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눈 = 몸의 등불 (눅 11:33-36)

  • 잡초 잡초
  • 1017
  • 0

첨부 1



<가짜가 진짜 같은 세상, 왜?>
사회적으로 다 성공한 대학 동창생들이 존경하는 은사 댁을 방문했습니다. 이 얘기 저 얘기,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인생이 참 힘들다는 푸념이 나왔습니다. 직장 생활과 가정 생활에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불평이었지요. 제자들이 하는 말을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던 교수님이 커피를 대접하기 위해 물 끓이는 주전자와 여러 개의 컵들을 내왔습니다. 그런데 그 컵들의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도자기 컵, 플라스틱 컵, 유리 컵, 크리스털 컵, 등등, 평범한 컵이 있는가 하면, 매우 비싸 보이는 컵, 심지어 해외에서 수입해 온 아주 진귀한 컵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커피를 따른 컵을 각자의 손에 집어 들었을 때 교수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알아차렸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보니까 다들 멋있고 값비싸 보이는 잔부터 먼저 골라 들고, 평범하고 값싸 보이는 잔은 늦게 들려고 하더군요. 이렇게 사람들은 최고로 좋은 것부터 먼저 선택하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했는데 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답니다.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좋은 컵을 골랐다고 해도 결코 커피 맛까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커피 잔은 커피 맛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지요. 그럼에도 여러분은 서로 다투어 제일 좋은 컵부터 먼저 골라 들면서 다른 사람들의 컵을 은근 슬쩍 쳐다보지 않았습니까?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커피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직업이나 지위나 돈, 자동차, 집, 등등은 커피를 담는 잔으로서 여러분의 인생을 담는 도구에 불과하지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컵을 가졌는가 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커피 맛에 집중해야지 커피를 담고 있는 그릇에 집중해서는 진정한 커피 맛을 즐길 수 없답니다!" 

참 지혜로운 충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커피라면, 우리의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나, 학력, 등등은 우리의 인생을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좋은 커피 맛은 커피 그 자체의 질에 달려 있지 커피를 담고 있는 그릇의 종류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한 잔 그윽한 커피 맛을 줄기고자 할 때, 커피를 담고 있는 그릇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한 번 쓰고 버리고 말, 종이컵이라고 할지라도 커피 맛만 좋으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커피를 즐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좋은, 금이나 은이나 크리스털로 된 최고로 화려한 그릇에 커피를 따라 마신다 할지라도 커피 맛 그 자체가 형편없으면 커피를 즐길 수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요즈음 한창 시끄러운 동국 대학교의 신정아 교수 학위 위조 사건을 생각해봤습니다. 신정아씨는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 중에 하나인 예일 대학교에서 미술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했는데, 이것이 완전 날조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미국에서 받았다는 학사, 석사 학위 역시 다 허위라는 사실이 들통났습니다. 신씨는 이렇게 자신의 학력에 대해서 거짓말을 한 상태에서 대학 교수로, 또 광주 비엔날레와 같은 대표적인 미술 행사의 감독으로 학계와 미술계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이 여파로 만화가 이현세 씨와 KBS 라디오의 최고가는 영어 강사 이지영 씨 역시 자신의 학력이 거짓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소설가가 "인생은 하나의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말했는데, 가짜가 판을 치는 이 세상의 풍조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전 1: 9)는 전도서 기자의 탄식처럼 이 세상에 100% 진짜는 없습니다. 다 모방하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짝퉁'이라는 말도 있듯이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인 것처럼 보이는 세태가 문제이며, 더욱 더 큰 문제는 학력과 간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 사회의 경직된 학벌주의에 있습니다. 한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 사람의 내면의 인격이나 실력이 훨씬 더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외모나 학력을 훨씬 더 중시하는 이 사회의 그릇된 풍조가 문제라는 것이지요. 아무리 인격이 훌륭하고 탁월한 실력을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학력과 같은 증명서와 간판이 없을 경우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이 사회의 현주소가 아닙니까?

