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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입니까 (눅 9:5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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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9:51-62(신약 108)
제목 : 제자입니까 (2007. 7. 8)

  캄보디아 여객기 참사가 지난 번에 있었다. 비행기의 고도가 1200m를 유지해야 하는데 절반정도인 600m에 고도에 머물러 있었다. “고도로 높이라”는 관제탑의 경고에 대해 비행기 조종사는 “이 지역 지리는 내가 잘 안다”고 하면서 저공비행을 하다가 사고가 나서 많은 생명을 잃고 말았다. 조종사 한 사람의 판단과 선택이 비행기 안의 22명의 생명을 담보한다. 그 만큼 한 사람의 판단은 중요하다. 

  저는 이번 비행기 사고를 통해서 나의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비행기 조종사는 하늘 길을 따라 가야만 사고가 안 난다. 배를 운행하는 사람은 해로를 따라 가야 암초와 해류의 위험에서 생명을 건질 수 있다. 캄보디아 비행기 조종사는 잘못된 길을 가면서도, 주위에서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잘못된 길을 가다가 다른 사람들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가는 길에 대해서 늘 물어야 한다. “지금 나는 바른 길로 걸어가고 있는가? 내가 걸어가야 할 길에서 나는 이탈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내가 가야할 바른 길, 정도인가?”

  여러분은 신앙인으로서 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나는 내가 마땅히 가야할 길에서 이탈해 있지는 않는가? 나는 혹시 주님이 걸어가라고 하는 길에서 멀어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다른 것에서 만족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잘못된(죄악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원래 있어야 할 자리, 원래 가야할 길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잘못 가고 있으면서도 그 조종사처럼 나의 생각과 경험, 내 방법이 맞을 것이라고 우기면서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계속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분은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는가?

  저는 요즘에 설교학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프레드 크레독의 책『preaching』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은 크레독이 설교학의 교과서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쓴 그야말로 설교학의 교과서이다. 일종의 설교 레슨이다. 전에 이 책을 한 번 읽었기 때문에 이 책을 다시 읽는다고 해서 설교에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는 못한다. 사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오늘 본문과 관련되는 책을 직접 읽는 것이 설교준비를 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저는 시간을 내서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저는 다시 설교의 기본, 설교의 근본, 설교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 책을 읽는 동안 다시 설교의 신학에 대해서 생각하고, 설교의 중요성과 ‘설교는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 책을 읽는 동안 그 분의 설교라면 한국교회 성도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꾸뻑 죽는 CTS의 어떤 목사님의 설교, 그 분의 설교 스타일, 그 분의 이야기를 따라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책을 읽으면서 저는 설교의 근본과 기본, 그 밑바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생활 그럭저럭 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신앙이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크게 잘못한 것도 없고, 예배 잘 드리고, 기도생활 잘 하고, 헌금 잘하고, 하나님께서 물질도 넉넉하게 채워주셔서 어려움 별로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 저번에 사놓은 부동산도 값이 많이 올랐고, 남편과 자녀들도 무탈하게 잘 지낸다. 어떤가? 이만하면 된 것 아닌가?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의 그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가? 나는 제대로 신앙생활 하고 있는가? 나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고 있는가? 주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 길을 가면서 나는 평안하다, 안전하다, 축복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냐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과 바른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다시 바라보고 그 분의 말씀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내가 지금 추구하고 좋아하는 이것을 주님도 좋아하실까 생각해보기 위해서이다. 나는 제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길을 주님도 보시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으실지 깊이 묵상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잊혀진 제자도를 다시 회복해야만 한다.

2. 본문 속으로

  1)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로 결심한다. 오늘 성경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51절)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시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깨닫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 그것은 십자가의 다른 이름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오르신다.

  그래서 먼저 사자들(미리 보낸 제자들이나 어떤 사람들)을 보내어 준비케 하신다. (52절) 그런데 사자들이 들어간 마을은 사마리아 동네였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을 받아주지 않는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문전 박대를 당했다. 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거절했을까? 우리는 상식으로 알고 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있었던 깊은 앙숙의 골이 있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취급을 했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늘 유대인들의 관심밖에 있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마주 심한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사마리아는 구약 당시 북이스라엘의 수도로 주전 722년 경 앗수르 사르곤2세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래서 지도층을 포함한 27,290여명은 앗수르 제국 내 고산에서 메대 지방에 이르는 여러 지역으로 끌려가 분산되었고, 대신에 앗수르 관리들과 백성들이 사마리아에 들어와 살면서 인종혼혈정책에 의해서 잡혼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마리아를 비롯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상실하고, 신앙 역시 변질되었다. 게다가 사마리아 사람들은 200여년 후 바벨론 포로에서 되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는 유다사람들을 훼방하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출하였고(에스라, 느헤미야) 유다백성들도 이런 사마리아 사람들을 아주 싫어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유대지방 사람들은 북방으로 여행할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요단 동편의 베뢰아 지방으로 우회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서로 보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을 정도로 그 관계는 심각하게 깨어져 있었다.

