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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 (행 10:1-23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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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옛날 우리 조상들이 미신에 빠져서 돌이나 나무 앞에서 무슨 소원을 빌 때면, 먼저 '목욕재계(沐浴齋戒)'라는 것을 했습니다.
  즉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음으로서 자신을 다시 한 번 가다듬고 조심하는' 순서를 치렀던 것입니다.
  지난 주중에 우리 교단의 교역자 수련회를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 근처 휴양지에서 가졌었습니다.
  그 낙산사를 지은 의상대사 역시 그 곳에서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 무슨 관음보살을 보기 위해서 두 번에 걸친 '목욕재계와 7일기도' 끝에 그 관음보살을 만나서 바로 그 장소에 절을 지으라는 명을 받고 그렇게 했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비단 미신이나 불교에서뿐 아니라, 사람이 신을 만나려 하면 먼저 자기 자신을 깨끗이 해야 그 신이 자기를 잘 만나주고 자기 소원도 잘 들어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생각입니다.
  이처럼 신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먼저 어떤 부정함으로부터 깨끗하게 해 놓는 행위를 가리켜 '정화(淨化, purification)'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각 종교마다 그 정화에 대한 나름대로의 교리들이 설정되어 있으며 또 그에 대한 의식들 또한 여러 모양으로 정립되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힌두교도들이 갠지스 강에서 몸을 씻는다든지 이슬람교도들이 예배 전에 발을 씻는다든지 하는 것들이 대표적인 예들입니다.

  기독교에도 역시 이 정화란 개념이 사용됩니다.
  아니 이 말을 다른 어떤 종교들보다도 더욱 요긴하게 사용합니다.
  기독교만큼 사람의 더러운 본성 즉 타고난 죄성을 강조하는 종교는 없으며, 또한 기독교만큼 사람이 구원받기 위하여 완벽하게 깨끗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종교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앙에 있어서의 정화의 의미와 방법은 다른 종교와 아주 다릅니다.
  오늘 본문은 특히 종교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이 정화에 대해서 얼마나 큰 오해를 가지고 얼마나 심각한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 종교가 주장하는 그런 '인본주의적 정화'의 잘못된 선입견들을 일거에 타파하는 말씀, 곧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해 주시는' 참된 정화의 진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깨끗하게 할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본문 1절로 8절까지의 말씀에 "1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4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7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분명히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던" 자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고넬료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하여 이미 하나님 믿는 신자로 개종했음을 뜻합니다.
  당시 이방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그들의 유일신앙을 이방인들 앞에서 드러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 종교들의 각 신들을 다 서로 인정해 주는 범신교에 익숙했던 당시의 이방인들에게는 아주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일부 이방인들은 그와 같은 유대인들의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였고, 또 그 중에는 정식으로 할례를 받음으로써 완전한 '개종자'가 된 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 고넬료는 아직 할례까지는 받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사도행전 11장 3절에서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고 비난 받았던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즉 고넬료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참 신으로 경외하고 그 앞에 기도하며 경건과 구제생활까지는 했지만 아직까지 유대교 입장에서 볼 때 정식 개종자는 되지 못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22절에 보면 그 고넬료는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던" 자였다고 했습니다.
  본토 유대인이라면 아직 할례도 받지 않고 정식 개종자도 아닌 사람을 그렇게 칭찬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이방 지역에 살다보니 이방인들이 할례는 받지 않고 하나님 신앙만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어느 정도 개방된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튼 그 할례 문제만 제외하면 고넬료는 유대인들이 볼 때에도 거의 완벽한 신앙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로 하여금 베드로를 초청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신 구체적인 이유는 나중에 22하반절에 보면 베드로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말"이란 것은 나중에 34절 이하에서 나타나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으로서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종결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죄사함'의 "말"을 고넬료에게 들려주시기 위하여 그로 하여금 베드로를 만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고넬료는 분명히 진실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고 또한 여러 가지 선행을 부지런히 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이사랴에 살던 유대인들이 볼 때에나 오늘날 제 삼자가 판단할 때에 공히 그 고넬료의 신앙생활은 완벽한 것으로 보일만 했으며, 오늘날 소위 '이행득구'를 가르치는 종교인들의 잣대로 재어볼 때에는 이미 충분히 구원 받고도 남음이 있을 만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신심이 깊고 선행을 많이 하더라도 스스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 사함 받고 깨끗해지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깨끗함을 입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고넬료가 '날고 긴다' 하더라도 결코 구원받을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죄사함'은 오직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해 주셔야만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완벽한 신앙생활하는 듯이 보였던 고넬료를 부르시고, 그에게 결정적으로 결핍되어 있던 것, 즉 죄에서 깨끗함을 입는 은총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깨닫고 얻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많은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정화의 문제는 오직 자기 자신 안에서만 해결되어져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깨끗한 존재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가운데 스스로 묵상에 깊이 빠지고 선행을 통하여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만 생각하고들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사람의 완전타락한 본성 자체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한계성을 명백히 가르쳐 줍니다.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잠 20:9)라고 만약 사람이 자기 노력을 통하여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허황된 꿈이요 크나큰 착각이며 유일하게 완전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신성모독이라고 일깨워 줍니다.