신정아 씨의 경우에도 유명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 못지 않게 영어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하고 사람도 잘 다루어서 그 능력이 아주 출중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상도 여러 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지영 씨도 영문학 박사보다 훨씬 더 뛰어나게 영어 강의를 해서 7년 동안이나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학벌위주의 사회적 장벽은 끝내 넘지 못했습니다. 고졸이면 어떻고 대학 중퇴면 어떻습니까? 그런 학력을 가지고서도 실력만 있다면 이 사회가 인정해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되니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닐까요? 물론 신씨나 이씨가 거짓말을 한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지만, 이와 같은 거짓을 부추기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도 깊이 반성해봐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신정아씨에게 돌팔매질을 하기 이전에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일체의 거짓과 위선, 허풍, 허세, 등등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커피와 커피 잔의 비유처럼, 아무리 좋은 커피 잔에 커피를 타서 마신다고 해도 맛이 더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형식도 중요하지만 내용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도 있듯이 일류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다 능력 있고 다 성공하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이지 우리의 외면이 아닙니다. 종교의 제일 가는 사명은 우리의 마음을 닦아주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갈고 닦아서 우리의 허상(虛像)이 아니라 진상(眞相)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이 우리의 외면이 아니라 마음부터 먼저 갈고 닦아야 한다는 점에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빛으로 본 우리 '마음→눈→온 몸'의 연결 고리>
  본문에서 예수님은 참 알다가도 모를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먼저 33절 말씀을 보세요.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등불을 예로 드십니다. 등불은 켜서 반드시 등경 위에 놓아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계시지요. 혹시 등불이 꺼져 있을 경우 그 등불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 둘지 모르지만 켜져 있는 등불은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않습니다.

움은 흔히 움막이라고도 말하는데 겨울에 화초나 채소 등을 넣어 두기 위하여 땅을 파고 그 위에 거적 같은 것을 덮어 만든 작은 창고 방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움은 감추는 장소를 말합니다. 등불을 켜서 이와 같이 잘 보이지도 않는 움막에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콩 한 말, 보리 두 말 등의 용어와 같이 곡식을 담는 그릇을 말합니다. 그런데 등불을 켜서 이런 그릇에 두는 법도 없습니다. 등불은 반드시 등경(lampstand) 위에 두어서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어두운 밤에도 환히 볼 수 있게 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요! 켜진 등불은 반드시 어두움을 밝혀서 무엇인가를 볼 수 있게 하는 목적에 맞는 장소에 가 있어야만 합니다. 등불을 켜서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장소에 두는 것은 이상한 일이며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너무도 당연하고 너무나 상식적인 진리를 굳이 언급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가 바로 34-35절에 나옵니다. 우리 이 구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등불을 밝혀서 반드시 등경 위에 두어야지 움막이나 말 아래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하신 뒤, 예수님은 우리의 눈이 바로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이 있어야지만 어두움 한 가운데에서도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데 우리의 눈이 우리 몸에 있어서 바로 이와 같은 등불과 같은 구실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등불의 기능은 어두움을 밝히는데 있습니다. 