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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풍랑의 밤을 항해할 때 (행 27:2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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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의 밤을 항해할 때 (사도행전 27장 27절~37절)

이달리야로 가는 배가 풍랑을 만났다. 알렉산드리아란 이름의 이 배는 276명이 타고 있었는데 모두 다 사경을 헤메고 있었다. 여러 날 동안 먹지 못하고 해와 달도 보지 못한 체 절망과 고통의 날이 지속되는데 속수무책으로 배는 앙드리아 바다로 이리저리 흘러가며 표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 물이 얕아지기 시작하는데 물 깊이가 20길이에서 15길이가 되었다.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또 하나의 걱정이었다. 표류하는 배가 물이 얕아지는 곳에서 암초를 만나면 그것은 곧 죽음이었다.

나는 파선의 위기를 만난 이 배의 열 나흘째 되는 날 밤을 생각해 본다. 참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밤이다. 오직 날이 새기를 기다려야 하고 파도가 멈추기를 기다려야 하고 닻을 내려놓고 구원을 위해 오직 기다려야 하는 밤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다보면 개인이나, 나라나 이런 칠흙같이 어두운 밤, 갈 수도 없고 멈춰있을 수도 없는 열 나흘 때 되는 풍랑의 밤을 맞는다.

나는 군대에서 이런 밤을 만난 적이 있다. 1976년 최전방 GP 파랑새호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밤 무슨 사건과 연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비상 식량을 다 꾸려서 완전 무장을 하고 A형 근무에 들어갔다. 나는 분대장으로서 GP의 잔류조가 되어 전쟁 시 180 파랑새 벙커를 사수하는 책임을 맡았고 2개의 분대는 후방으로 퇴각하여 싸우는 임무를 맡았다. 실탄 창고에서 실탄을 꺼내 어깨에 메고 수류탄을 챙기고 벙커 안에서 버티기 위해 길러다 놓은 생수를 수통에 담아두고 있던 그 시간은 꾀나 지루한 시간이었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으로 인해 빚어진 남쪽과 북쪽의 전면전 상황은 북녘 진지 쪽으로 밤새도록 트럭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대포를 실은 차량이 DMZ(북방 한계선)로 진입하는데 그 줄이 끊어지지 않았다. 정말 실감나는 전쟁 대치의 순간이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었다. 전쟁의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지금 아프간 탈레반에게 피랍된 23명의 청년 봉사단들도 어떤 면에서 이제 이틀이 지났지만 풍랑을 만난 밤일 것이다.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민족을 위하고 국민을 위하고 경제를 위한다고 구호는 외치지만 진퇴양난이다.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 가는 알렉산드라 배처럼 대한민국호라는 배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대통령은 있으나 선장 없는 배처럼 간다면 모두 다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모르는 훈련 안된 선원들이 타고 있는 배처럼 방향이 없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다 한 공동체다.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타고 가는 자들로 무너지면 같이 망하고 살면 같이 산다. 대한민국이라는 배, 교회라는 배를 타고 있는 이상 우리는 함께 웃고 함께 살아야 한다. 우리 앞에 바람과 파도의 위기를 느끼고 있다면 어떤 자세로 이 풍랑을 대처해야 하는가?

첫째, 이기주의의 죄를 버리라. (행27:30)

행27:29~30을 보면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한다. 저들은 이물에서 닻을 두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았다. 276명 중에 사공들은 배와 항로에 관해서 전문가이다. 여행객들, 군일들, 바울 그 누구도 배에 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다. 그런데 바다의 물길을 아는 배의 전문가인 사공들이 도망하려 한다. 살 길을 찾아 거짓 행동을 취하며 줄사다리를 내려놓는다. 이는 나만 살겠다는 이기주의의 발상이다. 공동체로서의 교회, 그리고 나라라는 배, 가정의 배가 살려면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를 버려야 한다. 나만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도망갈 길을 찾는 사람은 복을 받을 수 없다. ‘나만’의 죄를 버리라.

누구든지 공동체 안에서 자기 이익만 추구하게 하지 말라. 특별히 교회 안에서 최고 축복의 지름길은 섬김이다. 내 개인적인 야심이나 이익이 없다고 도망가는 인생이 아니다. 섬기라. 그 사랑 때문에 가정, 교회, 나라가 바로 세워진다. 구원을 누리게 된다.

둘째,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라. (행27:31)

바울은 죄수였다. 지도자가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난 지도자는 선장과 선주, 호송관 백부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세상적 지위는 위기의 날에 권위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영적인 힘을 지닌 바울은 저절로 지도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교통하며 죽지 않겠다고 외친 바울의 확신은 힘과 용기의 근원이었다.

행27:31에서 바울은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른다. 사공들이 배에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일러준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했다. 배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 살 길이 아니기에 배 안에서 폭풍우를 대면하며 싸우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군사들은 이 말씀을 듣자마자 거루 줄을 끊어버리므로 도망치는 퇴로를 막아버렸다. 군사들의 명령 체계는 백부장이었다. 그렇지만 군사들의 귀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위기의 날에는 영적인 사람이 진정한 권위자가 된다. 풍랑이 이는 고난의 밤이 깊을수록 귀를 영적인 지도자에게 고정시켜라. 영적 지도자가 어떤 말을 하는지 귀를 열고 들으려 하자. 배에 머물러야 한다면 그것을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음성이다. 교회에 머물러야 한다면 교회에 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내가 살고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시지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데 있다. 죽음의 위기가 커질수록 더욱 세상으로 나가려 하지 말고 귀를 영적 지도자에게 맞추라. 즉,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라. 거기에 길이 있다.