  그리고는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4)라고, 고넬료와 같이 완벽해 보이는 사람도 결코 스스로는 깨끗하게 할 수 없는 것을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런 '무조건의 사죄'를 모르는 종교는 그저 윤리종교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죄는 자기가 스스로 갚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죄의 경중에 따라 촛불을 몇 개 켜고 주기도문을 몇 십번 암송하면 그 죄를 상쇄시킬 수 있는지를 계산합니다.
  '목욕재계하고 제법 깨끗해졌으니 이만하면 신께서도 나를 예쁘게 보아 주시겠지.'라고 종교적 나르시시즘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기독신앙은 자신의 용서받아야 할 죄를 자기편에서 미리 깨끗하게 해결한 후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필요 없어지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헛수고를 하셨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더러운 모습이 부끄러운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라고 하면서 그저 있는 그대로, 생긴 모습 그대로 오직 십자가 밑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앞에 그렇게 나아오는 죄인을 결코, 단 한 사람도 멸시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요일 1:7) 놀라운 '정화'의 역사가 바로 즉시 내 속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흠 없고 순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감히 자신을 스스로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이 엄청난 착각과 교만을 버리고, 오직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나의 모든 죄를 단번에 씻어주시는 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해 주시는' 은총을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타인을 두고 자기보다 더 더럽다고 판단할 자격이 없는 존재입니다.

  9절 이하의 16절까지의 말씀에 보면,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의 유숙하는 집에 가까이 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또 한 가지 선입견을 타파하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제 육시" 즉 정오에 기도하던 중 "시장"기를 느꼈습니다.
  "사람이 준비할 때에" 즉 아직 밥 먹지 못하고 배고픈 중에 있을 때 그는 "큰 보자기 같이" 보이는 "한 그릇"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짐승과 새들이 있었는데, 특별히 구약 율법에서 먹지 못하도록 규정된 것들만 거기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소리"가 베드로에게 명령하기를 "일어나 잡아 먹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로서는 제 아무리 배고파도 도무지 잡아먹을 수 없는 것들임에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것" 즉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짐승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본문 16절에 기록된 대로 "15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런 대화가 세 번이나 반복된 후 보자기는 다시 하늘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17절 이하 23상반절까지의 말씀에 "17베드로가 본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19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23a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의심하더니"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구약에서 부정하다고 선언된 것'들을 이제는 '내가 깨끗하게 만들었다'라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뜻이 도대체 무엇인지 베드로는 무척 궁금해졌던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이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하셨던 말씀들을 되새겨 보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막 7:18)고 하시면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막 7:19)고 선언하셨던 말씀들을 기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처럼 부정한 음식에 관한 규정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중대한 이유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식탁에 나오는 음식 중에는 그들이 먹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던 까닭에 초대를 받아도 아예 가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그런 규정을 고집한다면 이제 곧 고넬료의 초청을 받게 되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음식 문제는 이미 예수님을 통하여 새롭게, 자유롭게 되었음을 베드로에게 확인시켜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환상의 의미는 그런 실제적인 음식 문제 외에 또 한 가지 더 중요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항상 낮추어 보고 있었으며, 이방인들은 전혀 구원받을 가망성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아예 낙인을 찍어 놓고 대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선민이고 너희들은 불택자들이다.'라는 자만이,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대할 때마다 그 마음에서 즉시 튀어 나왔던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에게, 초대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런 마음이 남아 있었다면 결코 이방선교를 할 수 없었을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이방인은 속되고 더러운 존재이니 내가 상관치 않는 것이 상책이다.'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고넬료를 위시한 다른 이방인들에게 전도가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닫힌 마음, '나는 저 사람보다는 더욱 거룩하다.'라는 선입견을 깨뜨려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 보자기 그릇의 환상을 보여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판단자가 될 자격이 애초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잘 보면서도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볼 줄 모르는, 정말 희한한 시야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은 자기 얼굴을 스스로 보지 못하지 않습니까?