빛을 비추이는데 있습니다. 빛이 없는 등불은 등불이 아닙니다. 빛이 모자라는 등불은 좋은 등불이 아닙니다. 좋은 등불일수록 빛의 강도가 세고 어두움을 밝힐 수 있는 조명 범위도 넓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이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그 의미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의 눈 = 몸의 등불」이라는 등식(等式)을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눈이 몸의 등불이라면 우리의 눈은 늘 밝아야 합니다. 빛을 발산해내야 합니다. 널리 빛을 드러내야 합니다. 좋은 등불일수록 빛의 강도가 세고 어두움을 몰아낼 수 있는 조명 범위도 넓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의 등불인 눈의 경우에도 좋은 눈일수록 빛을 많이 발산해낼 수 있고 어두움을 밝힐 수 있는 조명 범위 역시 넓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예수님은 여기에서 '성한 눈'과 '나쁜 눈'을 날카롭게 대조시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성한 눈을 'healthy', 즉 '건강한'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몸이 성하다 할 때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듯이 성한 눈은 건강한 눈을 말합니다. 또한 영어 성경에서 나쁜 눈은 'not healthy', 즉 '건강치 못한'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건강한 눈'과 '건강치 못한 눈'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눈이 건강할 경우 우리의 온 몸이 밝아질 것이요, 건강치 못할 경우 우리의 온 몸도 어두워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눈이 우리 몸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등불의 생명은 빛입니다. 좋은 등불일수록 빛이 강합니다. 나쁜 등불일수록 빛이 약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눈은 좋은 등불이기 때문에 빛이 선명하고 강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눈을 가진 사람은 강한 빛을 가진 까닭에 당연히 온몸이 밝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나쁜 눈은 나쁜 등불이기 때문에 빛이 흐리고 약합니다. 그런 까닭에 나쁜 눈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온 몸도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우리 성경에 보면 '성한'이라는 말밑에다가 주(註)를 달아놓았는데 '순전하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순전하다는 말은 영어로 'SINGLE VISION', 즉 하나만 본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눈이 건강하다는 것은 눈앞에 이것저것이 나타나서 어지럽거나 희미하지 않고 순전히 하나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피곤에 지쳐 있거나 몸이 아플 경우 제일 먼저 눈에 이상이 옵니다. 눈앞에 나타난 사물이 있는 그대로 선명하게 하나로 보이지 않고 두 개 세 개, 네 개 등 겹쳐서 여러 개의 상(像)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순전하고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저것 잔상이 겹쳐서 여러 개로 나타나 보이는 것은 눈이 건강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눈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맑고 깨끗한 사람은 눈이 맑고 깨끗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눈 역시 흐리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여러 가지 걱정 근심과 스트레스가 가득 차고 불안하고 괴로울 때 제일 먼저 우리의 눈에 이상이 옵니다. 사물이 있는 그대로 'SINGLE VISION', 즉 하나로 보이지 않고 'DOUBLE VISION', 'TRIPLE VISION', 즉 두 겹 세 겹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물을 밝고 선명하게 보지 못하고 어둡고 불투명하게 봅니다. 지난번에 미국 여행을 할 때 저녁에 어느 식당에 갔는데 TV에서 축구 시합을 하는데 잘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로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두겹 세겹 잔상이 겹쳐서 화면에 나오는 스코어도 읽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심신이 피곤하니 눈에 이상이 온 것이지요! 

