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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난 이탈리아 기자 마스트로쟈코모 (창 16:1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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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단이 "칸다하르로 외국인 전용 전세버스를 타고 가는데 수도 카불에서 175km 떨어진 가즈니주(州) 카라바그 지역을 지날 때 도로 위로 탈레반 무장대원 수십 명이 나타나 버스를 정지시켰습니다. 그리고 탈레반은 버스를 사막으로 몰고 가도록 강요한 뒤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장소에서 탑승자 전원을 버스에서 내리게 했습니다.
한국인들을 태우고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향하던 아프가니스탄 현지인 버스 운전기사는 19일 한국인 피랍 당시 상황을 로이터 등 외신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탈레반은 한국인 일행을 사막 위로 1시간쯤 걷게 한 뒤 운전기사만 인근 마을 쪽으로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일주일이 지난 7월 26일 남자 인질 1명이 피살되었다는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아무도 죽으면 안돼! 아무도 안돼…아무도 안돼…." 이상은 배형규 목사 피살설이 공식 보도된 후에 어느 여성도의 절규입니다. 배형규 목사는 마흔 두 살에 알라신을 신봉하는 무슬림에 의해 피살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혹한 사태 만큼이나 냉정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2007년 3월 5일 아프가니스탄 헬만드 지역에서 탈레반에 의해 2명이 납치되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인 통역 운전사와 이탈리아 기자 마스트로쟈코모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프가니스탄인은 살해되고 이탈리아인은 3월 19일 석방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이탈리아인 기자 마스트로쟈코모는 알라신을 믿는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인한 살인행각의 배후에는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갈등이 골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Ⅰ.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교적 갈등에 대한 성경적 조명

아랍계와 이스라엘 양 민족 간의 필사적인 대결은 정치적으로 볼 때 사기성 있는 영국의 개입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은 터키 전(戰)에 아랍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터키 지배 아래 있던 아랍인들의 독립을 약속했고 또 유대인 자본가의 전시 헌금을 받기 위해 팔레스틴 땅에 유대국 건설을 확약했습니다.
그 후로 유대인 시온운동은 가속화되었고 유대인의 이주도 계속 늘어났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대인으로 구성된 연합군의 부대들이 이곳에 주둔하여 유대인의 사기를 높이고 해외의 유대인들에게 시온동산 운동으로 이주를 부축이자 아랍인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1947년 UN은 팔레스틴을 아랍인과 유대인 거주지역으로 분리할 것을 결의했으나 아랍측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1948년 초에 제 1차 아랍과 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에서 유대인들이 승리하자 그 해 5월에 이스라엘 독립이 선포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팔레스틴 아랍인들은 고향 땅을 등지고 이웃 아랍국가에서 피난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의 회복을 위하여 주변 아랍 국가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1956년 이집트가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여 이스라엘 선박의 통행을 금지시키자 제 2차 아랍과 이스라엘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선재 공격하여 승리했으나 소련과 미국의 압력에 의해 점령 지역에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1967년 이집트는 아카바만에서 홍해로 나가는 이스라엘 선박의 출입을 금지하게 되자 결국 제 3차 아랍과 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나서 시나이반도, 요르단, 갈릴리 강서쪽 골란고원 등을 점령했습니다.

팔레스틴 아랍인들은 이 전쟁의 패배로 아랍형제 국가들로서는 고향 땅을 회복하는데 역부족이라고 인식한 나머지 팔레스틴 해방기구(P.L.0)를 강화하고 세계 도처에서 친 이스라엘 기구들과 시설들에 대하여 테러 행위를 해온 것입니다. 이집트는 시나이반도를 빼앗겨 최대의 외화수입원인 수에즈운하의 통행료를 못 받게 되자 1973년에 제 4차 아랍과 이스라엘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단독 강화조약을 맺어서 실지(失地)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시리아는 단독강화를 반대하니 아랍 국가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4번이나 걸친 아랍과 이스라엘 전쟁에도 불구하고 중동 평화는 달성되지 못하고 있으며 팔레스틴 난민문제와 요르단강 서쪽지역과 갈릴리 바다 건너 골란고원의 귀속문제를 놓고 지금도 이라크는 중재안을 내놓고 있지만 전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거주하는 땅을 저들 조부에게 약속한 땅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의해서 확인되었고 야곱과 요셉의 유언에서 재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 할 때와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쳐부수고 아이성을 지나 가나안 칠족을 정벌했습니다. 그리고 12지파에 의해 땅을 분배하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정착한 땅이었습니다.