  옛날 학생들이 수학여행 가서 여관에서 같이 잘 때, 다른 친구의 얼굴에 매직으로 수염을 그려 넣는 장난을 치고는 했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 친구가 아침에 일어나서 곁의 다른 친구에게 눈곱이 꼈다고 놀리면 그 얼마나 우스꽝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남의 더러운 것을 잘 발견해내면 낼수록 자신은 그만큼 더 깨끗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처럼 여기는 지독한 교만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인들 역시 '정화'라는 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더 깨끗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대적인 거룩함'을 이룬 사람을 엄청나게 받들어 모십니다.
  남보다 좀 더 나으면 '성자'라 부르고, 보통 사람이 쉽게 행하지 못하는 선행을 좀 많이 했다 하면 마치 그것이야말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본받고 따라해야 할 '고고한 경지'라고들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곧 '율법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종교는 자연히 그 깨끗함의 정도를 남과 비교하게 될 수밖에 없으며, 그런 비교는 결국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재판장으로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는 '바리새인 종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회에서도 그런 비교는 얼마나 기분 나쁜 일입니까?
  "네 형은 저렇게 공부 잘하는데 넌 왜 이 모양 이 꼴이니?" - 그 자녀의 가슴에 못을 박고 그 형제지간을 갈라놓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우상종교에서는 그런 비교와 비판이 아예 종교생활의 신조요 자기성찰의 모토가 되어 있습니다.
  "저 성자는 우리 같은 사람은 발끝에도 못 따라갈 정도로 거룩하게 살았으니, 우리는 저런 성자를 본으로 삼고 저런 성자에게 내 죄 용서를 위한 중보기도를 부탁해야 한다."라고, 본인의 성화에 대하여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같은 사람인데도 다른 사람을 '중보'까지 해 줄 수 있는 위치 곧 자기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신(神)의 경지에까지 훌쩍 올려놓고서 소위 그 '성자'들을 멀리서 우러러 보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피곤하기 짝이 없는 종교생활이겠습니까?
  늘 속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고 비판하면서 살아야 하니 거기에 무슨 진정한 사랑과 이해와 용납과 성도교제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누가 좀 더 잘났는지를 자랑하는 '도토리 키재기 종교'가 아닙니다.
  교회는 누가 더 좋은 성형수술을 받고 누가 더 솜씨 좋은 화장을 했는지를 겨루는 '미인대회'로 모인 장소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의 최상의 경지는 그처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제일 거룩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완전히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단 그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해 주심'을 입게 된 성도는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죄 있다'고 정죄할 수 없는 완벽한 칭의, 곧 최고의 정화에 상태에 이미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고 남을 판단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나야말로 죄인 중에도 괴수라'는 고백만을 유일하신 중보자요 심판주이신 주님 앞에 내어 놓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완전히 깨끗하게 해 주시는 놀라운 은총을 입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시편 15편 1절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다윗은 질문했습니다. 정말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최악의 더러움으로 채워진 사람이라는 존재가 최상의 깨끗함으로 가득하신 하나님과 함께 감히 거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 자신의 거룩함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나의 정직, 공의, 진실이 아무리 수준 높다 해도, 나의 선행, 수도, 경건 생활이 아무리 고결하다 해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처소에 함께 어울리기에는 턱도 없이 모자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보다는 조금 더 거룩하다' 생각 가지고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도토리끼리 아무리 키 경쟁을 해 보았자 결국 도토리일 수밖에 없듯이, 죄인끼리 아무리 서로 견주어 보았자 끝까지 오십보백보의 죄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서로 비판하고 경쟁함'으로써 가능한 것도 결코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아니 사람이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비약적인 과정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값없이 죄인을 의인이라고 칭해 주실 때에 사람은 한순간에 거룩한 존재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저 내랴"라는 이 불가능의 딜레마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대신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기가 막힐 은혜의 자리로 단숨에 들어가게 되는 순간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정말이지 얼마나 시원스러운 선언입니까?