여러분,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이 건강하다는 것은 마음이 건강하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눈이 건강하다는 것은 마음이 단순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밝게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우리의 눈이 건강치 못하다는 것은 마음이 복잡해서 사물이 두 겹, 세 겹, 네 겹 겹쳐서 어둡게 보는 것을 말합니다. 눈이 건강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만 섬겨서 눈이 'SINGLE VISION', 즉 순전해져서 온 세상의 사물을 투명하게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눈이 성하지 못해서 피조물을 창조주 하나님과 혼동합니다. 피조물을 하나님 위치에 놓고 섬깁니다. 학력을 속이고 출세와 부귀 영화를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말이나 비열한 행위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신정아 씨의 경우 마음이 어두워지니 눈이 어두워졌고, 이내 몸 전체가 어두워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밝은 대낮에 떳떳하게 살지 못하고 겉으로는 크게 출세하고 인기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불안과 초조 속에서 하루도 마음이 편치 못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지 못하니 눈이 성할 리 없습니다. 몸의 등불인 눈이 성하지 못하니 어두움 속에 살아가며 두 겹, 세 겹, 네 겹,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사물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35절에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가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마음이 단순하고 깨끗하면 눈이 성합니다. 눈은 우리 몸의 등불과 같기 때문에 성한 눈은 좋은 등불과 같아서 빛이 충만하게 됩니다. 마음 속에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 한 분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마음이 단순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눈이 건강해서 'SINGLE VISION', 즉 사물을 선명하고 밝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더 귀하게 여기고 여러 피조물들을 모시고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마음이 복잡할 뿐 아니라 눈도 건강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건강치 못한 눈을 가졌기 때문에 눈이 우리 몸의 등불이라고 한 것처럼, 영 빛이 충만하지 못합니다. 빛이 부족해서 어둡게 됩니다. 사물을 두 겹, 세 겹, 네 겹, 복잡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눈이 건강한지 건강하지 않은지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마음이 단순해서 하나님 한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지 그렇지 못한지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이 성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마음이 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마음이 반짝반짝 빛이 나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빛나고 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우리 마음이 빠질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을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목수일을 처음 하는 사람은 아주 불편합니다. 손에 물집이 생기고 피부가 갈라지고 아픕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다 보면 이내 피부에 굳은살이 생겨서 딱딱해집니다. 통증 없이도 목수일을 잘할 수 있게 되지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옳지 못한 일을 하면 양심에 통증이 옵니다. 그러나 그 잘못된 일을 똑같이 되풀이 하다보면 우리의 마음에 굳은살이 배깁니다. 나도 모르게 양심이 마비가 됩니다. 신정아 씨나 이지영 씨나 처음에 자신의 학력을 속였을 때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만일 괴로워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니겠지요.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강퍅해져서 양심에 굳은살이 배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지요! 그리하여 그 마침은 엄청난 파멸이 아닙니까? 오늘 여러분의 눈이 밝아서 여러분의 온 몸이 밝아지기를 원하십니까? 양심에 굳은살이 배기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의 마음이 둔해질까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알았을 때 감격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만 해도 쳐다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오고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너무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고 십자가를 쳐다보니 마음에 감격이 살아지고 말았습니다. 불쌍한 이웃을 봐도 아무 동정심이 일지 않습니다. 지하도에서 노숙하는 분들, 구걸하는 분들을 처음 보았을 때에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는데 너무도 오랫동안 스쳐지나 가다보니까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덤덤해졌습니다. 둔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에베소 교인들처럼 첫사랑의 감격을 잃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 마음이 둔해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이제 예수님은 36절에서 결론으로 참으로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은 눈이 우리 몸의 등불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눈이 건강하다고 하는 사실은 등불의 빛이 밝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이 좋으면 좋을수록 더 많은 빛으로 충분하게 되듯이 우리의 눈이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더 많은 빛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 몸이 밝아서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눈이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이 건강하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단순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에 여러 가지 복잡한 주인을 모시지 않고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기게 됩니다. 마음이 단순하니 눈도 단순해져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선명하게 볼 수 있으며 빛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고 둔해지지 않아서 우리 마음이 밝고 깨끗하니 눈도 깨끗해져서 온 몸 전체가 환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단순하고 밝고 깨끗해져서 눈이 건강해지면 빛으로 충만하게 되는데, 이것을 등불의 광선이 우리를 비추는 상태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마치 등불의 광선이 우리를 비출 때와 같이 빛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오전과 정오에 태양 광선이 밝히 우리를 비췰 때 온 세상은 눈이 보시게 밝고 아름답습니다. 그 밝고도 선명하고도 아름다운 햇빛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단순해지고 밝고 깨끗해져서 온 눈이 성하여져서 온통 빛으로 충만하게 되는 상태가 꼭 이와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눈은 우리 몸의 등불과 같아서 눈이 건강한 사람은 온통 빛으로 가득 찹니다.  그러나 눈이 건강치 못한 사람은 그 몸도 어둡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눈이 빛으로 가득 차서 밝고 환합니까? 그리하여 온 몸이 밝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성한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서 건강하기 때문에 거짓과 어둠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의 눈이 어둡고 침침합니까? 그리하여 온 몸이 어둡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건강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진실이 아닌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눈이 성하고 밝아져서 우리의 온 몸이 환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부터 갈고 닦아야 합니다. 마음의 정원에 잡초가 생기거나 벌레가 끼이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부터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성하면 눈이 밝아집니다. 눈이 밝아지면 우리의 온 몸이 밝아집니다. 바로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온 몸이 밝아서 어두운 부분이 하나도 없으면, 마치 등불이 그 빛으로 우리를 환하게 비출 때와 같이, 우리의 몸은 온전히 밝아질 것"(36절)입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