1) 아브람과 사래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본문 16장 2절에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래는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노쇠해 가는 자신의 육신을 보고 자기 스스로 성급한 판단을 내린 결과 사래의 실수는 장차 큰 비극의 불씨가 될 줄을 몰랐습니다.

2)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과 영합(迎合)한 죄 때문입니다.
본문 16장 2절에 『…얻을까 하노라…』는 새 가정을 일으키려는 사래의 인간적 의도를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도 사래는 하갈을 인격체로서보다는 생식수단으로만 대했던 것입니다. 결국 사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일부일처제를 파괴해 버렸습니다.
본문 16장 2절에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들으니라』(솨마)는 '만족하게 동의하다'라는 뜻입니다.
자기 아내 사래가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상반되는 것인 줄 알면서도 한마디의 이유도 없이 아브람은 기분 좋게 응하였습니다. 실로 그들은 칼빈(calvin)이 지적한대로 "약속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그 성취 방법에만 몰두했다."라고 한 말은 합당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이나 계명을 무시하는 처사는 죄가 분명합니다.

3) 아브람과 사래의 세속화된 죄 때문입니다.
본문 16장 2절에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고 한 것은 당시의 족장이나 부호와 상류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부부간에 자식이 없을 때는 아내가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후사를 보도록 하는 것이 고대 근동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우 태어난 아이는 여종의 아이가 되지 않고 본처에게 속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로서 아브람과 사래는 그들의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가 세상 사람들과 같았으며 이것은 곧 그들의 세속화 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Ⅱ.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교적 갈등에 대한 역사적 발전 과정

중동전쟁을 말할 때 믿음의 조상 노아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의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은 하체를 보고 두 형제(셈과 야벳)에게 고할 때 셈과 야벳은 옷으로 아버지 노아의 하체를 덮어 주었습니다. 정상적인 부자관계라고 하면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는 것이 상례인데 함은 형제들까지도 아비의 수치를 보고 쾌감을 느끼도록 충동질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죄악입니다.
저주를 받은 함과 축복을 받은 셈을 볼 수 있습니다(창 9:25-27). 여기에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란 이 말은 야벳 족속이 셈 족속을 지배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고 야벳이 셈의 종교적 축복에 영향을 받아 동참하게 된다는 뜻입니다(Calvin, Keil, Lange).

실제로 구라파의 문화와 과학, 희랍의 철학, 로마의 법 정신 등은 야벳의 후손들에 의해 이룩되었습니다. 유대인은 노아의 첫째 아들 셈의 후예들입니다. 그 중에 노아의 12대손인 아브람의 아내 사라는 이삭을 낳았습니다. 함의 자손들은 앗수르, 바벨론, 가나안, 시돈, 애굽, 리비아 등지에 거주했습니다(창 10:6). 시편 78편 51절, 105편 23절에 함의 땅이라 함은 애굽을 가리킵니다.
아랍인은 셈계의 아브람과 함계의 하갈(애굽인) 사이에 출생한 이스마엘의 후예들입니다. 따라서 이삭이 유태계이면 이스마엘은 아랍계의 시조격 입니다.

1) 하갈과 사래의 싸움입니다.
본문 16장 4절에 『…하갈이 잉태함에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주인을 멸시한지라』고 했습니다.
본문 16장 6절에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사래와 하갈이 서로 질투하는 가운데 하갈에게서는 이스마엘이 사라에게서는 이삭이 탄생하였습니다.