  예수 보혈로써 깨끗함을 입는다는 것은, 이 추악한 죄를 다 씻음 받고 용서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목욕보다도 후련하고 상쾌하며 행복한 체험인 것입니다.

  제 어머니께서는 좀 결벽증(?)이 있는 분이십니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병원에 입원하셔서도 병실 유리창틀에 끼인 먼지를 그 환자가 손수 깨끗이 청소해야 마음이 놓이는 정도이십니다.
  이 어머니께서 제가 옛날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을 때 갓 태어난 제 아들을 몇 개월 정도 돌보아주시려고 그때 우리 가족이 살고 있던 허름한 트레일러 하우스에 오셨습니다.
  오신 후 한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어머니께서는 걸레를 들고 우리 집을 청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가구에 먼지가 조금도 쌓여 있지 않는 것을 보시고 정말 놀라셨습니다.
  "서울에서는 매일 닦아도 새까만 때가 나오는데, 여기는 일주일 지나도 우째 이래 먼지가 안 싸이노?"하면서 신기해 하셨던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제 어머니께서 '오염지역'에 살다가 '청정지역'으로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공해로 찌든 곳에 살면 제 아무리 결벽증 환자라 해도 자신의 주위를 완벽하게 깨끗이 할 도리가 없습니다.
  매일 닦아도 매일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기 자체가 깨끗한 동네에 오면 그런 결벽증 환자가 청소를 할 필요도 없이 늘 깨끗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 결벽증 환자'들은 아무리 수양을 하고 선행을 해도 결코 자신을 완전하게 깨끗이 할 수 없으며, 매일같이 '나는 아직 더럽구나.'라는 자책과 '내가 이래서 과연 구원 받을 수 있을까?'라는 불확신 속에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십자가 아래에 있는 성도들은 그런 걱정과 헛수고는 조금도 하지 않고 그저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라고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살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결벽증이 있고 청결히 살아서가 아니라 이제 나는 죄의 오염지대를 벗어나서 이 예수 십자가 보혈이 늘 나를 씻겨 주시는 '칭의의 청정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지역에 살고 계십니까?
  스스로 깨끗해져 보겠다고 발버둥치지만 끝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죄의 공해지역'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미 깨끗케 하셔서 아무도 날 더럽다고 할 자 없는 이 '십자가 보혈의 청정지역'에 살고 있습니까?

  정말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던, 법 없이 살 수 있었던 고넬료,' 그 정도면 충분히 천당으로 직행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고넬료 역시 예수 십자가를 통한 씻음이 꼭 필요했던 죄인이었습니다.
  명실 공히 초대교회의 수장이며 천주교에서는 소위 '첫 번째 교황'이라고 떠받들고 있는 그 베드로조차 남을 정죄하거나 면죄할 권리 따위는 아예 없었고 자기가 이방인보다 좀 더 거룩하다고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깨끗케 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 믿지 않고 이것 체험해 보지 못하고 이 신앙 고백할 줄 모르면 제 아무리 '고넬료'처럼 의롭게 살아도, 제 아무리 '베드로' 같은 교회의 중직자까지 된다 해도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자신의 깨끗함'을 내세우는 윤리종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종교이며, '사람끼리 비교'하는 율법종교가 아니라 꼭 같이 '십자가 아래에서 평등해지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불교 같은 '목욕 종교'가 아니며 천주교 같은 '미인대회 종교'도 결코 아니라 오직 '십자가 보혈로써 씻음을 받고' 너나 할 것 없이 '나 같은 죄인도 살려 주신' 구속의 은혜를 함께 찬송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자신의 의'라는 착각과 '남을 정죄하는 교만'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죄 씻음만을 의지함으로써, 사람이 결코 깨끗케 할 수 없는 내 더러운 죄를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깨끗하게 해 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드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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