셋째, 모두의 구원을 위해 먹으라. (행27:34)

276명의 사람들은 모두 다 구원을 얻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죽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굶주린 지가 14일이기에 바울은 행27:34에서 음식을 권한다. “음식을 먹는 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한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다. 풍랑의 날에는 지쳐있게 된다. 탈진되어 쓰러지기 쉽다. 그러기에 먹어야 한다. 육체의 기력을 위해 공급되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된다.

행23:36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이처럼 먹어야 한다. 탈진한 엘리야가 물과 떡을 먹고 사명을 회복하였듯이 지친 육체는 회복을 위해 먹어야 한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그러나 내가 살면 너도 살고 삶의 용기를 더 크게 얻는다. 우리는 어떤 공동체 안에 있든지 서로의 구원을 위해 선한 영향력을 제시하라. 그것은 힘들수록 먹으라는 것이다. 서로 먹이우는 것이다. 구원을 위해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이 시간 나는 주고 싶다. 먹으라고 외치고 싶다. 그런데 듣지 않는다. 먹으면 되는데, 마시면 되는데... 그래서 서운하다. 아멘으로 화답하며 먹기를 축원한다.

넷째, 위기의 한복판에서도 축복하고 감사하라. (행27:35)

바울은 말로써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행27:35을 보면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였다.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한 지 14일째 되는 날 밤, 그 캄캄한 암흑의 밤중에서도 바울은 축복한다. 먹을 수 있는 떡을 감사한다. 극복의 마음이 가정의 기상도라면 축복과 감사의 기도는 위기의 구름을 물러가게 하는 기상도이다. 위기 속에 있을수록 축복의 말과 감사의 말을 하라. 그것이 위대한 내일을 가져다 준다.

이명박 씨가 고려대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데 그가 보기에 데모하는 모습도 화끈하지 않고 공부하는 것도 화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총학생 회장에 나와서 당선되었는데 화끈하게 해보겠다고 공약하였다. 그는 공약대로 대학생들을 규합하여 큰 데모를 화끈하게 하고 잡혀들어가서 옥살이를 하였다. 그때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찾아와서 면회를 하는데 다른 말씀은 안하시고 단 세 마디만 하고 가셨다.

“너 성경 보니? 너 여기서 기도 많이 하니?” 옥살이가 힘드냐, 고생 되냐고 묻지는 않으시고 30초만에 면회를 끝내고 돌아가는데 마지막으로 말하시기를 “명박아, 너 하나님의 크게 쓰신다고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셨는데 하나님이 이 나라를 위해 크게 쓴다고 말했다는 축복의 말을 듣고 나자 옥살이가 옥이 아니고 참으로 옥살이 하는 곳이 천국이더라는 것이었다.

위기의 날에 더욱 기도하고 예배하라. 축복의 말과 감사의 말을 하며 희망을 가꾸라. 거기서 견디는 힘이 생겨난다. 응답의 빛이 떠오른다.

다섯째, 함께 의논하며 일하라. (행27:39)

길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께 물으라.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러나 우리의 눈 앞에 땅이 보이고 해안이 보이고 항만이 보인다면 일하는 것을 지체하지 말라. 공동체 모두가 함께 의논하라. 육지에 배를 대기 위한 한 가지 일에 전념하도록 의논하라. 전공도 다르고 사역도 다르고 신분도 다르고 여행 목적도 다르지만 우리교회의 배를 탄 이상 일하라. 의논한 후 구체적으로 협력하여 일하라.

위기의 날에 협력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강하다.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라. 구원의 항구로 항해하는 사역에 손을 내밀라.

여섯째, 필요 없는 것을 버리라. (행27:32)

행27:18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행27: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행27:32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버리니라.”
행27:38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하였다.

이렇게 풍랑을 만난 후에는 276명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린다.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다 버린다. 구원이 중요하지 짐과 기구, 줄사다리가 필요한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도 살기 위해 필요 없는 것을 버려야 한다.

타이타닉이란 영화를 보면 배가 파선 당할 때 보물을 챙기는 사람이 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배가 부서지면 구명 조끼만 입어야 한다. 구명 조끼 대신 몸에다가 금괴 덩어리를 책보에 싸서 집어 넣고 주머니마다 금괴를 집어 넣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교회라는 배가 구원의 항구로 제대로 나아가려면 버릴 것을 제대로 구별해야 한다. 이 세상 어떤 것도 구원의 보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구원을 위해서라면 보이는 것, 더러운 것,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을 버려야 한다. 체면, 위선, 탐심, 으시댐, 교만, 허영을 버리야 한다. 위기의 날은 버릴 것을 알게 되는 날이다.

위기의 날, 거기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하나님이 자기 종을 일으키시며 계획해 놓으신 새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보라! 풍랑 이후 사도행전 28장을 보면 배는 멜리데 섬에 도착한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만 있다면 구원이 보장된다. 바람과 파도는 염려할 것이 아니다. 위기의 날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지도자가 없는 것이 문제다. 파선의 날이 왔어도 하나님보다 나의 방법으로 살 길만 찾는 것이 문제다. 이기적인 죄가 문제다.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버릴 것을 버리면, 말씀을 따라 감사하면, 그렇게 구원을 바라보면 소원의 항구로 나아갈 수 있다. 그 희망과 미래를 보며 폭풍우를 뚫고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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