  그리고 성경에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적대적 관계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요한복음에 나온다. 예수님을 싫어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요8:48)에 나온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여기에서 유대인들은 “너는 사마리아 사람이다.” 라는 말과 “너는 귀신이 들렸다.”라는 말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너는 사마리아 사람이다.”라는 말은 관용적 표현으로서 “너는 아주 더럽고 경멸할 만한 존재이다.”라는 뜻이다. 얼마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천대시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예수님과 제자들이 문전박대를 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성경에도 이런 정황을 반영하는 부분이 있다. (53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예수님께서 유대인이셨기 때문에, 그런 예수님이 더구나 예루살렘으로 향해 올라가는 여정에 있었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생각을 멈추면 안 된다. 위에서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했는가? “승천할 기약이 가까워서”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사건과 승천(예수님의 사명)을 아주 긴밀하게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또 성경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것과 그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즉 성경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거절과 예수님의 승천(예수님의 사명)을 연결시킨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이 모든 사명을 위해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오르시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사명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한 채 단순히 민족적인 감정과 표피적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정말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그 분의 사명에 대해서, 그 분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그 분의 하실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문전박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우리도 믿음의 길을 가는 동안 믿지 않는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로부터 외면당할 수 있다. 그들은 왜 우리에게 안티를 거는가? 왜 핍박을 하는가? 왜 네티즌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그렇게 독설을 퍼 붓는가? 싸가지가 없어서? 마음이 강팍해서? ...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우리들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내가 알고 있는 천국에 대해서 그들은 잘못 알고 있거나, 부분적으로 알고 있거나, 거짓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바라볼 때 가져야 할 마음은 긍휼의 마음이다. 그들이 잘못 알고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알고 있는 믿음의 도리, 천국, 예수님, 구세주,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나라... 이 모든 것에 대해 나를 향해 비웃는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앙심이 아니라 긍휼이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요, 독설이 아니라 사랑의 언어여야 한다. 또 우리는 그들이 이 진리를 바르게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마음을 가지고 계셨기에 자기들을 용납하지 않아서 열 받은 야고보와 요한이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그들을 멸하기를 기도하려고 하였을 때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예수님은 아셨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를.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다른 마을로 가셨다. (56절)

2)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이 있다면 첫째는 긍휼이요, 둘째는 낙심하지 않는 마음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수모와 멸시를 받고 쫓겨나다시피 했지만 낙심하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그 곳에 장애물이 있고, 문제가 있는 것을 아시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옮기셨다.

  우리도 기억하자.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좌절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격언이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제자는 멸시와 거절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 청년들 가운데 교제하다가 깨진 사람들이 있는가? 왜 여자 친구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는가? 왜 남자친구가 나를 찼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말씀 속에 진리가 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진정한 가치와 존재를 알지 못했기에 예수님을 거절한 것처럼 어쩌면 여러분도 그럴 수 있다.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그러나 청년들이여! 맘 편하게 생각하라. 왜 저 사람이 나를 버렸을까? 그 이유는 이것이다. 저 사람이 나의 진정한 가치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절대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라. 오히려 당당하게 외치고 웃어버려라. “야 임마! 네가 나를 버린 것은 너의 인생에 최대의 실수다.” 그렇게 예수님은 멸시와 거절을 당한 다음에 어떻게 했는가? 포장마차에 가서 닭발을 뜯으며 자기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당당히 다른 마을을 찾아 가셨다.

  누군가에게 차였다고 해서 절대로 낙심하지 마라. 세계는 넓고 사귀어야할 사람은 많다. 저 사람이 나의 진정한 가치를 몰라서 나를 버린 것이다. 우리는 다시 다른 마을로 들어가면 된다.

여러분은 제자인가? 내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처럼 우리도 내 마음 속에 거룩한 사명을 품어야 한다.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과 승천. 이 모든 것을 통해 이루실 구원의 큰 역사.... 그것을 위해 존재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그것을 향해 늘 꿈꾸셨던 주님처럼 나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

  진정한 제자도도 없이 오늘 내게 아무리 많은 평안과 축복이 부어진다한들 그것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비록 나를 향해 핍박하는 사람을 향해서 악한 마음으로 되받아치는 대신, 긍휼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좌절과 실패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진정한 제자는 내게 사명이 있기에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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