2) 이복 형제간의 싸움입니다.
창세기 21장 9-10절에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하매』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라의 말을 듣고 있던 아브라함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21장 12-13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이스마엘과 하갈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데리고 가는 중에 목이 말라 물을 구하는 아들을 보고 방성대곡할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이스마엘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하갈의 눈을 밝혀 샘물을 발견하고 가죽부대에 물을 담아 이스마엘에게 먹이게 했습니다.

3) 후손끼리의 싸움입니다.
본문 16장 12절에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동방은 지금의 아라비아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스마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소명 받아 100년 동안 하나님을 섬기다가 175세로 그의 파란만장한 나그네 인생을 마감하면서 자기 아들 이삭에게 모든 소유를 주었습니다(창 25:7-11).
이삭과 이스마엘은 막벨라굴에 아버지 아브라함을 장사했습니다. 이삭은 브엘라해로(가데스 서쪽 3km 지점에 있는 아인무웨일레로 추정)에 거하였고 소아시아 북부지방을 삶의 무대로 삼았습니다(창 25 :1).

한편 이스마엘 후예들은 12방백을 이루고 하월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오늘날 시리아, 아라비아, 팔레스틴 동남부)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게 되었습니다(창 25:18). 차츰 그들 후손들끼리 대결하는 양상이 되었고 야곱의 가족들이 요셉으로 인하여 흉년을 피해 애굽에 머물 때는 애굽의 총리대신 요셉 때문에 대우를 받았으나 요셉이 죽고 난 후에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애굽을 통치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한 고초와 학대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셈 계통인 이삭의 후예들입니다. 마침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의 선봉장이 되어 애굽을 나올 때 셈 계통의 모세와 함 계통의 이스마엘 후손인 바로 왕의 대결장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 아랍 동맹국과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싸움입니다.
아브람이 그가 첩으로 취한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의 후손 가운데서 모하메드(Mohamed)가 탄생하며 이슬람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하메드는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이 멸망된 후 꼭 5세기 후인 570년에 출생하였습니다. 모하메드교는 이슬람(Islam)교라고도 하는데 이들의 교회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절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모헤메드는 대예언자로 모세와 예수보다도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선전합니다. 그들은 신은 오직 알라신 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그들의 경전은 코란(Koran)인데 이것은 모하메드의 언행록으로 114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코란경은 모하메드가 사망한지 1년 이내에 그의 친구요 후계자인 아부베클(Abu-Bekr)이 편집하였고 모하메드의 양자인 자이드(Zai(7)가 완성했습니다. 이슬람교의 특징은 신앙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등 모든 면에 식권을 장악하여 복종하지 아니하면 목을 벤다는 포교방법으로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포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이삭을 통하여 내려온 정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중동전쟁은 기독교의 성경과 이슬람교의 코란의 대결장입니다. 저들은 코란으로 무장하고 힘의 일체를 과시하면서 이스마엘 후손들을 세뇌시켜 가고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난 하갈의 자손과 성령의 약속으로 태어난 사래의 자손의 대결입니다(갈 4:22∼24). 전쟁을 할 때마다 이삭의 후예들이 이겼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손의 자유함입니다.

