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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경적인 세계관 (요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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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섬기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하나님께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다시 바알을 섬기는 모습을 본다.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해서 행함으로, 우리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하면서 분노한다.

  그러나 이런 어리석은 모습이, 오늘날에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세계관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단은 똑같은 세계관을 겉모양만 바꿔서 제시하기에, 구별하기가 힘들다. 이 세상에는 2가지 세계관이 있다.

(1) ‘고통’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고통’을 해결하려는 것을 초점을 맞춘, 인간중심의 세계관과,
(2) ‘죄’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죄’를 해결하려는 신본주의 세계관이 있다. 이 2가지 세계관은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다.

  불교는 생로병사라는 고통에서 출발한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스런 현실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를 말한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욕구의 좌절’에서 생긴다고 한다. 자기가 원하는 무엇이 좌절되었을 때, 고통이 생긴다. 그래서 욕구를 없애면, 고통을 없앨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욕구를 가지지 않을 수 있는가?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불교에 의하면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다고 생각하기에 욕망이 생기고, 욕망이 채워지지 않아서 고통이 생긴다. 이 고통을 번뇌라고 한다.

  집착하는 이유는, 무지 때문이다. 모든 고통의 근원은 무지에 있기 때문에, 고통을 없애려면 무지를 깨뜨려야 한다. 무지를 깨뜨리려면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곧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즉, 무지 → 고통 → 깨달음 → 열반이다.

  성경도 고통을 말하지만, 고통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고통’을 통해오는, 긍적적인 면을 강조한다. 욥은 고난을 통해 정금 같이 연단되었고(욥23:10),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숙하게 되었다(욥42:5). 시편 기자는 고난을 통해, 오히려 성숙해졌음을 깨닫고 감사한다(시119:67, 71).

  성경은 고통을 깊이 다루고 있지만, 불교나 다른 종교처럼 고통이 문제의 출발점이 아니며, 또한 고통을 없애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다. 죄를 말함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음을, 근본적으로 말한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과의 화목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은 영적, 도덕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지만, 세상종교의 대표인 바알은 고통에 초점을 맞춘다. 바알은 기복종교로 현세의 풍요와 다산을, 복의 기준으로 삼는다. 고통은 현세의 복을 상실한 상태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관을 통해, 사단은 죄의 문제,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성경의 관점은 죄 → 고통 → 회개 → 천국이지만, 불교에는 죄가 없기에 회개라는 개념이 없다. 대속이나 용서라는 개념이 없기에, 그리스도가 전혀 필요치 않다. 사단은 죄의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하여, 복음의 영광,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기 위해서다.

  고통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세계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죄의 결과는 사망이기 때문이다(롬6:23). 고통의 초점을 맞춘 세계관은, 인과응보의 사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성경적 세계관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1. 누구의 죄인가?

예수님과 제자들은 길을 가던 중에,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게 되었다(1). 그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했다.

  (2)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해서입니까? 자기 때문입니까 그 부모 때문입니까?’ 당시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은 죄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욥기를 보면,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가 가졌던 생각이, 바로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인과응보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둥병 환자를 볼 때 “얼마나 큰 죄를 지었으면, 문둥병에 걸리느냐?”며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죄하고 핍박했다. 또한 “얼마나 큰 죄를 지었으면 사람이 저렇게 가난하게 될 수 있느냐?”며 가난한 사람을 무시했다.

  그래서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고, 부자를 존경했다. 현재의 모든 모습들은,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현재의 모든 모습들을 과거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원인을 찾다가 ‘지금 고난당하는 것은, 과거의 악업 때문이야’

  ‘지금 잘 되는 것은, 과거의 공덕 때문이야’라고 한다. 이렇게 원인을 찾다가 찾지 못하면,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렇다고 말을 한다” 물론 성경에도 “뿌린 대로 거둔다”는 사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적용을 잘 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바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은, 구원의 영역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의 영역에 적용되는 것이다. 만일 뿌린 대로 거두는 법칙을 적용하면, 지옥에 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경은 구원의 영역에 있어서는 ‘우리의 죄를 다 기억치 아니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말한다.

