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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복을 계승한 야곱 (창 25: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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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브라함의 손자이며 이삭의 아들인 야곱에 관해서 말씀해 드림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아시는 대로, 야곱은 이삭이 60세에 낳은 쌍둥이 아들 가운데 둘째였습니다. 리브가가 시집 온 지 20년 만에 쌍둥이를 잉태했는데, 아이들이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걱정이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서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해산 할 때 보니 먼저 나온 아기는 색깔이 붉고 온 몸에 털이 많아서 그 이름을 에서라고 하였고, 둘째 아기는 손으로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고 했습니다. 에서는 ‘털이 많다’는 뜻이고, 야곱은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두 아이가 자라서, 성격이 호탕하고 몸이 날쌘 에서는 사냥꾼이 되어 들에서 살고, 성격이 차분하고 경건한 야곱은 주로 집에서 지냈습니다.

관습에 의하면 당연히 장자인 에서가 아버지 이삭의 대를 이어 조부 아브라함의 복을 계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놀랍게도 동생인 야곱이 형 에서를 제치고 이 귀한 특권을 계승했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으며, 그의 열 두 아들은 열 두 지파의 족장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기꺼이 허락하셨습니다. 이처럼 장자인 에서가 탈락하고 차자인 야곱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에서를 버리시고 야곱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에서와 야곱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리브가가 뱃속에서 두 아이가 싸우는지라 하나님께 나아가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네 복중에서 두 민족이 나누일 것이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큰 자는 에서를, 작은 자는 야곱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는 두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계승자로 택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9장 10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0)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세상의 법과 관습에 의하면 당연히 장자인 에서가 대를 이어 아버지의 권리를 승계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위대한 복을 상속받도록 작정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의 행동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에서와 야곱 중에서 누구를 택하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물주로서 지음 받은 자들에 대하여 주권적으로 다루실 권리가 있으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선민의 조상으로 선택 받은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지구상에 살고 있던 수천만 명 가운데서 유독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왜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택하신 것에 대하여 비난 받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누구든지 선택할 권한을 갖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은 그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이성으로 백 퍼센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수긍이 가지만 감정적으로는 선뜻 용납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이해하려면 올바른 관점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관점입니다. 성경이 선택을 다루는 목적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주권을 갖고 섭리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서 우리의 지지가 필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주권자가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주권을 말씀하는 것은, 선택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차자로 태어났으므로 애초부터 아브라함과 이삭을 이어 하나님의 약속을 계승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해 주셨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고 싶어서 믿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택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보니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요 15:16)고 하셨습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받은 것에 대하여 우리 자신을 자랑할 것이 전혀 없으며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게 하신 이유에 대하여, 디도서 3장 7절에 보니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후사”는 하나님의 상속자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감이 나십니까?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대를 이어 조부 아브라함의 복을 계승했을 때 그 감격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을 계승하는 정도가 아니라 천국을 상속받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15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8)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된 것은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주권적으로 우리를 택하셔서 자기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잊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되 은혜에 감격해서 자원하는 심정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야곱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하게 된 것은 그가 장자의 명분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철이 들고 나서 줄곧 장자의 명분을 사모해 왔습니다. 한시도 잊지 않고 어떻게 하면 형 에서가 가진 장자의 명분을 자기가 차지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야곱이 단순히 장자로서 아버지의 대를 잇고 곱절의 상속분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런 목적이라면 야곱은 탐욕스러운 자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경건한 야곱이 그런 이유로 장자의 명분을 사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사모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너무나 귀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하시기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언약은 장자의 명분을 가진 사람이라야 계승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에서와 야곱이 나이차가 난다면 덜 억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둘은 한 날 한 시에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손으로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생각할수록 아쉽고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아마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차지하기 위해서 별별 방법을 다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한편, 형 에서는 장자의 명분에 대하여 애착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조부 아브라함에게 하신 축복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누가 무어라 해도 자기가 장자이므로 당연히 모든 특권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당연시하는 데는 그 축복에 대한 감사도 없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도 생길 리 만무합니다.

하루는 야곱이 죽을 쑤었는데 에서가 사냥하고 돌아와서 심히 배가 고팠습니다. 마침 그가 좋아하는 팥죽 냄새가 나는지라 에서는 즉시로 야곱이 팥죽을 쑨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엌에 있는 야곱에게로 갔습니다. 가보니 솥에 팥죽을 맛있게 쑤어 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다짜고짜로 “배가 고파 죽겠으니 그 붉은 죽을 좀 먹자꾸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말하기를 “그러면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파시오”라고 했습니다.

에서가 대답하기를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러자 야곱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하기를 “오늘 내게 맹세하라”고 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다고 맹세하자,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었습니다. 이에 에서가 맛있게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은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의 명분을 샀습니다. 이 같은 에서의 행동에 대하여 창세기 25장 34절에 보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에서는 사냥하고 돌아와서 배가 고픈 것을 과장해서 “내가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에서가 그런 표현을 쓴 것을 비난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식으로 말할 때가 종종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가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것은 배고픈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 장자의 명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졌던 장자의 명분은 그런 식으로 취급해도 괜찮을 정도로 시시한 것이 아니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복을 그와 그의 자자손손이 받아 누리는 권리를 말합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을 포함해서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는 것과 땅의 모든 족속이 그와 그의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는 것입니다.