Ⅲ. 전쟁의 땅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

탈레반(Taleban '학생'이란 뜻)은 1994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이슬람 수니파에서도 근본주의 성격을 띤 학생들이 결성한 무장 정치세력입니다. 2만 5,000명으로 시작한 탈레반은 지도자 모하메드 오마르(Omar)의 지휘 하에 1996년 9월 군벌들과의 내전을 끝내고 수도 카불에 입성해,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후 9 11테러를 일으킨 같은 이슬람 수니파 근본주의 테러집단인 '알 카에다'와 결탁해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기초한 공포정치를 전개했습니다. 남성은 반드시 수염을 기르도록 하고, 여성은 교육이 금지됐습니다. 또 '우상숭배 금지'를 이유로, 2001년 인류문화유산인 바미얀 석불을 포격해 파괴하였습니다.
탈레반 정부는 미국이 9 11테러 이후 2001년 말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나서면서 궤멸됐습니다. 그러나 이후 다시 남부 칸다하르 등지와 북부 산악지역을 근거지로 해, 계속 미군과 나토군을 공격하고 있으며, 시민을 상대로 한 대형 테러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탈레반과 오사마 빈 라덴(Bin Laden)이 이끄는 이슬람 테러조직 '알 카에다'는 모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작한 이슬람 수니파 근본주의인 '살라피즘(일명 와히비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살라피즘은 엄격한 절제의 초기 이슬람 공동체 복원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둘은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저항하는 무장활동 시기부터 긴밀하게 협조했습니다. 오마르와 빈 라덴은 각각 딸과 아들이 결혼한 사돈지간이기도 합니다.
탈레반은 작년 말 슈라 핵심 인물들의 신상과 소재를 파악한 미군과 나토군의 공세로 위기를 맞았습니다. 탈레반 남부지역 총사령관 겸 자금총책인 아크타르 오스마니(Osmani)가 작년 12월 남부 헬만드사막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습니다. '탈레반 넘버3'이란 별명의 물라 오바이둘라(Obaidullah) 전 국방장관은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한 파키스탄 퀘타에 숨어 있다가 파키스탄군에 체포됐습니다. 이어 탈레반 군사 총사령관이자 '전쟁 영웅'인 물라 다둘라(Dadullah)마저 지난 5월 12일 헬만드주에서 영국 특수부대와의 교전에서 전사했습니다.

탈레반은 즉각 다둘라 후임에 그의 동생인 물라 바크트 모하마드(Mohammad)를 임명했습니다. 오스마니와 오바이둘라의 후임이 정해졌다는 보도는 나오지 않았지만 탈레반은 공석이 된 슈라 멤버들을 이미 새 인물로 교체했을 것입니다.
"탈레반을 소탕하려면 파키스탄부터 시작해야합니다."
이번 한국인 납치로 국내에서도 악명을 떨치게 된 탈레반은 30년 가까이 파키스탄의 후원 방조 속에 세력을 키웠습니다. 2001년 12월 탈레반 정권이 붕괴한 뒤에도 탈레반이 5년 7개월째 이어진 미군과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군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건재를 과시하자 전 세계의 관심은 '탈레반의 안식처'인 파키스탄에 집중합니다.
정권 붕괴 후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접경지대인 파키스탄 서부지역(발루치스탄 와지리스탄 북서변방주)을 안방처럼 드나들며 힘을 키웠습니다. 지형이 험준해 국경 관리가 거의 불가능한 데다 친(親) 탈레반 성향의 산악부족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이들 지역은 '탈레반양성소' 노릇도 해왔습니다. 특히 발루치스탄주 퀘타는 탈레반의 '임시정부 수도'로 불릴 만큼 탈레반의 영향력이 막강합니다. ISI의 비호 아래 탈레반 최고 지도자 물라 모하메드 오마르(Omar) 등 탈레반 지도부가 이곳에 숨어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최초의 종교적 갈등은 가인과 아벨의 싸움이었습니다. 아벨은 예배 잘 드렸다는 이유로 그렇지 못한 형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이 시점에 무지한 지도자들에 의해 이슬람 문화를 존중한다는 표현은 삼가 해야 합니다. 문화는 사상적 이상을 실현하는 재활동의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룩해 낸 물질적, 정신적 특히 학문, 종교, 예술, 도덕 등의 소득을 가리켜 문명이라고 하고 독특한 개성을 소유한 역사적 배경과 높은 규범적 의의를 가진 계승의 가치를 전통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전통은 개인과 집단을 구성하는 기초가 됩니다.
이슬람 문화를 존중한다고 하는 지도자들에게 묻습니다. 이슬람 문화를 존중하면 불교문화, 유교문화도 존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의 사명은 한국교회의 존재의의만이 아니라 세계에 산재한 참된 기독교의 존재의의입니다. 다만 선교가 지혜로우냐 무모하냐의 논쟁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롭다는 것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거나 복음을 전하지 않는 데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요한복음을 들고 대동강변에서 전도하다가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도끼로 맞아 참수를 당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온갖 고난을 당한 뒤에 순교했습니다. 그 이후로 사도 바울을 위시하여 수많은 종들이 타국민에 의해, 자국민에 의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앞서간 천 천만 성도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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