  불교의 인과응보는 부분적으로는 옳지만, 구원론에 적용하기에 잘못되었다. 즉 자기가 행한대로 보응받아, 극락에 가거나 지옥에 가거나, 혹은 개나 소가 된다고 생각한다. 구원에 있어서 행한대로 보응받는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상급은 뿌린 대로 거둔다.

  바알신앙은 넣은 만큼 나온다는 기계적 인과율에 기초를 두고 있다. 기계적인 인과율의 법칙은, 비인격적이고 율법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믿음은 인격적인 관계를 상징하는 말이다. “나는 너를 믿는다”고 할 때, 인격적인 관계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행위구원은 기계적 관계를 상징한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이다. 인격적인 신이란, 단순히 지, 정, 의를 가진 인격체가 아니다. 진정한 인격적인 신은, 피조물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맺기를 원하시는 신이다.

  제자들은 소경의 인격에 두지 못하고, 그가 소경 된 이유에 더 관심을 가졌다. 상대방의 불행을 말하는데 관심을 뒀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경의 치유에 관심을 쏟으셨다. 주님은 고난 당하는 자를, 죄 값이나 저주나 천벌로 여기지 않았다.

  성도들은 남의 불행을 보고, 도와주려는 마음을 가져야지, 남의 불행을 이야기하는데 관심을 두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율법주의라고 하는데, 이런 생각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다. 이러한 과거 지향적인 사고는, 반드시 결정론으로 흐르고, 숙명론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무엇을 조금 이루면 교만해진다. 반면, 이루지 못하고, 환난 가운데 빠지면 절망한다.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지 뭐”하면서, 운명으로 여기며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똑똑하고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았기에, 이 정도로 형통함을 누릴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좋은 집에서 태어나, 공부를 많이 해서 학식이 있었기에, 많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다. 모든 면에서 평탄하자,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인정했다는 의의 근거로 삼았다.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을 보면 형통한 악인이 있고, 고난받는 의인도 있다. 그러므로 과거에 뿌리를 두고서, 현재를 평가하는 잘못된 시각은 버려야 한다.


2. 고난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걸려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고 하셨다.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이 사람을 소경되게 하셨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불행한 상황 중에도, 주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새로운 삶으로 변화된다는 말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다”(롬8:28).

  이 사실을 소경이 눈을 뜨는 이적으로 증명하셨다. 고난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미래의 것이라는 뜻이다. 그 사람의 고난이 과거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오늘의 고통의 원인이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를 위해 있다는 뜻이다.

  형재의 고난이 과거의 업보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소망의 씨앗이라고 선언하신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점이다. 어떤 고학생이 밤을 새워가며, 일하면서 열심히 공부를 한다. 이것이 그 사람의 죄의 결과인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미래를 위한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고자, 주경야독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현재의 고난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시각이다. 어떤 학생이 시험 때마다, 새벽 2-3까지 열심히 공부를 한다.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런가요? 아니다. 미래에 승리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미래 시각이다.

  “이 소경이 왜 소경이 되었는가?” 과거 때문에 미래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답변이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소경이 되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소경이 되었다. 미래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사실 죄인이 감옥에서 고생하는 것은, 과거에 지은 죄 때문이지만, 아이들이 열심히 힘들게 공부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면, 사람들의 사고의 틀이 바뀌게 된다. 과거 지향적인 믿음에서, 미래 지향적인 믿음으로 바뀌게 된다.

  수세기 동안 죄인들을 가두는 곳을 형무소라고 했다. 형무소라는 뜻은 ‘죄인이 대가를 치르는 곳’이라는 뜻이 있다. 인과응보의 개념이 있다. 죄인은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 형무소의 개념이다. 그런데 19세기 영국에 복음의 열풍이 불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각이 변화되었다.