에서도 이 사실을 들어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 팥죽 한 그릇에 판 것은 조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그가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소위 기독교인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 실정입니다. 성경을 영감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 구원이니, 부활이니, 영생이니, 천국이니, 아무리 말해 보았자 감동을 받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팥죽 한 그릇만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곱과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하찮은 세상 것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소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사고 나서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삭은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이삭이 맏아들 에서를 불렀습니다.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에서는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아마 에서는 속으로 장자의 명분에 집착하는 야곱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장자의 명분을 가진들 아버지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에서의 착각이었습니다. 리브가가 남편 이삭이 에서에게 하는 말을 엿듣고는 야곱을 불러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었다.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시키는 대로 내가 별미를 만들어 줄 터이니 그것을 가져 아버지께 드리고 축복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말하기를 “내 형 에서는 털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찐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찌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그러자 리브가가 말하기를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염소를 잡아오라”고 했습니다. 이에 야곱이 가서 염소를 잡아 어머니에게 가져왔고, 리브가는 남편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습니다.

또 리브가는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야곱에게 입히고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을 꾸미고 별미와 떡을 야곱에게 주어 이삭에게 들어가게 했습니다. 눈이 어둔 이삭은 방에 들어온 아들이 에서인지 아닌지 알아보려고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말하기를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삭은 야곱을 에서로 알고 마음껏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쳐서 야곱이 방을 나가자 곧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습니다. 정성껏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그 때 이삭이 놀라며 “너는 누구냐”고 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그러자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말하기를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에서가 그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였으나 이삭은 말하기를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고 했습니다. 이삭은 족장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었으므로 번복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야곱이 속임수를 쓴 것은 잘못한 것이지만 결국 장자의 축복도 받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가 장자의 축복마저 빼앗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1)…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더 많은 은혜를 받게 되지만, 은혜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잃고 만다는 뜻입니다. 그런즉 성도 여러분은 야곱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심으로 더욱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야곱은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더 이상 부모님과 함께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형 에서가 야곱을 죽일 기회를 엿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에서 몰래 괴나리봇짐을 지고 멀리 하란에 사는 외삼촌 라반에게로 가려고 길을 떠났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는데 한곳에 이르러 해가 졌습니다. 빈들에서 돌을 베개하고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보니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보니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또 보니 하나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아브라함과 이삭을 계승하는 자로 인정하시고 동일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에 야곱이 잠이 깨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서원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이는 야곱이 하나님의 손에 자기의 운명을 맡긴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우리의 인생길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야곱처럼 하나님을 성실히 섬길 것을 서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축복 받는 것은 좋아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데 인색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며 복을 내려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편,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지내는 20년 동안 고생도 많았지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외삼촌의 두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열 두 자녀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가족과 가축 떼를 이끌고 고향인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형 에서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원한에 찬 형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세일 땅에 있는 형 에서에게 하인들을 보내 자기의 귀환을 알렸습니다.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

그런데 하인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하는 말이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종들과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거리를 두고 가게 했습니다. 이는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를 가지고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야곱은 형 에서에게 보낼 예물을 택했습니다. 그 내역은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었습니다. 그것을 각각 여러 떼로 나누어서 종들에게 맡기고, 각 떼로 거리를 두고 가되, 에서가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 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먼저 예물로써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그를 받아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밤중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너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야곱은 홀로 남아있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오는데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알아챘습니다. 야곱은 그 사람을 붙잡고 자기를 도와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날이 새도록 씨름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허리뼈를 쳤습니다. 이리하여 야곱은 그만 허리뼈가 위골되었습니다. 허리뼈가 삐었으니 힘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러나 야곱은 그 사람을 붙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말하기를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그 사람이 말하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했습니다. “야곱이니이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말하기를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했습니다. 야곱과 씨름한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하고,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야곱은 전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니 더 이상 에서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어제 밤에는 가족과 종들과 가축 떼를 먼저 건너게 하고 자기는 맨 뒤에 남았으나, 그날 아침에는 야곱이 대열의 맨 앞에 서서 나아갔습니다. 에서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오는데 야곱이 쩔뚝거리면서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에서의 마음에 동생에 대한 연민의 정이 솟구쳤습니다. 말에서 내려 달려와서 야곱을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입을 맞추고 피차 울었습니다. 수십 년의 원한이 봄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야곱을 통해서 우리는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젊은 시절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한 나머지 성급하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흥정하고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는 식으로 비열한 방법을 사용하였지만,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후로는 더 이상 인간적인 방법을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야곱은 비록 차자로 태어났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더불어 선민의 조상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시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야곱은 비록 차자로 태어났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더불어 선민의 조상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시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영적인 귀중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한 것임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은혜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야곱과 같이 씨름하는 기도로써 응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신 성도님 마다 야곱과 같은 신앙인이 되셔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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