그분의 음성에 항상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말씀을 통해 목표를 점금하고 목표를 향해 부단히 전진하시되, 남과 비교하며 허영을 좇아 하지 말고 내게 주신 작은 은사에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