  그때 ‘엘리자베스 프라이’라는 여인이 전면에 나서서, ‘형무소’를 ‘교도소’로 바꾸는 운동을 벌였다. 교도소는 응징이 아니라, 변화가 목적이다. 새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개념이다.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대가를 치르는 곳이 아니라, 미래의 인간을 만들기 위한 곳이 교도소이다. 이것이 성경적 시각이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이 들어가면, 시각이 이렇게 변화된다. 똑같이 고난을 당하고 똑같은 일을 당해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고, 태도가 다르고, 미래를 대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히12:8)에서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러니까 징계 자체도, 과거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미래의 영광스런 모습을 위한 훈련이다는 말이다. 미래가 있으니까 징계도 있다. (욥23:10)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말씀이 나온다. 왜 현재 단련을 당해야 하나요? 정금 같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렇게 성경은 전부 미래 지향적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내일이 오늘보다 낫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엄청나게 많은 일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기에, 절망하지 않는다. 이런 미래지향적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란다. 미래 지향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갈까요?

(1) 아무리 큰 고난이 온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현실은 끝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디딤돌이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직 않았다. 현재의 고난은 미래를 위한 자산이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살기에, 낙심 중에도 실망하지 않는다.

(2) 순종한다.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은, 힘들고 어려워도 순종한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에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자존심 상하게 더러운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는 눈에 발랐을 때, 우리 같으면 순종할 수 있나요? 또 실로암은 비탈길이 상당한 곳이다. 지금도 그 밑으로 내려가려면, 철간을 붙들고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믿고 순종했다. 그랬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


3.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시각을 갖는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소경이 눈을 뜨는 순간부터,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되고, 간증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사명과 직분도 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보냄을 받아야 한다.  축복을 받은 다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으시기 바란다. 응답 받은 다음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병 고침을 받은 다음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종종 병 고침을 받고, 축복 받고, 응답을 받은 후에, 자신이 잘나서 된 것처럼, 불순종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그 축복이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 소경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돌아왔다.

  만약 소경이 자존심을 세워, 침을 뱉어 고친 행동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실로암으로 가지 않았다면 그는 눈을 뜰 수 없었다. 하나님 앞에는 자존심이 전혀 필요가 없다. 자존심을 내세우지 말고 ‘주존심’을 내세우기 바란다.

  소경은 순종하여 눈이 밝아졌다. 그는 육체의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까지 떴다. 사람들이 누가 눈을 뜨게 해주었는지 물어볼 때마다,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잘나고, 능력이 있고, 재수가 좋고, 팔자가 좋고, 똑똑해서 눈을 떴다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하셨다고 증언했다. 소경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우리들도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결론이다. 월남전이 끝나갈 무렵, 캘리포니아에 사는 브라운의 집에, 전쟁에 참전했던 아들이 귀국 즉시, 전화가 걸려 왔다. 어머니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빨리 오라고, 보고싶어 견딜 수 없다며, 어머니는 울먹이며 오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자 아들이 이런 말을 꺼낸다.

  “그런데 어머니, 문제가 있어요. 지금 제 옆에는, 전투에 참전했던 동료가 한 명 있는데, 그는 고아예요. 돌아갈 집도 없고 혈육도 없어요. 게다가 그는 전투 중 팔과 눈을 하나씩 잃었어요. 어머니 그 친구와 함께 우리 집에서 살 수 있을까요?”

  “글쎄다 얘야. 네 마음은 안다만, 며칠 정도는 아니 몇 달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나 일평생 그럴 순 없지 않겠니? 네 마음은 모두 이해하지만, 세상에 그런 불구자를 언제까지나 함께 데리고 살수는 없겠지. 괴롭고 무거운 짐이 되어,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할게다.”

  어머니의 대답을 듣고, 아들 브라운은 무겁게 전화를 끊었고, 침묵의 며칠이 흘렀다. 그리고 통화했던 어머니 앞으로, 한 통의 급전이 날아들었다. 호텔 옥상에서 당신 아들이 투신자살했으니, 빨리 시체를 인수해 가라는 내용이다. 믿을 수 없었다.

  바로 얼마 전, 건강하게 통화한 아들의 투신자살이라니, 어이없어하며 달려가던 어머니는 아들의 주검 앞에서 그만 오열하고 말았다. 아들 브라운은 팔과 눈이 하나씩 없는 불구자였기 때문이었다. 말 한마디가 참 중요하다. 한 마디 말속에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인과응보의 개념이 아니라, 은혜의 개념, 고난에는 영광이 있다는 개념,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며 말하는 성도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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